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용건 (문단 편집) === 항일운동 === 국권이 강탈당하자 중국에 망명하여 [[쿤밍]]의 윈난(운남)군사학교[* 이 학교 출신으로 유명한 사람이 많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주더]], [[북베트남]]군 총사령관 [[보응우옌잡]](지압 장군)등... 그리고 대한민국 국방장관을 지낸 [[이범석]]도 여기 출신. 독립운동가 [[문일민]]은 최용건과 같은 17기 동문이었다. 그리고 덩샤오핑 시절 국방부장을 지냈던 [[예젠잉]] 원수도 여기 출신이다. ~~그러고보면 6.25 때 남북한 국방장관은 동문에다가 동갑이었다...~~[* 이범석은 1948년 정부 수립때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이었으나 약 반년만인 49년 3월에 국방장관에서 물러나 국무총리에만 전념했다]그리고 이 학교는 중국은 물론 남북한, 북베트남의 국방장관을 배출한 명문사관학교다! ]에서 공부했다. 이후 [[쑨원]]이 세운 [[황포군관학교]]의 [[교관]]으로 일했다. 1926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국민혁명군]]에서 연대장을 하다가, [[4.12 상하이 쿠데타]], [[마일사변]]에 이어 [[국공결렬]]로 [[1차 국공합작]]이 깨어지고 공산당원에 대한 체포, 학살이 벌어지자 피신한다. 1927년 [[광저우 폭동]]에 참가했으나 실패한 이후 1928년 만주로 피신, [[동북항일연군]]에서 싸우다가 [[저우바오중]]의 소개로 부녀연대 연대장인 [[왕옥환]]과 결혼한다.[* 일본 군경에 쫓기던 최용건을 도와준 지주 왕통주의 딸과 결혼한 것으로 잘못 알려졌지만, 왕통주의 딸은 왕옥길이라는 다른 인물이다. ] 일제의 토벌작전이 거세지자 [[김일성]], [[김책]] 등과 함께 소련으로 건너가 1942년 8월 소련군 제88독립보병여단으로 편성되었다. 이 때 최석천(崔石泉)이라는 이름을 썼으며, 부참모장으로 한국인으로는 최고위직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