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기천 (문단 편집) === 초년시절 === 1915년 7월 5일 [[평양시|평양]]에서 독실한 [[개신교]] 가정에서 6남2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유계준은 진남포와 중국 산동-평양간의 무역을 했고 10여 척의 선박과 수십 명의 직원을 거느린 무역업자였다. 또한 [[조만식]], 오윤선과 더불어 평양 산정현교회 장로로서 평양의 저명인사였으며,[* 유계준은 평양 숭인상업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하였다.] [[주기철]] 목사와 함께 일본 식민주의의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에 대해 끝까지 반대한 사람이었다. 형제들은 대부분 의학을 전공했지만, 혼자 법학을 공부하여 법학자가 되었다. 유기천은 1933년 3월 [[평양]]의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내지로 유학해 1936년 4월 [[구제고등학교|히메지고등학교]](現 [[고베대학]])에 입학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관보를 통해 [[구제고교]]를 찾아보니, 히메지고등학교만 입학시험에서 국어(일본어)작문 과목을 부과하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에 응시했다고 한다. 식민지 조선의 숭실학교에서 공부한 일본어로는 입시를 치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3년 간의 [[대학예과]] 과정을 마치고 [[구제고등학교|고등학교]]를 졸업한 유기천은 1939년 4월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에 입학했다. [[구제대학|학부]]에서 그는 "오로지 형법만이 인간의 근본문제를 다루는 학문다운 학문으로 느껴졌다."고 회고할 정도로 형법에 천착해 오노 세이이치로(小野清一郎) 교수의 가르침을 받았다. 1943년 9월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을 졸업하면서 은사인 단도 시게미츠(團藤重光) 교수의 소개로 그의 장인인 [[도호쿠대학|도호쿠제국대학]] 법문학부 민법학강좌 교수 가츠모토 마사아키라(勝本正晃)의 조수가 되어 [[센다이시]]에서 생활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이후 센다이시에서 조선인연맹 일을 맡아보며 동포의 재판에 변호인으로 종사하던 중, [[미군]] 차량에 교통사고를 당해 [[도호쿠대학|도호쿠제국대학]]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이후 요양하다가 [[부관연락선]]을 타고 1946년 2월 약 10년에 걸친 일본 생활을 마무리하고 조선으로 귀환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