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병탁 (문단 편집) == 선수 시절 == 여수서초에서 축구를 시작한 정병탁은 여수중 재학부터 그리 큰 키는 아니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빠른 발을 앞세워 축구선수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축구 명문인 배재고를 거쳐 연세대학교 1학년인 1964년부터는 성인 대표팀에 발탁되는 영광까지 누렸다. 군팀이 상한가를 쳤던 1960년대 해병대에 입대하며 선수 생활을 이어간 정병탁은 대표팀에서도 주축 레프트윙으로 활약했다. 그런데 이때 정병탁을 비롯한 한국 축구 역사에 큰 획을 그을 만한 일이 벌어졌다. 북한이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8강에 오르며 세계의 주목을 받자 체제의 우월성을 자랑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축구팀을 결성했기 때문이다. 바로 '축구판 [[실미도]] 부대'였다. 정권 실세인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나선 창단한 이 팀은 강제로 각 팀에서 가장 축구를 잘하는 이들을 뽑아 들였다. 국가대표팀도 아닌 곳에서 강제로 선수를 빼가는 일이 벌어졌지만 그 누구도 이를 막을 수는 없었다. 날아가는 새도 떨어트린다던 중앙정보부의 지시였기 때문이다. 팀 이름도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중앙정보부 슬로건에서 '양지'를 따 왔다. 물론 당대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정병탁도 해병대에서 양지로 옮겨야 했다. 정병탁은 소속팀 양지의 주축으로 활약하면서 1970년에 출범한 '''국가대표 1진 청룡의 초대 주장'''에 선임됐다. 당시 아시아 최고의 대회였던 1970년 제 13회 [[메르데카컵]] 조별리그 3차전 인도와의 경기에서 2도움을 기록하며 팀을 결승에 올렸고, [[버마]]와의 결승전 [[박이천]]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며 대한민국의 첫 대회 단독 우승에 앞장섰다. 역시 주장으로서 가장 먼저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youtube(iPJwgkgyJz4)] 그러나 대회 종료 후 만 28세의 젊은 나이에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한 정병탁은 이후 신탁은행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1971년 한국신탁은행 축구단의 창단 첫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우승과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준우승에 일조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