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음서 (문단 편집) === 에피소드 === [[야사(역사)|야사]]에 따르면 [[인조반정]] 공신 [[이시백]]의 5세손인 [[영조]] 대의 [[좌의정]] 이후(李𪻶[* ⿰王厚], 1694~1761)는 노인이 되도록 30번이나 과거에 응시했지만 [[낙방|미역국]]만 먹었고, 그에 비해 동생인 이유는 그가 25살 때 이미 급제했다. 그래도 [[연안 이씨|좋은 배경]] 덕분에 음서로 나주 목사를 지내고 있었음에도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다는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었다.[* 참고로 이시백의 아버지 [[이귀]]도 음서 덕에 인조반정 전에는 군수 직을 여러 번 역임했었다.] 그러다가 일 때문에 잠시 [[한양]]에 올라와 있을 때, 마침 동생의 생일잔치가 있었고 꼭 참석해 달라는 동생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참석하긴 했는데, 동생을 비롯한 동석하는 대감들은 거의 다 자신보다 품계가 높은 관료들이었다. 그 때문에 스스로 말석에 가 앉았지만 주인의 형이라 주위 사람들이 권해 상석에 앉았다. 이 때 동생이 한 점쟁이를 불러 점을 보게 했는데, 잘난 척이 심하던 호조 판서가 한 명 한 명 언제 점을 보겠냐며 이 중에 누구가 가장 먼저 정승에 오르겠나 봐달라고 했더니 그 좌중에서 하필이면 나주 목사 이후를 지목했다. 이후는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열등감 때문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자신이 어떻게 정승이 되겠냐면서 화를 내고 나왔다. 그 날 밤, 형과 대면한 동생은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데 마침 곧 과거가 있으니 응시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했고, 응시하자 하필이면 평생 인연이 없던 과거에 덜컥 붙어 버렸다. 그의 나이 56세였으며, 동생이 과거에 합격한지 31년 만이었다. 당시 한양은 낙방도사가 드디어 급제했다고 떠들썩했다. 그리고 7년 후, 이후는 정말로 그 잔치에 동석했던 판서들보다도 먼저 우의정에 올랐다. 점쟁이의 점이 맞아떨어진 셈인데, 이후는 원래 능력만 따지자면 정승감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과거를 급제하지 못한 탓에 여지껏 승진이 멈춰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저 일화가 있던 시점의 이후가 지내던 관직인 나주 목사는 평안 감사, 과천 현감과 함께 조선시대 지방관 중 3대 요직이라, 명문가의 후예라는 배경만으로 올라갈 만한 만만한 관직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끝은 불행했으니, 이후는 얼마 뒤 좌의정 겸 세자부[* 세자시강원 실무책임자이자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관직. 당연히 명목상으로는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인격자로 인정받는 사람만 오를 수 있다. 실제로는 좌우정승 중 한 사람이 겸임.]로 임명되었는데, 문제는 모셔야 할 세자가 바로 [[사도세자]]였다. 그 뒤 사도세자의 평양원유 사건에 연루된 그는 세자와 영조 사이에 끼여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결국 영의정 이천보, 우의정 민백상과 함께 음독 자살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결국 과거 급제로 인해 그의 운명은 파란만장한 생으로 바뀌게 된 셈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후에게 과거 시험을 보라고 추천한 사람은 [[조태채]]의 아들 조관빈(趙觀彬)이었다. 하지만 음서로 지방관이 되었다가 과거 시험 응시를 추천받아 합격하고 좌의정까지 된 것은 사실이다.[[http://sillok.history.go.kr/id/kua_13703004_003|#]] 또한 야사에는 이유가 이후의 동생이라고 나오나 실제로는 이후의 형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