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종석 (문단 편집) === 정치 입문 === 1994년 말부터 [[비정부기구]] 쪽에서 활동하였다. 가까운 동료들과 만든 청년활동단체인 청년정보문화센터 부소장직을 맡았다. 1995년 [[모래시계(드라마)|모래시계]] 세대 정계진출 관련 기사들이 많이 나오던 때부터 정계진출 유력 후보로 자주 거론되었다. 그러나 1996년 총선에는 당시 자격이 되지 않아 출마하지 못했고, 이후 1999년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대규모 [[사면]]복권 당시 [[복권(법률)|복권]]이 돼서야 출마 자격을 얻게 되었다. 1999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16대 총선]]을 앞두고 한창 [[86세대|386세대]] 운동권 출신 영입이 활발할 때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 서울 [[성동구(선거구)|성동구]] 지역구에 출마하여[* 그의 모교인 [[한양대학교]]가 있는 지역이다. 임종석 외에도 지역구 출신이 아니지만 자신이 나온 대학교나 일했던 공장 소재지 지역구에서 당선된 의원이 있는데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 출신인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노동자 출신인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다. 우 의원의 지역구인 [[서대문구 갑]] 지역에 [[연세대학교]]가, 홍 의원의 지역구인 [[부평구 을]] 지역에 [[GM 한국사업장]] 부평공장이 있다.] 당시 상대후보였던 4선의 [[이세기]] [[한나라당]] 의원을 누르고 당선되면서 정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다만, 임종석 자신은 의외로 전대협 의장 출신이라는 화려한 경력 비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의원은 되지는 못하였는데, 이후 2004년 17대 총선에서도 당선되고, [[열린우리당]] 대변인도 했다지만, 당내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거나 거물급 의원으로는 성장하지 못했다. 정계 입문 후 임종석의 의정활동은 [[국가보안법]] 폐지, [[북한인권법]] 제정 반대, 대북 교류사업 등에 주로 초점이 맞춰진다. 초선 의원 시절인 2000년 7월 임종석은 국보법 관련 국회 토론회에 참석해 이 같은 발언을 했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보완책으로 간첩죄에 대해 형법상 처벌을 강화하면서 대북 접촉, 통신교류에 대해선 남북교류협력법을 통해 규제하면 된다." 또 2004년 7월에는 의원실 주최로 '국보법 폐지를 위한 간담회'를 열었고, 같은 해 8월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 국보법 폐지 입법추진위원모임에서는 "국가보안법은 위헌적이며 반(反)민주악법의 상징이기에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2004년 12월에는 국보법 연내 폐지를 촉구하는 의원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참여정부]] 당시 대북송금 특검수사에도 적극 반대했는데, [[국민의 정부 불법 대북송금 사건|대북송금 사건]]은 [[국민의 정부|김대중 정권]] 때인 2000년 6월, [[2000 남북정상회담|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에 5억 달러를 불법송금한 사건을 말한다. 2003년 3월, 임종석 등 당시 민주당 소장파 의원이 주축이 된 모임인 '정치를 바꾸는 젊은 희망'은 대북송금 특검 수사 반대성명을 냈다. 같은 해 6월에는 [[새천년민주당|민주당]]·[[개혁국민정당|개혁당]](대표 [[유시민]]) 소속 의원 61명과 함께 대북송금 특검 수사 마무리를 촉구하는 성명서에도 이름을 올렸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18대 총선]]에서는 [[뉴타운]] 열풍으로 [[한나라당]] [[김동성(1971)|김동성]] 후보에 밀려 낙선하게 되고, 이후 당내에서 계속 활동하면서 재기를 노렸다. 그리고 [[민주통합당]] 출범 당시 당 사무총장에 임명되면서[* 당 대표였던 [[한명숙]]은 친노 직계인사였고 임종석은 [[민평련]]계 인사였다.] 처음으로 비중있는 역할을 맡게 되었지만 문제는 이 당시 임종석이 [[정치자금법]] 문제로 재판에 걸려 있었다는 점. 결국 [[제19대 국회의원 선거|19대 총선]] 직전 나온 1심 판결에서 유죄가 선고되면서 총선 출마가 좌절되었다. 사실 출마 자체는 할 수도 있었지만, 재판 문제로 인해 당 내에서도 공격이 상당히 많이 나오면서 결국 공천을 반납한 것은 물론 사무총장직까지 사퇴했다. [[한명숙]] 당시 대표가 끝까지 만류했다고 하는데 결국 그는 사퇴를 선택하고 말았다. 여기에는 사무총장으로서 공천권과 관련하여 소위 노이사 공천([[친노]]-[[이화여자대학교|이화여대]]-[[86세대|486]] 위주 공천)을 주도했다는 공세도 한 몫 했고 실제로도 그런 측면이 강하다. 그가 떠나면서 공석이 된 [[성동구 을]] 지역구는 [[임수경]] 공천설이 돌았으나, 임수경은 비례대표로 공천을 받았고, 그의 친구인 [[홍익표]] 한양대 겸임교수가 지역구를 물려받았다. 그의 사퇴 원인이 된 정치자금법 문제는 2심에서 무죄로 뒤집히면서 최종적으로 무죄 선고를 받았다. 2014년 '(사)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해당 재단은 남측 방송을 대리하여 대한민국 내 북한 저작물 이용의 저작권료를 북한에 지불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국가간 저작권을 존중하는 [[베른 협약]]에 가입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타 국가의 저작권물 이용에 관해서 저작권료를 지불하지 않고 있고,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형평성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2014년 지방선거]]에서 [[박원순]] 시장 캠프에서 활약하면서 [[서울특별시 부시장|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에 임명되어 2015년까지 재직하였고, 때문에 [[박원순계]]의 대표주자 정치인으로 분류되었다. 2014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중도주의|중도]]를 지향해야 한다는 뜻이냐"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임종석은 당시 야당이던 [[새정치민주연합]]이 "노선이나 정책이 상당히 치우쳐있다"며 "과도하게 사회, 정치적 문제에 집착하고, 국가 운영과 관련된 의지에는 소홀하다"고 지적했다.[[http://v.media.daum.net/v/20140809030310127|*]] 이윽고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20대 총선]] 출마를 위해 정무부시장 직을 내려놓은 후 [[은평구 을]] 지역출마를 선언하고, 정계의 거물이었던 [[이재오]]와 겨뤄서 정치적인 재기를 모색하였는데, 그만 당내 경선에서 무명의 신인이었지만 이미 은평구 내에서 기반을 착실하게 만들고 있었던 [[강병원]] 후보에게 패하면서 아예 출마 자체를 하지 못했다. 전대협 의장 출신으로 많은 기대를 받으며 정치에 입문했지만, 18대 총선부터 20대 총선까지 세 번의 선거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시면서 10년 넘게 원외에 남게 되었다. 임종석과 함께 국회의원 자리에 도전한 다른 박원순계 정치인들도 [[기동민]]을 제외하면 경선과 본선 과정을 통과하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