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수이볜 (문단 편집) === 정치 입문 === [[1980년]]에 [[메이리다오 사건]] 변론을 하면서 정치계에 뛰어들었다. [[파일:XTsh0hh.jpg]] (변호사 시절의 천수이볜. 정치 입문 초기에 쓰인 포스터 속의 모습) 당시의 대만은 이른바 '3당 훈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여기서 '3당 훈정'은 아주 강력한 총통제와 3개 정당의 연립 내각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형식적인 헌정과 실질적인 훈정을 동시에 추구하는 1946년 체제를 가리키는 낱말이다. 1946년에 [[장제스]]는 중국 국민당만 아니라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의 정치인들을 차례로 초청하여 최고위급 관직에 등용을 약속했고, 곧이어 3당 훈정의 여당으로 변신한 중국 국민당과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의 정치인들은 연립 내각의 여당으로서 중앙 정부의 장차관으로 출세했다(1949년까지는 대륙에 있었다). 1940년대에 중국 대륙에서 유권자들이 직선제로 선출한 국민 대회와 입법원과 감찰원의 국회의원들은 종신직이었다. 장제스 총통은 '중공의 반란을 토벌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動員戡亂時期臨時條款)을 발효했으며, 그 다음에 중화민국 사법원의 대법관들을 움직여서 헌법 재판을 청구하는 방식으로 국민 대회와 입법원과 감찰원의 총선거를 중지했으니, 중앙 정부의 선거 제도는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보궐' 선거였다. 천수이볜 변호사는 1946년 체제의 해체를 요구하는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여 여러 번 투옥되었으나, 석방된 뒤에 1981년 총선에서 무소속으로(당시에는 야당이 불법) 타이베이 시의회 의원이 되었고,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이름을 날리는 인물이 되었다. 1985년 지방선거에서 [[타이난]] 현장 시장에 출마했는데 간발의 차이로 낙선하게 된다. 하지만 정보부에서 천수이볜이 거물급 정치인사로 성장할 것으로 우려하면서 천수이볜을 암살대상으로 삼았고, 운전사를 사주해서 죽이려고 했는데, 이 때문에 자신의 아내인 우수전은 지지자들에게 인사를 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했고 죽지는 않았지만 하반신이 마비되어 장애인이 되고 말았다. 이는 천수이볜의 투쟁심을 더욱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고, 1986년 메이리다오지를 통해서 국민당 정부를 재차 비판했다가 다시 구속되어 감옥에 들어갔다. 하지만 옥중에서도 우수전이 민진당 소속으로 입법위원이 되는 것을 도왔고 정치테러에 대한 동정심으로 우수전은 입법위원(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듬해에 천수이볜은 풀러나게 되었고, 우수전의 보좌관으로 활동하다가 1987년에 우수전과 함께 [[민주진보당]]에 가입했으며, 1989년 입법원 증원선거에서 타이베이 제1선거구에 출마해 입법위원이 되었다. 1992년에 재선에 성공했으며 [[1994년]]에 [[재보궐선거|입법위원직을 사퇴하고]] 최초의 성급 행정 구역 단체장 선거에 출마하여 [[타이베이시장]]에 43.6%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본래 대만에서는 기초 자치 단체장 선거는 계속 하고 있었지만 직할시와 성 등 성급 행정 구역의 수장은 중앙 정부에서 임명했다. 1994년부터 헌법이 개정되어 성급 행정 구역 수장도 선거로 뽑게 되었다. 그러나 푸젠 성은 선거가 이루어지지 않고 여전히 중앙 정부에서 수장을 임명하였고 1998년부터는 타이완 성의 기능이 축소되면서 타이완성장도 다시 임명제로 바뀌었다.] [youtube(14qCeO_MCN0)] [[1994년]] [[타이베이]] 시장 선거 후보 토론회에서의 천수이볜 [[연설]]. [[표준중국어]] 발음은 썩 괜찮은 편이다. [[대만어]] 어투가 한번씩 들어가는게 옥의 티 정도였다. [[파일:VdpZONu.jpg]] (타이베이 시장 시절의 모습) [youtube(nCtBlgL-pMY)] 그의 재임 기간 가장 큰 성과는 무엇보다도 '''부패 척결''' 이었다. 당시의 천수이볜은 타이베이를 깨끗한 도시로 만들겠다면서 부패와의 전쟁을 치렀고, 유흥업소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에 들어갔는데 심지어는 조폭들이 연관되어 있는 불법 도박장 및 퇴폐 업소 등을 말 그대로 싹쓸어버렸다. 당연히 그 뒷골목 세력들이 뇌물 제의도 해오고 나중에는 대놓고 협박까지 했지만 민주화 운동 때 산전수전 다 겪은 천수이볜한테 통할 리가 없었다. 단순히 유흥업과의 전쟁을 벌인 수준을 넘어 [[리덩후이]]와 절친한 기업가가 운영하던 음식점을 불법건축물이라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 철거하고, 국민당이 운영하는 기업에게 세금을 물리고 각 관공서에 걸려있던 장제스의 초상화를 떼내는 등 당대로써는 파격적인 행정을 선보였다. 1995년에는 서울의 자매도시 시장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했고, 이때 [[경남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야당인사였던 [[김대중]]과도 만났다. [[타이베이 첩운]]이 개통되는 김에 교통체계를 개편해서 타이베이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교통난도 어느 정도 해소하면서 좋은 평을 들었고, 차기대권 주자 소리를 들었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지만, [[1998년]] 선거 때는 51대 45로 패하면서 재선을 놓치는데, 사실 1994년 지방 선거에서 당선된게 당시 현직이었던 국민당 후보가 워낙 지지율이 낮았던데다 국민당에서 갈라져 나온 신당 후보까지 가세하면서 표를 갈라먹는 등의 운이 좋았던 거고, 1998년에는 표가 갈리지 않아서 6%P차로 패배했던 것. 타이베이 등의 북부 지역은 국민당의 지지세가 강한 편이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 - 90년대 중반 시기까지는 지역 구도가 아주 뚜렷하게 드러나던 때는 아니었다. 1994년 지방 선거에서 타이베이 시장 선거와 같이 치러진 [[가오슝]] 시장 선거에서 민진당 후보가 아닌 국민당 [[우둔이]] 후보가 근소하게 앞섰을 정도고 1989년 지방 선거 때부터 2005년 지방 선거 때까지는 [[신베이|타이베이 현]]장을 민진당이 차지했을 정도였다.] 다만 일각에서는 천수이볜에게 앙심을 품은 뒷골목 일당이 국민당과 내통했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묘하게도 후임 시장이 [[마잉주]]였다. [youtube(oiRufSioPzI)] 1998년 시장 선거 홍보영상 [[파일:QrA2dY9.jpg]] (1998년 타이베이 시장 선거 기간 중, 당시 국민당 후보였던 마잉주와 함께)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