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광석 (문단 편집) == 생애 == 1918년 7월 5일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부여면]](현 부여군 [[부여읍]]) 가증리에서 아버지 한원교(韓元敎)와 어머니 [[단양 우씨]] 우원자(禹元子) 사이의 아들로 [[http://elecinfo.nec.go.kr/neweps/ezpdfwebviewer/ezpdf/customLayout.jsp?contentId=2F6570646174612F455030362F45434D323030362F30312F45434D303132303036303239312F45434D303132303036303239315F30313839532E706466|태어났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여 [[후쿠오카]]중학교와 해군공창교관학교(海軍工廠敎官學校)를 졸업했다. [[8.15 광복]] 후 충청남도 재산관리처 조사관으로 근무하다가 [[육군보병학교|육군호국사관학교]]에 입학하여 3기로 졸업한 후 보병102연대 제11중대장을 맡았다. 이후 예편, 귀향하여 [[농업]]에 종사하였다. 한편 [[우익]] 정치인으로도 활동하여 1950년 9월 [[대한청년단]] 부여군단장에 선출되었고 1954년 2월 [[자유당]] 부여군 갑구당 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국민회(1945년)|국민회]] 부여군지부 지부장을 맡기도 하였다. 이 밖에 대한화물주식회사(大韓貨物株式會社)·남선물화주식회사의 사장 및 이사를 겸임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충청남도 부여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이석기(1907)|이석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6년 자유당 충청남도당 총무부장에 취임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인 [[민주당(1955년)|민주당]] 이석기 후보에 설욕하고 당선되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충청남도]] [[대한민국 참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961년 [[3.15 부정선거]] 가담을 이유로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에 의해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다. [[5.16 군사정변]] 이후 혁명검찰에 의해 기소되어 복역하다가 1963년 특별사면되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1967년)|신민당]] 후보로 충청남도 부여군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민주공화당]]의 매수에 의해 중도 사퇴하였다[* 당시 [[민주공화당]] 후보는 다름아닌 [[김종필]]이었다. 한편, 당시 한광석 외에 [[자유당]] 김재련, [[대중당]] 김창삼, [[한국독립당(1963년)|한국독립당]] 한창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7919|자민당]] 이석전 등 4명의 후보가 있었는데, 모두 중도 사퇴하지 않고 완주하였다.][[https://news.joins.com/article/1124469|#]].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충청남도 부여군-[[보령시|보령군]]-[[서천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김종익(1918)|김종익]] 후보와 신민당 [[김옥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0년대 초반 대한민국 헌정회 부회장을 역임하다가 1995년 회장이던 [[김원만]]의 사망으로 회장 권한대행을 지냈다. 2017년 2월 2일, 향년 98세로 [[장수/목록#s-1.2|별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