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촉한멸망전 (문단 편집) === 원정 이후의 뒷수습과 종회의 반란 === 등애는 유선을 행표기 장군으로 삼고 유선이 원래 지내던 궁궐에 머물게 했으며, 태자 유선(劉璿)은 봉거 도위로, 다른 여러 왕들은 부마 도위로 삼았다. 옛 한나라의 관리들은 예전에 황제의 관리이던 것을 원래 지위 고하에 따라 왕의 관리로 삼아 임용하고 일부는 등애 자신의 관속을 겸하게 했다. 사찬은 익주 자사를 겸하게 했고, [[견홍]] 등은 촉의 각 군 태수를 겸하게 했다. 또 유선은 상서랑 이호(李虎)에게 사민부(士民簿)를 보내니, 촉 지역 28만호, 남녀구 94만 명, 또 장수와 군사 10만 2000명, 관리 4만 명, 창고의 식량 40만 섬, 금은 4000근, 금(錦),기(綺),채(綵), 견(絹), 각 20만 필과 그 외의 물건들이었다. 그리고 태복 [[장현(삼국지)|장현]]을 보내 강유에게 항복하도록 칙서를 보냈다. 이후 등애는 다소 무난하게 군정관으로서 촉 땅을 일시적으로 다스렸으나 자신의 성공에 취했는지 자충수를 계속 둔다. 등애는 자신의 전공을 뽐내기 위해 경관을 지으며 촉을 이용해 오까지 정벌해야 한다는 주장을 조정에 계속 하며 위의 조정에 등애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켰으며 '강유는 영웅이나 자신 때문에 곤경에 처했다'는 말을 주변에 해 대니 많은 촉한 인사들이 비웃었다. 어쩌면 진성 군인이기에 정치력이 부족한 등애라는 인물의 특징일지도. 한편 강유는 위의 정치적인 상황과 종회의 야심을 이용하여 촉한의 부흥을 꾀했다. 종회는 등애를 모함하여 역적으로 몰아 장안으로 송환하고 강유를 위시한 촉한의 장수들과 가깝게 지내며 자신을 따르지 않는 위의 장수들을 모두 죽이고 촉을 접수하려는 반란을 도모했는데, 기밀이 유출되어 결국 264년 1월 18일 최후로 촉한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한 강유마저 촉한의 부흥을 끝내 이루지 못하며 종회와 함께 위군과 싸우다 전사하고 [[장익]] 등 성도의 수많은 장수, 관리들과 촉한의 마지막 태자인 [[유선]]이 살해당하여 '''촉한 부흥의 불씨마저 완전히 꺼지고 말았는데 유비가 입촉한 지 50년 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종회의 난이 진압된 후에도 종회의 난을 진압한 [[위관]]에 의해 [[등애]], [[등충]], [[사찬]] 등은 암살 당했으며, 등애의 다른 아들들 또한 낙양에서 반역자로 사형당했다. 그리고 낙양으로 이동 중에 [[요화]] 마저 생을 마감하며 촉한멸망전은 주요 인물 대부분이 죽는 결말로 끝이 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