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영희 (문단 편집) == 암 투병 == >"뒤돌아보면 내 인생에 이렇게 넘어지기를 수십 번, 남보다 조금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가기에 좀 더 자주 넘어졌고, 그래서 어쩌면 넘어지기 전에 이미 넘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 넘어질 때마다 나는 번번이 죽을 힘을 다해서 다시 일어났고, 넘어지는 순간에도 다시 일어설 힘을 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이 넘어져 봤기에 내가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난 확신한다." >- [[조선일보]] 고별칼럼 "문학의 힘" (2004년 9월 25일자) 중에서 장영희가 처음 암에 걸린 것은 안식년으로 [[미국]]에 체류하고 있던 2001년 말이다. 당시 가벼운 마음으로 [[하버드 대학]]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그만 [[유방암]] 진단을 받았던 것. 장영희는 자신의 증상을 가족들에게만 알리고 조용히 치료를 받았으며, 귀국 직후에 완치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암과의 지긋지긋한 사투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2번째 암 진단은 2004년 9월의 일이었다. 장영희는 그해 여름부터 신체에 불편함을 느껴왔지만, 칼럼 기고를 비롯한 대외활동의 증가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결국 가을학기 개강 직후, 온몸을 움직이기 힘든 지경에 이르러서야 진단을 받은 결과 척추암 판정을 받게 되었다. 3년 전 완치되었다고 생각했던 유방암이 척추로 전이된 것이 원인이었다(유방암이 척추로 전이되는 사례는 10% 이하로 낮은 편이다.). 결국 장영희는 [[학교]] 강의, 칼럼 기고를 비롯한 일체의 대외 활동을 중단하고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본격적인 암 투병을 시작했다. 입원은 2개월만에 끝났지만, 이후 2주 간격으로 병원을 찾아 항암치료를 받는 생활을 계속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다음해 1학기에 다시 수업에 복귀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파일:yvfJn84.jpg]] 당시 장영희의 강단 복귀는 주요 신문과 방송을 통해서도 소개될 정도로 대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말하자면 '희망의 아이콘'같은 존재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장영희와 인터뷰를 하려는 각 언론사의 기자들이 워낙 많이 몰려들다 보니, [[조교]]가 은행에서처럼 번호표를 나눠주는 진풍경이 생겼을 정도. 같은 해 3월 조선일보 문학칼럼을 엮은 수필집 <문학의 숲을 거닐다>도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