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용건 (문단 편집) ===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서 === 1957년 9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김두봉]]의 뒤를 이어 신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 선출되어 명목상 국가수반이 된다. 민족보위상은 [[김광협]]이 물려받았다. 1958년 [[조선민주당]]을 탈당하고 조선로동당에 입당했다. 이 시점에서 조선민주당은 이미 있으나마나한 어용정당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의미 있는 일은 아니다. 이후 조선민주당 대표직은 잠시 [[홍기황]]이 맡았다가 곧 김일성의 외가친척이자 담임선생님 출신인 [[강량욱]]에게 넘어갔다. 1958년 9월 7일, 공화국창건 10주년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으며 1960년 6월 18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환갑기념 로력영웅 칭호를 받았다. 1968년 3월, [[홍명희]] 장의위원장, 1969년 8월, [[리주연]] 장의위원을 지냈다. 계속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 재직하다가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사회주의 헌법이 채택되고 주석제가 실시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주석]]에 선출된다. 기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로 개편되었고 상설회의 의장직에는 그 유명한 [[황장엽]]이 임명된다. 1973년 1월, [[정준택]] 장의위원, 1974년 2월 장길부 장의위원에 위촉되었다. 김일성의 위세에 눌린 허수아비에 가깝기는 했지만 그래도 최현과 더불어 김일성에게 반말을 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여담이지만, 공식적 자리에서는 그래도 "일성 동지"나 "김 장군"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북한 정권이 1960년대부터 사회주의권 기준에서도 강한 폐쇄성을 가지게 된 후로 그의 아내가 중국인[* [[한족]]] 왕옥환이라는 점 때문에 음성적으로 경원시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음성적으로 경원시된 측면이 있었다는 것이지 북한 정권에서 공식적으로 최용건을 숙청하거나 사후 평가절하한 적은 없다. 어쨌거나 그는 사망할 때까지 북한 건국에 중요한 역할을 한 동지로서 당과 정부로부터 공식적인 존경과 존중을 받았다. 김일성이 말년에 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도 높게 평가되었다. 일부 탈북자들은 최용건이 충실한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김정일 세습에 대해 반대, 혹은 소극적으로 나오다가 결국 뒷방 늙은이가 되어 현재 북한에선 대접이 좋지 않다고 주장하지만 [[김동규(북한)|정말로 김정일 세습에 개긴걸로 추정되는 인물들의 말로를 보면 글쎄]]... 이후 1976년 3월 [[남일]] 장의위원, 5월에 [[홍원길]] 장의위원을 지낸 것을 마지막으로 9월에 사망했다. 소련 외교문서에 따르면 건강이 악화되어 1970년대에는 나랏일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최용건의 아내 왕옥환은 중국인이라는 점 때문에 1960년대부터 북한 정권 내부에서 음성적으로 경원시된 측면이 없지 않았으나 역시 그의 남편처럼 당과 정부로부터 공식적인 존경과 존중을 받으며 살았다. 최용건 사망 후 1980년 10월 10일~14일에 개최된 조선로동당 제6차 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참석했으며 1983년 6월에는 조선민주여성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최용건이 죽으면서 왕옥환에게 중국으로 돌아갈 것을 유언했다는데 실제로 중국으로 돌아가 2007년에 사망하였고 김정일이 조화를 보내주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