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촉한멸망전 (문단 편집) === 사마소의 전쟁 준비 === [[삼국시대(중국)]]의 세 나라 중 가장 강대한 [[조위]]에서는 황제 [[조모(삼국지)|조모]]가 [[사마소]]에게 살해당하였다. 어린 허수아비 황제 [[조환]]을 올려 정계를 장악한 사마소는 허수아비 황제의 구석과 진공(晉公) 하사를 끊임없이 거부하였는데, 아무래도 진공-진왕 즉위를 합리화할만한 거대한 군공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사마소는 강유가 촉의 기존 방어체계를 변경하여 답중에 주둔하자 이를 기회로 판단하고 자신의 심복인 [[종회]]와 함께 비밀리에 정벌을 계획했다. 다른 신하들에게는 [[오나라]]를 정벌할 생각이라고 알려 정보가 세어나가지 않도록 막고 상대를 기만하려 했다. 후에 사마소는 "오직 종회만이 나와 뜻이 비슷했다." 고 평했다. 이전까지 위나라의 대외원정은 대체로 동오를 중시하여 일어났고, 촉나라를 향한 공격, 혹은 방어 작전에 10만 단위의 병력이 투입되는 일은 드물었다. 유일하게 계획을 공유한 종회를 진서 장군, 가절 도독 관중 제군사에 임명하고 [[청주(중국)|청주]], [[서주]], [[연주(중국)|연주]], [[예주]], [[형주]], [[양주(중국)|양주]] 등 모든 주에 큰 전함을 포함하여 다량의 배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이 지역에서 위나라가 배를 타고 공격할 나라는 오나라 뿐이었으므로, 실제로 당대 사람들은 사마소가 곧 오나라를 치리라 여겼다. 당시의 정국으로 볼 때에도 오나라 공격은 허황된 일이 아니었다. [[손휴]]가 승상이었던 [[손침]]을 주살함으로서 일어난 혼란, [[복양흥]]에 의한 포리당 건설 사업과 승상 즉위 등으로 인해 오나라 쪽 분위기가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장 일 년간 오나라 원정을 위장하던 사마소는 263년 여름, 촉 원정을 공표했다. 주된 사유는 다음과 같았다. * 수춘을 평정한 이래로([[제갈탄의 난]]을 가리킨다.) 6년동안 전쟁이 없었고, 병사의 훈련과 병기의 준비가 다 마춰진 상태이다. 그런데 만약 오나라를 친다면 배를 만들어 강을 건너야 하고, 물길을 통해 오가야 한다. 전쟁 준비만으로도 10만 명의 인력과 백수십일의 기간이 들어가 비효율적이다. * 설령 이러한 준비를 거치고 오를 친다고 해도 남방은 지세가 낮고 습해 역병을 피할 수 없다. * 촉을 먼저 치고 3년을 준비하여 파촉의 물길을 통해 수륙으로 양동 작전을 펼치면 오나라를 쉽게 물리칠 수 있다. 중신들은 대체로 동의를 표했으나, 대촉 전선 담당이었던 등애는 이 전역이 어렵다고 여겼다. 사마소가 주부(主簿) [[사찬]](師纂)을 파견하여 거듭 설득한 끝에 결국 등애도 원정에 동의했다. 동원령을 내린 사마소는 가을 8월 낙양에서 대규모 사열식을 가지면서 필승을 기원했는데, 등돈(鄧敦)이라는 장군이 촉 정벌에 반대 의사를 밝히자 그 자리에서 등돈을 처형하고 시신을 사람들 앞에 조리돌림했다. [[삼국시대]]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뤄진 대규모 촉 원정의 시작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