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영희 (문단 편집) == 사망 및 사후 == 장영희의 척추암 항암 치료는 2007년에 끝났다. 완치는 아니지만, 강의와 연구, 대외활동을 비롯한 일상 생활을 안정적으로 영위할 수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해 여름에 간암 진단을 받게 되었고, 2008년 1학기를 끝으로 강단을 떠났다. 공식적인 이유는 안식년이었지만, 이때부터 병세가 점차 악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해 9월 [[서강대]] 동문 행사에 참석한 것이 장영희가 마지막으로 참석한 대외 공식행사였다. 이듬해인 2009년 4월 말, 병원에서 입원 중이던 장영희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어머니 이길자 여사에게 작별 편지를 남겼다. 사실상의 [[유언]]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글은 장영희의 사망 직후, 언론을 통해 소개되어 독자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엄마 미안해. 이렇게 엄마를 먼저 떠나게 돼서.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 찾아서 기다리고 있을게. 엄마 딸로 태어나서 지지리 속도 썩였는데, 그래도 난 엄마 딸이라서 참 좋았어. 엄마, 엄마는 이 아름다운 세상 더 보고 오래오래 더 기다리면서 나중에 다시 만나."''' 4월 28일 퇴원한 장영희는 자택에서 가족들과 함께 마지막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5월 7일 병세가 급격히 나빠진 채 병원으로 후송되어 이틀만인 5월 9일, [[향년]] 57세에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파일:ZJdWV7F.jpg]] 장영희의 장례식은 5월 13일, [[서강대]] 성 이냐시오 학교 성당에서 재단이사장인 유시찬 보나벤투라 신부를 포함한 [[예수회]] 사제단의 집전으로 엄수되었다. "내가 죽어 내 관을 나를 사람도 제자들이 될 것"이라는 생전 고인의 뜻에 따라, 장영희의 관은 서강대 영문학부 학생들이 운구했다. 유해는 [[충남]] [[천안]]공원묘원에 위치한, 15년 앞서 세상을 떠난 선친 장왕록 씨의 곁에 안장되었다. 장영희의 마지막 수필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은 사후 1주일 후 발표되었고, 출간 직후 주요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다. 장영희의 유족들은 그해 9월,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의 인세 수입 등을 포함한 5억원을 모교 [[서강대]]에 장학금으로 기부했고, 이듬해(2010년) 2학기부터 매 학기마다 '장영희 장학금'이 지급되기 시작했다. [[파일:lO6LhiM.jpg]] 2012년 9월 25일에는 서강대 [[정하상]]관(J관. 신인문관)의 315호실이 '장영희 강의실'로 지정되었다. 전직 교수의 명칭이 붙은 강의실 지정은 서강대 역사상 최초의 일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