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기천 (문단 편집) === 서울법대 교수시절 === 귀국 직후인 1946년 4월부터 대학 선배인 [[고병국]] 교장의 경성법학전문학교 교수가 된 유기천은 1946년 10월 [[국대안]]에 의거한 국립[[서울대학교]]가 설립되자 경성법전이 개편된 [[서울법대]](초대 학장 [[고병국]])의 조교수로 부임했다. 당시 국내 법학계는 [[고병국]] 교장을 중심으로 경성법전에 집결한 동경제대파(東大派, [[고병국]]파)와, 현민 [[유진오]]를 핵으로 하는 경성제대파(城大派, [[유진오]]파)로 갈려있었는데 경성법전과의 통합을 반대한 [[경성제대]] 출신의 성대파는 [[국대안]] 파동 당시 일괄 사표를 제출하고 총사퇴하여 [[고병국]] 학장 체제의 법과대학도 위기를 겪었다. [[경성제대]] 재학생들 역시 경성법전의 후신인 [[서울법대|법과대학]]으로 가기를 거부하고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문리과대학 정치학과]]로 옮겼다. 이런 와중에 유기천은 회고록에서 당시 자신의 교수직이 위태롭게 됐었다고 회고했다. 이는 후술할 1965년 [[황산덕]] 교수 파면까지 이어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립서울대학교는 출범하여 1947년 차차 안정을 찾아갔으며, 유기천은 법과대학에서 형법을 가르치면서 민법을 담당한 [[김증한]]과 함께 명강의 교수라고 평가받았고, [[최태영]] 학장 후임자인 진승록 학장이 사임하자 학장서리로서 6.25 당시 전시연합대학 체제하에서 서울법대의 기초를 놓으며 부산에서 법학교육을 계속하였다. 당시 부친을 비롯한 일가친척과 동료 제자들이 무수히 죽어나가는 아픔을 겪었기 때문인지, 서울대 부산 가교사 교문에 'FIAT JUSTITIA RUAT CAELUM'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라)이라는 라틴어 철제 아치를 세웠다. 1952년에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에 교환교수로 갔다. 1953년에 귀국했다가 1954년에 다시 하버드 로스쿨로 가서 미모의 법학자 헬렌 실빙(Helen Silving)을 만나 결혼하였다.[* 실빙은 '하버드-이스라엘 프로젝트', 즉 신생 [[이스라엘]]의 법적 기초를 연구하는 팀의 홍일점인 미모의 여성학자였다. 원래 [[폴란드]] 크라카우 출생의 정통[[유대인]]으로 비인 대학교에서 한스 켈젠(Hans Kelsen)의 제자 겸 조수로 총애를 받다가 하버드 로스쿨로 온 것이었다. 유기천보다 9세 연상(1906~1993)이었지만 종교적,연령적 난관을 극복한 사랑으로 결혼하여 평생의 학문적 반려자로 지냈다.] 그때 나이가 39세였다. 1954년부터 1958년까지 미국에 머물면서 [[예일 대학교]]에서 '한국문화와 형사책임'(Korean Culture and Criminal Responsibility)이란 논문으로 한국인 최초로 법학박사(SJD)학위를 받았다. 당시 함께 공부하던 정대위 박사(후일 [[건국대학교]] 총장)와 교분이 깊어 [[인류학]]을 비롯하여 인문사회과학과 융합하는 법학을 만들어보려 하였다.[* 실제로 두 사람은 귀국 후에 서울대학교 사법대학원에서 '법과 문화'라는 과목을 공동 강의하였다.] 1960년 한국형법을 영어로 번역하여 책으로 출간하였다. 이어서 1968년에 독일어로도 번역 출간하였다.[* 지금도 해외에서 한국형법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책들을 본다고 한다.] 또한 '국제비교법사전'(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Comparative Law)에도 한국법에 관한 장문의 소개논문을 실어 안내자 역할을 하였다. 1958년에 귀국한 후 1959년 서울대 교무처장을 역임했다. 1959년 하와이에서 10년마다 열리는 '동서철학자 대회'(East-West Philosophers Conference)에 초청받아 한국을 대표하여 발표하였다. 1961년에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장, 이듬해에는 서울대학교 사법대학원을 설립하고 사법대학원장에 취임하였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제9대 서울대 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학생들에게 한·일관계의 정상화 필요성을 역설해 '어용 총장'이란 비판을 받았다. 반면 박정희에게서는 “왜 데모를 못잡느냐, 총장이 못하면 군대를 동원하겠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대해 '''“대통령이면 대통령이지 대학을 총장보다 어찌 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느냐”''' 외치고 일어서서 나와버렸다. 결국 1년 3개월만에 서울대 총장직에서 --짤리고--물러나고 말았다. 서울법대 교수 시절 동료 교수인 [[황산덕]]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이시윤]], 민사소송법입문, 제2개정판, 139~141면.] 이들의 관계는 해방 후 [[서울대]]에서 벌어지던 동대파(東大派)와 성대파(城大派) 파벌 다툼이 파열음으로 나타난 부분이다. 동대파의 좌장인 고병국 교수가 후배인 유기천을 한국인 최초의 법학박사로 만들기 위해 성대파인 황산덕이 제출한 박사논문의 심사를 이유없이 미루었고([[http://www.graphys.co.kr/bin/bbs/bbs.htm?table=180307221741&st=view&id=56&bo_class=9&fpage=&spage=§er=D|출처]]). 이 갈등은 결국 1965년 유기천 서울대 총장이 황산덕 교수를 파면하는 데 이르게 된다([[http://www.graphys.co.kr/bin/bbs/bbs.htm?table=180307221741&st=view&page=&id=83&limit=&keykind=&keyword=&bo_class=&fpage=&spage=|참조]]). 1963~1965년 [[국제법]]학계에서 [[이한기]]의 선공으로 시작된 [[박재섭]]과의 치열한 논쟁 역시 동일한 맥락에서 파악될 수 있다. 1971년 초에 학회,강연등을 위해 대만,필리핀을 갔다가, 대만에서 이상한 말을 들었다고 한다. 자신이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다른 학자들이 "너희 나라 친위쿠테타 한다던데?"라고 물었던 것. 놀라서 반문하니 한국에서 대만의 정치체재인 총통제,비상계엄등에 대한 관련 자료들을 전부 수집해갔다는 것. 강의실에서 박대통령이 대만식 [[총통#2|총통제]] 비슷한 장기집권을 획책하고 있다는 발언을 하였다. --오오, 그대는 [[용자]]!!--[* 71년 그 유명한 장충단 유세의 김대중 후보가 만약 이번에 박정희가 또 당선되면 총통제를 실시해 종신 독재자가 될 것이라는 경고가 이 유기천 교수의 말을 들어서라고 한다.] 그날 저녁 [[중앙정보부]] 요원이 그를 체포하러 사택으로 오기 직전에 제자 검사의 귀띔으로 뒷문으로 피신하였다. 그 후 2개월 10일 동안 이곳저곳 숨어다녔다. 그러다가 미국 하버드 대학교의 라이샤워(E. Reischauer) 교수가 유교수를 미국으로 보내라고 [[김종필]] 총리에게 편지를 써준 덕분에 겨우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사실은 부인 실빙 교수가 라이샤워 교수에게 간청하여 라이샤워 교수가 김종필 총리에게 압력을 가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