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한 (문단 편집) == 진(秦)나라 피지배층들이 만든 세력인가? == 앞서 살펴본 중국 측 기록들에 따르면 [[진한]](辰韓)은 [[진(통일왕조)|진(秦)나라]]에서 [[노역]]을 피해 망명한 진(秦)나라 피지배층들이 [[마한]](馬韓)에 빌붙어 세력을 만든 게 그 기원이라고 기록해놨다. 심지어 [[마한]](馬韓)과 언어가 다르며 [[상고한어|상고 중국어]]와 비슷하다는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다. [[진한]](辰韓)이 후에 그대로 [[신라]]로 발전하기 때문에 만약 이러한 내용들을 필터링 없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신라]]의 기원은 [[진(통일왕조)|진(秦)나라]] 피지배층들이 노역을 피해서 도망쳐와 만들어진 집단에서 시작되는 웃지 못할 상황이 연출된다.''' 최근 중국학계에서는 이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진한]](辰韓)을 [[진(통일왕조)|진(秦)나라]]의 유민들이 세운 망명 정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른바 '''[[동북공정]]'''은 [[고구려]] 뿐만 아니라 [[삼한]](三韓)의 역사에도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럼 정말 [[진(통일왕조)|진(秦)나라]] 피지배층들이 만든 세력일까? [[진(통일왕조)|진(秦)나라]] 피지배층들이 노역으로 부터 도망쳐 [[진한]](辰韓)을 세웠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기록에 대한 의문점들은 시공간적으로 그 중간에 위치한 '''[[위만조선]]'''의 존재를 염두에 둘 때 어느정도 해소된다. >二十餘年而陳·項起, 天下亂, 燕·齊·趙民愁苦, 稍稍亡往準, 準乃置之於西方. …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東度浿水, 詣準降, 說準求居西界, (故) [收] 中國亡命 何焯曰, 故字當作收. 爲朝鮮藩屛. 準信寵之, 拜 爲 博士, 賜以圭, 封之百里, 令守西邊. >([[진(통일왕조)|진(秦)나라]]의 통일 이후) 20여 년 후 [[진승]]과 [[항우]]가 일어나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춘추전국시대)|연(燕)]] · [[제(춘추전국시대)|제(齊)]] · [[조(춘추시대)|조(趙)]]의 백성들이 근심하고 괴로워하여 점점 [[준왕|준]]에게 망명하여 갔는데 [[준왕|준]]은 이에 그들을 서쪽에 두었다. … [[연(춘추전국시대)|연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하여 오랑캐의 옷을 입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왕|준]]에게 항복하였다. [[준왕|준]]에게 말하여 서쪽 경계에 살게 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중국의 망명인을 거두어 [[고조선|조선]]의 번병(蕃屛)이 되겠다고 [[준왕|준]]을 설득하였다. [[준왕|준]]이 (그를) 믿고 총애하여, 그에게 박사직을 주고 홀[圭]을 내렸으며 100리를 봉하여 서쪽 변경을 지키도록 하였다. >---- >《[[위략]](魏略)》[[https://ctext.org/text.pl?node=603363&if=gb&show=parallel|#]] 중국 역사의 첫 통일 제국 [[진(통일왕조)|진(秦)나라]]가 얼마 못가 멸망하고 그 유명한 [[초한전쟁]]이 일어나 [[중원]]이 다시 혼란해지니 '''기원전 3세기를 기점으로로 [[중원]]계 유민들이 [[고조선]]으로 대거 망명한다.''' 위의 사료에 따르면 당시 이들은 [[진(통일왕조)|진(秦)나라]]에 의해 멸망 당한 옛 [[연(춘추전국시대)|연나라]], [[제(춘추전국시대)|제나라]], [[조(춘추시대)|조나라]] 세력들로 추정된다. 이들은 [[진(통일왕조)|진(秦)나라]]에게 패배 후 강제로 [[진(통일왕조)|진(秦)나라]] 피지배층으로 흡수 되었으니 중국 역사상 첫 통일 제국 '''[[진(통일왕조)|진(秦)나라]]가 유지되는 약 20년 간의 짧은 기간 동안은 [[진(통일왕조)|진(秦)나라]]의 백성들로 살았을 것이다.''' 이렇게 [[고조선]]으로 망명한 '''이후 이들은 [[위만]][* 위만이 [[연(춘추전국시대)|연나라]] 사람인지 [[연(춘추전국시대)|연나라]] 땅에 거주했던 [[고조선]]계 사람이었는지는 해석이 엇갈린다. 자세한 내용은 [[위만조선]] 문서를 참고 바란다.]을 주축으로 [[준왕]][* [[준왕]]은 여기서 죽는 게 아니라 한반도 남부로 남하에 [[마한]]의 왕이 된다.] 세력을 몰아내고 왕위 찬탈에 성공하고 조선인 집단에 동화되어 [[고조선]]의 주요 구성원으로 합류하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위만조선]]은 86년간 존속하다 기원전 108년 [[한나라]]와의 [[왕검성 전투]] 패배 후 멸망하고 [[위만조선]] 유민들은 한반도 남부로 남하하기 시작한다. >初, 右渠未破時, 朝鮮相歷谿卿以諫右渠不用, 東之辰國, 時民隨出居者二千餘戶, 亦與朝鮮貢蕃不相往來. >일찍이 [[우거왕]]이 격파되기 전에, [[고조선|조선]]의 상(相) [[역계경]]이 [[우거왕]]에게 간언을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진국(국가)|진국]](辰國)으로 갔다.''' 그 때 백성들이 따라 나선 것이 2,000여 호가 되었다. (그들도) 또한 [[고조선|조선]]에 공납하는 번국(蕃國)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 >《[[위략]](魏略)》[[https://ctext.org/text.pl?node=603363&if=gb&show=parallel|#]] >有三種, 一曰馬韓,註 二曰辰韓,註 三曰弁韓校勘. 辰韓者, 古之辰國也. >한(韓)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馬韓), 둘째는 [[진한]](辰韓), 셋째는 [[변한]](弁韓)인데, '''[[진한]](辰韓)은 옛 [[진국(국가)|진국]](辰國)이다.''' >---- >《[[삼국지(정사)|삼국지]]》<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http://db.history.go.kr/id/jo_004r_0010_0070_0010|#]] 《[[위략]]》에 따르면 기원전 110~109년 즘 [[위만조선]] 멸망 직전 [[우거왕]]의 신하인 [[역계경]]이 [[전한]]의 전쟁을 피해 2,000호(약 8,000~10,000명)를 데리고 다른 나라로 망명한 사실이 나오는데 이 망명한 나라가 [[진국(국가)|진국]](辰國)이다. 《[[삼국지(정사)|삼국지]]》에서는 [[진한]](辰韓)은 옛 [[진국(국가)|진국]](辰國)이라는 내용도 서술하고 있다. 이 [[진국(국가)|진국]](辰國)은 고고학적 관점에서 기원전 4세기 즘에 [[삼한]](三韓) 이전 한반도 중부, 남부 즘 존재 했던 세력으로 추정된다. [[진국(국가)|진국]](辰國)은 《[[후한서]]》 내용에 따라 이후 [[삼한]](三韓) 전체로 이어진다고 보기도 하고 《[[삼국지(정사)|삼국지]]》의 기록과 [[진국(국가)|진국]](辰國)과 [[진한]](辰韓)의 이름의 연계성을 들어 [[진국(국가)|진국]](辰國)이 그대로 [[진한]](辰韓)으로 이어진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어찌 되었던 [[위만조선]] 세력들이 [[전한]]과의 전쟁 전후로 해서 한반도 남부로 대거 이주한 사실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이렇게 '''한반도 남부로 들어온 [[위만조선]] 세력들은 [[마한]] 구성원 중 하나인 [[침미다례]]로 들어가고 일부는 [[진한]](辰韓) 땅에 들어오게 된다.''' >시조의 성은 박(朴)이고, 이름은 혁거세(赫居世)이다. 전한 효선제(孝宣帝) 오봉(五鳳) 원년(B.C. 57) 갑자년(甲子年) 4월 병진일(丙辰日)에 즉위하여 호칭을 거서간(居西干)이라고 하니, 이때 나이가 13세였다. 나라 이름은 서나벌(徐那伐)이라고 하였다. 이에 앞서 '''[[고조선|조선]](朝鮮)의 유민'''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누어 살면서 6촌(六村)을 이루고 있었는데,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셋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 혹은 간진촌(干珍村)이라고도 한다., 넷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으로, 이들이 바로 '''[[진한]](辰韓)의 6부이다.''' >---- >《[[삼국사기]]》권 제1 신라본기[[http://db.history.go.kr/id/sg_001r_0020_0010|#]] 중국 측 사료 말고 한국 측 사료에서는 《[[삼국사기]]》에서 [[진한]](辰韓)에 대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는데 기원전 57년 [[박혁거세]]가 [[신라]]의 모체인 [[사로국]]을 세우기 전에 '''[[고조선|조선]]계 유민'''들이 먼저 들어와 산과 계곡 사이에 나누어 살며 [[진한]](辰韓)이라는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진(통일왕조)|진(秦)나라]] 피지배층들이 노역을 피해서 도망쳐와 만들어졌다." 식의 내용은 《[[삼국지(정사)|삼국지]]》에 처음 등장하는데 '''《[[삼국사기]]》의 참고문헌에 《[[삼국지(정사)|삼국지]]》가 있는 것을 보아 《[[삼국사기]]》를 저술한 [[김부식]] 역시 이 내용들을 읽었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해당 내용이 전혀 나와있지 않는 것을 보면 '''[[진한]](辰韓)의 어느 한 노인 말이 전설처럼 전승되어 내려온 내용들을 서술한 《[[삼국지(정사)]]》의 내용보다 《[[삼국사기]]》의 참고 문헌 목록에 있는 《[[국사(신라)]]》, 《[[신라고기]]》, 《[[제왕연대력]]》같은 신라인들이 자신들의 선조에 대해서 직접 저술한 다수의 [[신라]] 측 문헌들을 더 신뢰했다고 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해당 문헌들은 소실되어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해당 문헌들 중에서 당대 신라인들 시각에서 서술한 [[진한]](辰韓)의 기원이 나와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고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 당시 [[진한]](辰韓) 땅에는 [[위만조선]] 유민들이 들어오기 전에도 기원전 3세기 즘 [[고조선-연 전쟁]] 당시 남하한 조선인 집단, 기원전 194년 [[위만조선]] 성립기에 내려온 조선인 집단들이 먼저 들어와 있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 멸망기에 내려온 조선인 집단까지 합세하면서 크게 3개의 조선인 집단들이 어느 쪽도 명확한 주도권을 쥐지 못하고 병립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게다가 '''[[진한]](辰韓)의 유물에서 [[위만조선]]의 영향을 받은 유물들은 발견되지만 [[중원]]계 문물 요소들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으니[* 실은, 더 발굴해봐야 그런 근거가 나올 개연성 역시 없는 상태다. 서라벌은 후삼국통일 이후 지방 도시로 떨어지고 중심지도 바뀌면서 오히려 고고학적 자료들은 더욱 보존이 훨씬 잘 되었기 때문.] 설령 [[진한]](辰韓)으로 망명한 [[위만조선]] 집단 내에 [[중원]]계 이민자 집단을 선조로 두고 [[중원]]계 정체성을 유지하던 소수 세력들이 있었다 한들 [[신라]]의 모체가 되는 [[진한]](辰韓) 6부 성립에 존재감을 나타내지 못했으며''' 대부분은 [[위만조선]] 성립기부터 멸망 후 [[진한]](辰韓) 땅으로 남하하는 거의 100년이 조금 넘는 세월 동안 조선인 집단과 부대끼면서 아예 흡수 내지 동화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외에도 [[진한]](辰韓)이 [[마한]](馬韓)에 빌붙어서 세력을 유지하고 자체적으로 왕을 세우지 못했다는 부분 역시 모호한 대목이다.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註 自號韓王. 魏略曰: 其子及校勘 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 準王海中, 不與朝鮮相往來. >[[준왕]]은 가까운 궁인(宮人)들과 도망쳐 바다로 들어가서 한(韓)의 땅에 자리 잡았으므로, 호칭을 한왕(韓王)이라고 하였다. <[[위략]]>에서 말하기를, "그 아들과 친척들 중에 나라(고조선)에 남은 자들이 이를 모방하여 한씨라고 하였다."고 했다. 준왕은 해외([[마한]])에서 왕이 되었으나 [[위만조선|조선]]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 >《[[삼국지(정사)|삼국지]] 위서》동이전 [[https://db.history.go.kr/item/compareViewer.do?levelId=jo_004_0010_0070_0040|#]] >初 朝鮮王準爲衛滿所破 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 攻馬韓 破之 自立爲韓王 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당초 [[고조선|조선]]의 [[준왕]]이 [[위만]]에 패했을 때 남은 무리 수천 명을 이끌고 바다로 달아나 마한을 공격하여 깨트리고 한왕(韓王)이 되었다. 준의 후손이 절멸되자, [[마한]](馬韓) 사람이 다시 자립하여 [[진국(국가)|진왕]]이 되었다. >---- >《[[후한서]]》 동이 열전 [[https://db.history.go.kr/item/compareViewer.do?levelId=jo_003_0010_0070_0050|#]] 위 사료들 살펴보면 기원전 194년 [[위만]]의 [[고조선]] 왕위 찬탈로 인해 [[준왕]]이 [[마한]](馬韓) 땅으로 망명하여 '한왕(韓王)'을 자칭하는 내용이 나온다. 당시 [[준왕]]이 [[위만]]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측근 일부와 몇 천의 병력만 이끌고 남하한 상황에서 큰 저항 없이 [[마한]](馬韓)을 지배한 것을 보아 기원전 194년까지만 해도 [[마한]](馬韓)이라는 세력이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마한]](馬韓)이 [[삼한]](三韓) 중 제일 강력했을 수는 있지만 기원전 194년 [[위만]] 세력에게 쫒겨 내려온 [[준왕]] 세력에게 쉽게 제압 당했다는 것을 보면 기원전 57년 [[사로국]]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약 150년 간 [[진한]](辰韓)을 속국화했을 만큼 강했는지 의문점이 드는 대목이다. [* 다만 국력차는 상대적인 것이니 마한이 준왕 세력보다 약했다고 해서 진한을 복속하지 못하리란 법은 없다. 게다가 준왕 세력이 마한에 합류한 이후에는 마한의 국력 자체는 오히려 강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상고한어|상고 중국어]] 비슷하다는 기록 역시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漢時屬樂浪郡, 四時朝謁. 范書東夷傳, 建武二十年, 韓人廉斯人蘇馬諟等, 詣樂浪貢獻. 光武, 封蘇馬諟, 爲漢廉斯邑君, 使屬樂浪郡, 四時朝謁. 章懷注, 廉斯, 邑名也. 魏略曰: 初, 右渠未破時, 朝鮮相歷谿卿以諫右渠不用, 東之辰國,註 漢書, 元封三年夏, 尼谿相參, 乃使人殺朝鮮王右渠, 來降.時民隨出居者二千餘戶,註 亦與朝鮮貢校勘 蕃不相往來. 貢, 疑作眞.至王莽地皇時, 廉斯鑡爲辰韓右渠帥, 聞樂浪註 土地美, 人民饒樂, 亡欲來降. 出其邑落, 見田中驅雀男子一人, 其語非韓人. 問之, 男子曰:「我等漢人, 名戶來, 我等輩千五百人伐材木, 爲韓所擊得, 皆斷髮爲奴, 積三年矣.」 鑡曰:「我當降漢 樂浪, 汝欲去不?」 戶來曰:「可」 (辰)校勘 鑡因將戶來(來)校勘 出詣含資縣, 兩漢志, 樂浪郡含資, 三國魏, 改爲帶方郡. 晋志, 屬帶方郡. 一統志, 故城, 今朝鮮京畿道城之南境. 官本考證云, 辰鑡辰字·來出來字, 疑皆衍.縣言郡, 郡卽以鑡爲譯, 從芩中乘大船入辰韓, 逆取戶來. 降伴輩尙得千人. >[[왕망]]의 지황(기원후 20년 ~ 23년) 때에, [[염사치]](廉斯鑡)가 [[진한]]의 우거수[* 군장 칭호]가 되었는데 [[낙랑]] 땅이 비옥하여 사람들의 삶이 풍요롭고 안락하다는 말을 듣고 도망쳐서 내항하고자 했다. 살던 읍락을 나오다 밭에서 참새를 쫓는 남자 한명을 만났는데 그가 쓰는 말이 '''한(韓)[* 진한] 사람(의 것)과 같지 않아''' 이유를 물어보자, 남자가 말하기를 "'''우리는 [[한나라|한(漢)]][* 중국 [[한족]]]의 사람'''으로 이름은 호래(戶來)라고 불린다. 우리들 1,500명은 목재(材木)를 벌채하다가 '''한(韓)[* 진한]의 습격을 받아 포로가 되어''' 모두 머리를 깎이우고 노예가 된 지 3년이나 되었다." 고 하였다. 이 때 [[염사치]](廉斯鑡)는“나는 [[한나라]]의 [[낙랑군]](樂浪)에 항복하려고 하는데 너도 가지 않겠는가?" 하니, 호래(戶來)는,“좋다.”하였다. 그리하여 [[염사치]](廉斯鑡)는 호래(戶來)를 데리고 출발하여 함자현(含資縣)으로 갔다. 함자현(含資縣)에서 [[낙랑군]]에 연락을 하자, 군(郡)에서는 '''[[염사치]](廉斯鑡)를 통역으로 삼아''' 금중(芩中)으로부터 큰 배를 타고 '''[[진한]](辰韓)에 들어가서''' 호래(戶來) 등을 맞이하여 데려갔다. >---- >《[[위략]](魏略)》[[http://db.history.go.kr/id/jo_004r_0010_0070_0050|#]] 위의 기록은 [[진한]](辰韓)의 군장 중 한명인 [[염사치]][* 해당 기록에서는 [[염사치]]를 진한인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학계에서는 [[염사치]]를 [[진한]](辰韓)을 구성하는 주요 12국 출신이 아니라 [[진한]](辰韓)에 인접한 소국의 신지(臣智)로 사실상 별개의 세력으로 간주하고 있다.]라는 인물이 [[한나라]]가 설치한 [[한사군]] 중 하나인 [[낙랑군]](樂浪郡)에 항복하러 가는 내용이다. 여기서 [[염사치]]는 통역을 맡았다는 것을 보아 [[고대 한국어|진한어]]와 [[상고한어]]를 모두 구사할 줄 아는 사람으로 보이며 호래(戶來)라는 사람은 [[한사군]] 출신 [[한족]]으로 벌목하다가 [[진한]](辰韓) 사람들한테 잡혀 노예가 된 것으로 보인다. '''해당 기록을 통해 당시 진한어는 [[상고한어|상고 중국어]]와 명확하게 구분됐으며 진한인과 중국 [[한족]]은 정체성 역시 달랐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진한]](辰韓)은 [[사로국]]을 주축으로 그대로 [[신라]]로 발전했고 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신라어]]는 현대 [[한국어]]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만약 진한어가 [[상고한어|상고 중국어]]와 어족이 같았다면 지금 현대 [[한국어]] 역시 [[중국어]]와 비슷했어야 한다. 따라서 진한어가 [[상고한어|상고 중국어]]와 비슷하다는 기록이 있는 건 '''두 언어의 [[어족]] 자체가 같다고 해석하기 보다 [[삼한]](三韓) 언어 중에서 진한어가 중원계 어휘를 적극적으로 차용했기 때문에 해당 기록들이 남아있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할 것이다.''' >'''[[진한]](辰韓) 사람들은 박(瓠)을 박(朴)이라 일컬었는데''', 처음에 큰 알이 마치 표주박과 같았던 까닭에 박(朴)을 성으로 삼았다. '''[[거서간]]은 [[진한]](辰韓)의 말로 왕을 뜻한다(혹은 존귀한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라고도 하였다).''' >---- >《[[삼국사기]]》권 제1 신라본기[[http://db.history.go.kr/id/sg_001r_0020_0010|#]] 물론 [[중원]]계 어휘만 사용했던 것이 아니라 《[[삼국사기]]》를 통해 [[진한]](辰韓)만의 자체적인 어휘 역시 사용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해당 내용들을 총 종합해 봤을 때'''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 멸망 후 내려온 [[고조선]] 유민들이 [[진한]](辰韓) 성립에 일정 기여를 했고 이들 중 소수는 앞서 언급된 것처럼 [[중원]]계 이민자들을 선조로 모시고 있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들은 늦어도 진한(辰韓) 6부가 성립되는 시점에는 [[고조선| 조선인]] 집단으로 완전히 흡수된 것으로 보이며 [[고조선| 조선인]] 집단에 흡수되는 과도기에 [[중원]]계 이민자들이 [[진한]](辰韓) 땅으로 들어갔다는 식의 내용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중국 측에 흘러 들어갔고 '''이게 몇 번 꼬여서 후대의 [[정사(역사)|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전승되면서''' [[진(통일왕조)|진(秦)나라]]에서 노역을 피해 도망친 노역꾼 집단들이 [[진한]](辰韓)을 세웠다는 식의 '''와전된 기록이 남게 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4977|#]][* 심지어 [[일본]]으로 건너간 신라계 [[도래인]]들도 이 중국 망명인 전승을 간직하고 가서, 진나라의 진(秦) 글자를 성으로 써서 [[하타]](秦)씨가 되었다. 신찬성씨록에서는 하타씨가 [[진시황]]의 후손이라 기록돼 있지만, 현대 학계에선 신라 출신으로 여겨지는 편이다. [[하타]] 문서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