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윤치호 (문단 편집) == 소개 == [[개화파]]로 [[독립신문]]사의 창립 인사 중 중 한명이자 제2대 사장이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통해 계몽 운동, 민권 운동, [[의회]] 설립 운동을 벌였으나, [[황제]]에게 불충하는 [[역적]] 취급을 받고 민중들의 배척을 받게 된다. 그에 따라 민중을 경멸하였고 노선을 변경하여 실력 양성론에 매진하다가 흥업구락부, 수양동우회, 청구구락부 사건, [[일본]]의 미행과 내사 등을 계기로 결국은 [[친일]]로 전향하였고 이것이 죽음에도 영향을 줬다. [[서재필]], [[안창호]], [[유길준]] 등의 계몽론자와 맥을 같이하였으나 한국의 무질서와 감성주의, 사농공상, 문존무비 사상에 [[염증]]을 느껴 서서히 계몽 운동을 포기하게 된다. 비슷한 시대의 [[흑화]]한 계몽론자였던 [[박중양]], [[이규완(1862)|이규완]]과도 다소 달랐다. 그와 성향이 비슷한 인물로 박중양이 지목되지만 박중양은 [[조선인]]의 가능성 자체를 철저하게 부정했다. 윤치호는 교육 사업, 자선 사업, 언론 계몽 활동 등으로 민도를 개선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규완은 참정권과 자치권을 요구하고 참정권과 자치권을 얻으려면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윤치호는 이규완의 실력 양성론과는 유사했지만 조선인 스스로 참정권과 자치권을 행사할 가능성은 낮다고 봤다. 윤치호의 삶은 양면성을 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외무협판 등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나고 193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그는 [[중추원(일제강점기)|중추원]] 참의 자리를 회피하거나 사양하는 등 일제에 비협조적인 자세로 일관했다. 한국의 구습을 혐오하고 자기식 합리주의를 유지하면서 비이성적인 일반 [[백성]]들을 비웃었지만 동시에 안타깝게 여기고 동정하여 계몽운동에 힘썼다. 비도덕적이고 부패한 한국의 식자층을 혐오하면서도 필요에 따라 친분을 쌓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재를 알고 관련 인사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알게 된 내용과 존재를 누설하지도 않았지만 협조하지도 않았다. [[미국]]의 강력한 힘과 일제 식민 통치의 악랄함이라는 [[팍스 아메리카나|시대적 흐름]]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청년 시절 당한 [[인종차별]]로 [[백인]] 혐오에 눈이 멀어 합리적인 판단을 상실하고 일제에게 협조하였다. 민중과 국본을 수탈한 일제의 통치를 꺼리면서도 말년엔 일제의 위협에 어느 정도 굴복하였고, 서구의 합리주의를 찬양하면서도 서구를 적대시했다. [[독립운동]]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면서도 [[독립운동가]]들과 행보를 같이했고, 사후에는 이러한 이중적 행적을 근거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올랐다. 유창한 외국어 실력을 살려 번역가로도 활동했는데 '[[찬송가]]의 한국어 번역본'[* 찬송가의 처음 번역된 이름은 찬미가였다.]과 1908년 '[[걸리버 여행기]]', [[아이소포스]]의 '[[이솝 우화]]'를 [[한국어]]로 번역하여 [[한국인]]들에게 소개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