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촉한멸망전 (문단 편집) === 262년경 촉의 정치적 혼란 === 여러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촉군은 258년에 방어 체제를 재편했다.[* 화양국지 유후주지] 263년 위군의 공격을 감지한 강유는 이 방어선을 초안대로 작동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있었다. 지난 수십년동안 이어진 대규모 원정들의 실패 이후, 촉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북벌과 강유에 대해 회의적인 분위기가 짙게 형성되었다. 심지어 군부조차 여론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요화는 262년 강유의 원정에 앞서 한탄했고[* 촉서 요화전] 장익은 노골적으로 강유와 맞섰다.[* 촉서 장익전] 환관인 [[황호]]와, 그 환관과 거리를 둔 한중 막부의 후계자들인 제갈첨, 동궐마저 강유에게서 군권을 빼앗아 [[염우]]에게 주고자 했다. 북방 원정에 대한 회의감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강유는 262년에 또다시 패배했고, 실각을 두려워한 나머지 성도 조정이나 한중으로 귀환하는 대신 답중에 자신 휘하의 군대와 함께 틀어박혀 실각에서 도망쳤다.[* 촉서 강유전, 화양국지 外 다수] 군부를 틀어쥔 강경파 장군이 실각을 피하려 군대를 들고 도망친 형세로서, 촉 정부와 백성들에게 무척이나 의미하는 바가 클 사건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위군의 침공 준비를 알아차린 강유는 수도인 성도에 [[장익]]과 [[요화]]를 보내 각각 양안관구(陽安關口)와 음평교두(陰平橋頭)를 지키게 하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이미 신뢰에 금이 간 상태에서 황제인 [[유선]]이 그의 요구를 신뢰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후주 유선은 무당의 점궤를 근거로 강유의 요구를 거부했다[* 전근대의 '점궤'는 진짜 점술이라기보단 지도층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근거로서 조작되는 결과물에 가까웠다. 고려의 개경귀족은 공민왕의 천도를 막고자 점궤를 조작했고, 고대 로마군은 닭이 모이를 쪼는 점궤의 결과를 항상 승리로 조작했다. 이것과 유선이 결국 지원군 보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유선이 진짜로 점궤를 믿었다기보단 할거한 군벌과 반역자 사이를 오고가는 강유군을 두고 중앙군을 빼고 싶지 않아 점궤 핑계를 댄 것이라 보는것이 옳다.]. 또한 지원 요청마저 한중을 내주고 적을 섬멸한다는 당초 계획에 충실했으므로, 이 시점에서 한중 민간의 막대한 피해는 피할 수 없는 사실이 되가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