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해군 (문단 편집) === [[고대]]의 해군 === [[파일:attachment/trireme.jpg]] [[해적]]의 역사는 바다와 함께 시작되었으니, 해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자 보통의 배들 역시 자위용으로 무장을 갖추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 해군의 시초가 되었다. 이때까지는 해군과 민간인을 구분할 방도가 없었다. 그냥 평소에는 민간인이고, 싸움 붙으면 해군이 되었다. 물론, 그 해군이 해적으로 변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알렉산드로스 시대 말기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당시 이집트에는, 시대를 앞선 [[거함거포주의|거대함선]] '[[포티]]'가 존재했다. 현대의 구축함만하다. 서양에서 그나마 해군이라고 구분할 수 있는 존재가 등장한 것은 [[그리스]]와 [[페르시아]]간의 전쟁이었다. 고대 [[바다 민족]]의 뒤를 이어 해군을 건설한 양측은 군함이라고 부를 만한 배들을 만들었는데, 이들은 바람에 좌우되는 범선과 달리 자유로운 기동을 위해 돛과 함께 노를 사용하였다. 해상 전투는 거의 근접전이 좌우했는데, 당시로서는 [[활]]을 제외하곤 원거리 병기가 없었던 탓에 충분한 타격을 주기에는 부족했다. 이때 이용된 것이 [[함수(동음이의어)#s-5|함수]](艦首)를 탄탄하게 만듦으로써 함수로 상대 측 전함의 측면을 들이받아 부숴버리는 [[충각]](衝角)이었다. [[로마]]는 이를 역이용해 빈약한 해군력을 보완하고자 아예 '''해전을 육상전처럼 바꾸는''' 가교를 배에 달아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 해군을 무참히 박살내는 기발한 전술을 선보이기도 했다. 해군의 무장은 시간이 지나면서 지상에서 사용되던 [[발리스타|노포]](弩砲)와 [[투석기]]가 도입되면서 원거리 화력도 증가하게 되었다. 하지만 명중률과 연사속도의 문제로 견제용을 벗어나진 못했고 여전히 적함을 직접 격침하려면 충각에 의지해야 했다. 해군의 중요성은 이미 고대부터 부각되기 시작했다. [[페르시아 전쟁]]의 전황을 바꿨다 평가되는 [[살라미스 해전]]이나 [[포에니 전쟁]]에서 벌어졌던 [[카르타고]]와 로마와의 해전 등이 대표적인 사례. 그러나 그리스의 경우 보병은 중갑과 무기를 마련할 재력이 있는 자들의 병과이고 그럴 돈이 없는 가난뱅이들이나 해군에서 노 젓고 다닌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어서 살라미스 해전 당시에만 해도 해군력을 증가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하는 자들도 꽤 많았다. 배가 파괴되면 떼죽음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조선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고대에는 동서를 막론하고 기피하는 병종이었다. [[조선]] 시대에도 시체조차 건질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기피하는 병종이었다. 동양의 해군력은 서양에 비해 발전이 늦었는데, 지중해 때문에 해상에서의 무력 충돌이 끊임없이 일어났던 유럽-중동-아프리카 지역과 달리 동아시아의 대부분은 육로로 전부 연결되어 있어서 해상 전력은 늘 보조적인 수단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신라]] 수군은 [[문무왕]] 때 선부(船府)를 설치해 독립하기 전까지는 오랜 기간 병부(兵部)가 같이 맡았을 정도로 육군의 부속 전력으로 취급되었고, 해상 원정으로 유명한 [[이사부]]도 기록을 종합해 보면 엄연히 본업은 육군 지휘관이었다. 게다가 보통 용골을 설치하지 않는 선박의 제조 방식 문제 때문에 금속제 충각을 설치한 전투함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전술은 활과 투창 등의 개인 투사 무기로 견제하다가 접현하여 상대 함선에 올라타 [[백병전]]을 벌이는 원시적인 단계에 머물렀다. 한국사에서 해군이 본격적으로 활약한 사건은 [[삼국시대]]부터이다. 고구려와 백제는 전쟁 때마다 수군을 동원하였다. 백제의 해양기지였던 관미성을 점령한 광개토대왕이 한성을 공격할 때 수군을 동원했다는 기록, 아신왕이 왜와 함께 대방(帶方: 황해도) 연안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이를 증거한다.[* 근데 비운의 아신왕은 광개토대왕에게 발렸다(...)] 특히 고구려는 광개토-장수왕 시기 강력한 해상통제력으로 백제는 물론 백제 우방국인 야마토에게도 영향력을 끼쳤다. 백제가 동성왕 때에 북위를 누선으로 격파하고[* 이 부분은 많은 설들이 오가는데 자세한 건 [[요서경략설]] 참고] 바다 건너 탐라를 직접 정벌할 계획까지 있었다는 기록을 보아 이 때 어느정도 수군력을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삼국시대 말기 [[백제]]는 당나라의 13만 대군이 [[황해]]를 건너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던 상황에서[* 사실 당시 기술력으로 13만이나 되는 병력을 빠르게 옮기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더군다나 당나라 입장에서는 고구려가 언제 백제에 원군을 보낼지 모르니 속전속결로 백제를 무너뜨려야했으므로 느긋하게 왕복하며 나눠 수송할 시간은 없었을 것이다.] 육상의 신라군, 당나라 해군의 협공으로 고작 몇 주만에 수백 년 왕조가 단숨에 무너졌고 [[백제부흥운동]] 역시 일본과 연합한 4만이 넘는 수군이 [[백강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게 패배하면서 좌절되었다. [[신라]]는 국가 초기에는 신라 수군이 약하다고 스스로 인정했을 정도로 수군력이 미약했다. 실제로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례이사금]] 12년(295년)조에 신라군이 수전에 미숙하다는 언급이 있다. 그리고 수도 [[서라벌]]이 동해 바다와 가까운 지리적 특성상 [[왜]]의 해상 침입을 자주 받기도 했다. 그러던 신라가 해군을 혁신하기 시작한 건 [[지증왕]] 때부터였다. 지증왕은 505년 선박 이용에 관한 법을 제정해 기본적 체계를 세웠고, 512년 [[동해]] 바다를 건너 그 유명한 [[우산국 정벌]]을 실시했다. 지증왕 즉위 후부터 이전까지 자주 있었던 왜군의 소규모 침공 자체가 전무해질 정도로 해상 방위의 기틀이 세워졌다. 660년 백제 침공 당시 기록을 토대로 [[당항성]]에 소속된 신라 [[황해]] 함대가 100척에 6,500여명 규모일 것으로 이상훈 교수는 추산했다. 이들은 병선(兵船), 대선(大舩), 거함(巨艦)으로 표현되고 있어 당시 동아시아 기준으로도 규모가 큰 전투함으로 볼 수 있으며,[* 이 100척을 당 수군에 대한 보급선으로 보는 설도 있지만, 삼국사기에서 비전투함은 조선(漕船, [[수송선]]) 등으로 전투함과 구분해 기록했기 때문에 이상훈 교수는 전투함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보았다.] [[황산벌 전투]]에 참여한 신라 육군과 별개로 당나라 수군과 오늘날의 경기도 앞바다에서 합류해서 서해안을 따라 남하해 [[금강]] 하구에서 백제 수비군을 물리친 후 백제 수도 [[사비성]]을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신라에서도 시기별로 수군의 규모나 편제가 달랐을테고, 신라 국토 구조를 보면 신라 수군의 주력은 [[남해]]와 [[동해]]에 배치돼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이 황해 함대 기록만으로 신라 수군을 완전히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당나라]]와 맞붙은 [[나당전쟁]]에서도 신라 수군은 대활약해, [[기벌포 전투]]에서 신라가 승리하게 되어 당이 한반도에 대한 미련을 접고 철수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신라 초기에는 오늘날의 [[국방부]]에 해당하는 병부(兵部)가 선박에 관한 일을 맡았는데 [[문무왕]] 18년(678) 선박 업무를 전담하는 선부(船府)를 설치해 육군과 독립되었다. 문무왕은 죽어서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유언을 남길 정도로 해상 안보의 중요성을 잘 파악했던 왕이었다. [[후삼국시대]]에도 [[왕건]] 본인부터가 [[태봉]] 수군을 적재적소에 기동해 [[후백제]]의 후방인 [[나주]]에서 크게 활약했고([[나주 공방전]]) 후백제 역시 [[상귀]], [[상애]]가 이끄는 수군으로 고려를 공략했다. [[중국]] [[삼국지]]에도 수군의 활약이 다방면에서 등장하는데 오나라가 수군을 상당히 잘 다뤘다. 특히 손견, 주유, 육손, 감녕이 수군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는데 육손은 수군의 대규모 부대를 다루는 능력이 뛰어났고 감녕은 수군 기동전의 달인이었다. 삼국지에서의 가장 대표적인 수군 전투가 바로 [[적벽대전]]과 [[이릉대전]]이다. 그 [[위나라]]의 막강한 군사력으로 [[원소(삼국지)|원소]], [[유표]], [[마초]] 등을 전부 쳐잡고 다니던 그 [[조조]]조차 오직 [[손권]]에게만은 꽤나 고전했는데 그 원인이 바로 손권이 강성한 수군력을 보유했기 때문이다. 또한 골목대장 시절부터 전투 지휘를 익혀온 [[유비]]조차 수군전에서는 [[육손]]에게는 엄청나게 엿먹고 또 그게 원인이 되어 화병으로 사망했다. [[주유(삼국지)|주유]] 역시 발군의 수군지휘능력으로 [[적벽대전]]에서 그 조조를 엿먹였으며 육손 역시 [[이릉대전]]에서 유비를 엿먹이고 유비를 사망까지 갈 정도로 큰 스트레스를 받게 만들었다. 하다 못해 [[반장(삼국지)|반장]]조차 [[조진]]과 [[하후상]]을 수군으로 엿먹였다.[* 하지만 오나라의 육군은 촉과 위에 딸려서 합비에서는 10만 단위 군세로 몇 차례나 쳐들어가고서도 오히려 망신만 당하며 쫓겨나는 등 득보다 실이 더 많았다. 조조가 오를 상대로 고전한 건 일생 대부분을 치른 육상전이 아니라 낯선 수상전이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조조는 적벽대전과 유수구 공방전을 빼면 수상전을 한 적이 거의 없다.) 이릉대전도 이기기는 했지만 촉군의 지휘관이 실질적으로 유비 한명이라 오가 집중해서 대응하기 쉬웠고, 그나마도 육상전에서 유비에게 밀리다가 막판뒤집기를 성공한 덕분이다.] 비록 조조와 밀약을 맺은 손권의 뒷치기로 형주를 잃고 전사한 [[관우]]도 형주 공방전에서는 숫자에서는 밀렸을지언정 수군을 능숙하게 다루며 형주의 위군을 몰아붙이는 모습을 보여줬다. 지도만 보면 강 한줄기 몰래 훌쩍 건너는게 뭐가 그리 어렵나 싶지만 오나라를 둘러싼 [[장강]]은 상류부터 하류까지 전부 폭이 어마무시하게 넓다. 기술이 훨씬 발달한 [[태평천국의 난]] 시대에도 태평천국군은 수군이 몰살당하자 장강 '''양안을 모두 점령했는데도 불구하고''' 관군이 강을 통해 보급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조조에겐 없던 대포도 있었는데 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