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충렬왕 (문단 편집) === 개혁 시도 === 사실 충렬왕이 완전히 개혁과 무관했던 것은 아니었다. 홍자번의 <편민 18사>가 이때 나왔고, 이후 고려 국왕들이 개혁 조치를 위해서 설치하는 '''[[전민변정도감]]'''을 재설한 것도(최초는 원종) 충렬왕이었다. 근데 이 개혁이란 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실체를 쉽게 알 수 있는데 원래 [[원나라]]는 몽골과 중국식으로 '노비양천제'[*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노비여야만 자식도 노비가 되기 때문에 대가 지나도 노비수가 유지되는 수준에 그치거나 자연스레 줄어드는 효과를 가진다.]를 실시하려고 했는데 [[일천즉천|일천제]][* 아버지와 어머니 중 한 명이라도 노비일 경우 자식이 무조건 노비가 되기 때문에 대가 지날수록 노비수가 자연스레 증가하는 효과가 있다.]를 통해 노비를 불려나가던 권세가들과 충렬왕이 이를 맹렬히 반대하여 무위로 돌렸다. 몽골도 어쩔 수 없어 나중에는 크게 문제삼지는 않아 결국 무위로 돌아갔는데 전민변정도감은 한때 해방된 노비들을 다시 노비로 되돌리는 작업을 수행했다. [[권문세족]]에 대한 견제가 이루어지기는 했으나 이 또한 충렬왕이 귀족들을 믿지 못하여 천출 측근들을 띄우면서 이뤄진 일로 그 측근들도 권문세족화하여 온갖 악행을 일삼았다. <편민 18사>를 내놓은 홍자번도 권문세족이어서 그의 <편민 18사>는 수취 체제 중심의 온건한 개혁이었을 뿐만 아니라 관료들의 부패를 지적한 부분은 대부분 지방관 등 다른 세력에게 돌리고, 권문세족 관련은 사소한 부분만 언급하고 있다. 고려가 시궁창이 되어 멸망한 원인 중 하나가 충렬왕의 측근 정치, 무능, 부패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유교|유학]]과 관련해서는 '경사 6학'을 가르치던 [[국자감]]을 개칭했는데 이것이 [[성균관]]의 전신인 '''성균감'''이다. '''[[문묘]]'''가 이 시기에 만들어졌으며, [[안향]]의 건의로 장학재단인 '섬학전'을 설립하기도 했다. 또한 '경사교수도감'을 설치하여 기존의 시문 창작에서 벗어나 보다 적극적인 유학 진흥을 꾀했다. 이처럼 고려의 유학 발달에 안향이나 공민왕의 역할만을 기억하지만 의외로 충렬왕의 업적도 만만치 않았다. 다만 이 모두가 큰 효과로 이어지지는 못했고, 대중적으로도 희미하기 때문에 충렬왕은 왕으로서의 업적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특히 공민왕 이전의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도 나름대로 개혁을 시도는 하지만 모두 좌절하고, 개혁에 염증을 느끼는 테크를 밟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공민왕 역시 마찬가지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