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촉한멸망전 (문단 편집) ==== 등애의 우회와 제갈첨 격퇴 ==== 원정이 점차 정치적 영역으로 접어들고, 다른 한 편으로는 제갈첨이 험지 주둔을 거부하며 촉군의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사이, 등애의 선봉이 강유관에 도착했다. 그가 이끄는 군대는 처음에는 공격을 거부할 정도로 지친 상태였다. 등애는 교전에 소극적인 전속(田續)을 다그쳐 선봉에 세워 [[마막]]이 지키는 강유관을 공격했다.[* 등애전 주석으로 인용된 한진춘추. 진서 위관전에도 나온다.] 수비대장인 [[마막]]은 항복했다. 싸우지 않고 항복했다는 일설이 돌지만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비롯된 오해로서, 진서 단작전에는 량주 출신의 5천 병사들이 강유관 공격에 공을 세웠음에도 오직 금성태수 양흔 휘하의 병사 30명만이 상을 받았으며 금성 이서 출신들은 단 한 명도 상을 받지 못했다는 기록이, 손초전에는 강유관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제갈첨의 망설임과 등애의 과감한 판단이 선명하게 대조되면서, 1만여의 위군은 허무할 정도로 순탄하게 성도 인근의 평지인 부현에 도달했다. 평지에 진입한 위군을 본 백성들은 산으로 달아났고 촉은 통제할 수 없었다.[* 촉서 후주전, 자치통감] 부현에 주둔하던 제갈첨은 선봉이 격파되자 면죽까지 물러났다.[* 촉서 제갈량전][* 촉서 황권전] 여기서 선봉은 강유관의 마막을 뜻할 수도 있고, 부현에서 작은 전투가 벌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등애전에는 부현에서의 전투는 전하지 않는다.) 강유가 이끄는 검각의 촉군은 부현으로 나아가 제갈첨을 지원하는 대신 계속 검각을 수비했다. 이제 등애와 성도 사이를 가로막을 방패막이라곤 이번이 첫 전투인 제갈첨이 이끄는 군대 뿐이었다.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제갈첨은 낭야왕 임명을 거론하며 회유를 권하는 등애의 사자를 참수했다.[* 촉서 제갈량전] [[황숭]]이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평지에서의 싸움이 다가오고 있었다. 등애는 아들인 혜당정후 [[등충]]에게 우익을, 사마 [[사찬]]에게 좌익을 맡게 하여 면죽에 주둔한 제갈첨에게 싸움을 걸었다. 전투는 상당히 격화되었던 것 같다. 전투 중간 등충과 사찬이 퇴각하자 등애는 이들을 참수한다고 위협하여 싸움을 지속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위군은 촉군을 크게 격파했다.[* 위서 등애전] [[제갈첨]]과 그 아들 [[제갈상]], 황권의 아들인 [[황숭]], [[이구(삼국지)|이구]], 장비의 손자 [[장준]] 등이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등애의 앞에는 무방비한 성도만이 놓여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