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경래 (문단 편집) == 생애 == 외숙부에게 학문을 배워 [[평양]] 향시를 통과한 이후 1798년 사마시에 도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홍경래의 난은 [[세도 정치]]가 덜했던 [[김조순]] 대에 일어난 것까지 감안하여 세도 정치보다는 [[대한민국/지역감정#s-2.1.3|당시 서북 지방에 대한 지역 차별]]을 등에 업었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영조 이후 문과급제자 통계를 내보니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140124/60373545/1|평안도 출신이 16%]]나 되는 등 [[한양]]을 제외한 지역 순위 1위였지만 집안 출신을 강조했던 조선 후기 사정상 평안도 출신은 고위직은커녕 임관도 되기 어려웠다. 집안이 좋으면 과거 급제를 못해도 벼슬을 하는데 집안이 안 좋으면 문과 급제를 해도 관직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 돌았던 시절이었다. 평안도는 [[청나라]] 무역의 주요 관문으로서 경제적으로 성장한 반면 푸대접은 여전했다. 그는 유교적 교양은 물론 병서, 제반 술서, 특히 [[정감록]] 등에 통달했다고 한다. 홍경래의 신분은 대개 몰락 [[양반]]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상 [[평민]]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경제적으로는 전답이나 노비를 지니지 못한 빈궁한 처지에 있었다. 결국 홍경래는 과거에 실패한 뒤 출세를 포기하고 집을 나와 풍수로서 각지를 전전하며 빈한한 생활을 하였는데 이때 당시 과거 제도의 부패상,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 [[삼정의 문란]] 등으로 인한 일반 백성들의 비참한 현실을 체험하면서 사회의 모순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홍경래는 당시 세도가들의 폭정과 민중 탄압을 비판하고 민중의 희망을 반영하여 초인이 나타나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정진인설'을 봉기의 가장 중요한 [[이념]]으로 제시하였다. [[신라]] 말기에 [[미륵]]이 나타난다며 봉기했던 [[궁예]]와 비슷한 양상을 띤다. 뛰어난 [[무술]] 실력을 지니고 있어 직접 선두에서 전투를 지휘하기도 하였으며 병법에도 밝아 다양한 전술로 관군과 대항하였다고 전한다. [[차별]] 받던 서북민들을 규합해 홍경래의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했고 최후의 전투인 정주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