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국영 (문단 편집) == 생애 == [[1772년]] [[과거 제도|과거]]에 급제한 후[* 영조48년 정시(庭試: 별시의 일종) 문과에 병과 11위], 이듬해 2월부터 가주서(假注書)로 벼슬살이를 시작, 1774년 3월 동궁시강원의 설서(說書)[* 경사(經史)와 도의(道義)를 가르치던 정7품직]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하여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의 측근이 된 것으로 보인다. 계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1772년 정조와 처음 대면해 빠르게 친해진[* ‘오늘은 신이 임진년에 성명(聖明)을 처음 만난 날입니다.’, 《[[정조실록]]》 8권, 정조 3년 9월 26일 정미 1번째 기사.] 홍국영은 "세손(정조)의 오른 날개"라는 표현이 사서에 등장할 정도로 정조의 신임을 받았다. 《[[영조실록]]》에 의하면 1773년 영조 곁에서 한림 역할[* 1773년 4월에 한림소시(翰林召試)[*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정9품직} 후보자에 대한 특별 시험을 말함. 적임자를 선발하여 임금께 아뢰면, 왕명으로 시(詩)•부(賦)•논(論)•책문(策問) 등의 시험을 보아 합격자를 임용하였음.] 합격]을 했다. 정조 즉위 이후 급작스러운 출세라는 세간의 [[이미지]]와 달리 영조 또한 [[매력]]적인 홍국영을 좋아했고, 흔히 말하는 [[세도정치]]는 이미 영조 말부터 시작되었다. 1776년 정조의 즉위 직후 [[정후겸]], [[홍인한]]을 [[숙청]]할 때 사유가 "세손의 [[대리청정]]을 막았다."와 "세손의 오른 날개(홍국영)를 제거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정조는 그를 자신의 즉위를 도운 1등 [[공신]]이라 대내외에 천명하며 힘을 실어주었다. 1776년 3월 13일 동부승지(同副承旨)[* 정3품 당상관직, 승지로서 당연직으로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官)을 겸임, 주로 공방(工房)담당][* 1773년에서야 初職을 시작해서 불과 3년만에 정3품 당상관직에 올랐다는 것인데, 이는 조선 전기 [[세조(조선)|세조]] 시기의 [[구성군]] 이준, [[남이]]와 비견될 수도 있을 정도이다.]가 되었으며 1776년 4월 13일 좌승지[* 주로 호방(戶房)담당]에 앉았다는 기록이 있고 1776년 7월 6일 [[도승지]](都承旨)[* 승정원의 장이자 홍문관의 직제학(直提學)과 상서원(尙瑞院)의 정(正)을 겸함, 주로 이방(吏房)담당]가 되었다.[* 무조건 1단계씩 거쳐서 [[승진]]하는 [[승정원]]의 규칙이 그대로 적용되었다고 가정한다면 최말단인 동부승지에서 넘버2인 좌승지까지 일주일에 1단계씩 승진한 셈.] 그렇게 5년을 도승지로 재임하면서 '''도승지=홍국영'''을 의미하는 시기가 있을 정도였다. 훈련대장도 역임하면서 [[구선복]]을 비롯하여 당시 군에서 엄청난 위세를 떨치고 있던 구씨 [[가문]]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고 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1777년(정조1년) 7월, 전술한 홍상간, 홍계능의 궁궐자객침투 사건을 이유로 숙위소(宿衛所)를 창설하고 홍국영을 그 대장에 임명하였는데, 정조는 숙위대장에게 특별히 대장패와 전령패를 차게 하며, 안으로 위장, 부장, 금군과 도감의 군병, 각문의 수문장ㆍ국별장과 밖으로 궁궐 담장 바깥에 삼군영의 입직하는 순라까지 매일 숙위대장에게 보고하도록 조치했다.] 그야말로 [[임금]]의 최측근으로서 이외의 여러 중요 [[관직]]들[* 이 밖에 문관으로는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예문관 직제학, 홍문관 제학, 규장각 직제학(규장각 설치 이후 첫 임명), 이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군문의 장임으로는 정조 즉위년 11월 수어사에 임명되었던 것을 시작으로 잠시 총융사를 거쳐 1777년 5월에는 금위대장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대개 금위대장과 훈련대장을 돌아가며 맡았다.]을 도맡았으며 [[규장각]] 설립 이후 첫 직제학으로서 초창기 일을 도맡았다고 하니 정조의 신임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를 두고 [[노론]] 벽파의 수장 [[김종수(조선)|김종수]]는 "국영과 갈라서는 자는 [[역적]]이다."라고까지 말했을 정도.[* 김종수는 정조를 보좌하며 홍국영과는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했다가 정조가 홍국영을 숙청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1778년 당시 정조에게 후사가 없자 이를 걱정한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경주 김씨)가 [[후궁]] 간택을 명했는데 홍국영은 자신의 [[여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였다. 그녀는 '원빈'(元嬪)이라는 [[칭호]]를 받았는데 중전인 [[효의왕후]] 김씨가 새파랗게 살아있음에도 '으뜸 원(元)' 자를 썼다. [[원빈 홍씨]]의 가례는 [[중국]] 귀비의 예를 참조하여 치러졌고 생전에 조정의 문안을 받는 등 후궁으로서는 이례적인 대접을 받았다. 원빈 홍씨는 가례를 치른 후 1년만인 1779년 숨을 거두었는데 사후 '효휘궁'(孝徽宮)이라는 궁호와 '인명원'(仁明園)이라는 원호를 받는 등 죽어서도 그 이례적인 대접은 변치 않았다.[* 홍국영의 몰락 후에야 1786년 '인명원'과 '효휘궁'의 이름은 강등되었다.] '''홍국영은 이후에도 [[은언군]] 이인의 아들 [[상계군]] 이담을 원빈 홍씨의 [[양자(가족)|양자]]로 삼게 하고 봉호도 완풍군(完豐君)으로 고쳤다. 완풍군의 이름은 [[왕실]]의 본관인 '완'산([[전주시|전주]])과 [[풍산 홍씨]]의 '풍'산에서 각각 한 [[글자]]씩 따온 것이었다. 즉, '조선 조정과 홍국영의 집안이 하나로 통합된다'는 뜻이다. 이 일은 홍국영이 정조에게 [[토사구팽]] 당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꼽힌다.''' 여동생을 후궁으로 들여서 무리할 정도로 예우를 갖추게 하고 여동생이 [[사망]]한 뒤에 더 이상의 후궁을 들이는 것에 반대한 것은 왕실의 혈통이 번성하는 것을 방해한 것이고 전례없이 양조카를 들여서 정조의 [[후계자]]로 삼으려 한 것은 정조를 성불구자 취급한 것이며 결정적으로 감히 방계군의 봉호에 본향을 명기한 것은 임금의 권위를 무시한 것으로[* 봉호에 본향 표기가 가능한 것은 상보 급인 국구나 최고급 공신 뿐이다.], 이는 홍국영이 자신의 권세를 대놓고 연장하기 위해 정조를 [[모독]]한 행위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런 행위는 도가 지나쳤기에 정조가 괘씸하게 여겼을 뿐더러 정조의 아내인 [[효의왕후]] 김씨,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 원리원칙을 철저히 하는 정순왕후 김씨 등 왕실 사람들마저 홍국영을 싫어하고 불쾌하게 여기도록 만들었다. 1779년 정조에게 불려가 질책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건이 일어난 이후 조보(朝報)를 받아본다거나 '조정 일에 관여한다면 천벌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내용의 사직 [[상소]]를 올리고 이에 윤허받아 봉조하(奉朝賀)[* 조선에서 종2품{從二品,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상의 관품} 이상의 고위 [[관리]]가 퇴직시에 받는 [[명예]]직으로 실제 정사는 보지 않고 예식 등에만 참여하였다. 현직보다는 적지만 녹봉도 지급된다.]에 제수되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32세 밖에 안 된 젊은이가 봉조하에 제수된 기록적인 사건에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그러나 홍국영은 봉조하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소의 임금의 총애와 그의 권세, [[좌의정]]인 그의 백부 홍낙순 등의 존재[* 홍국영이 사직하면서 숙위소도 혁파되었으나, 홍낙순은 이때 좌의정에 임명됨]로 인해 조정이 한동안 그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그 후 홍국영의 추천으로 조정에 오른 [[송시열]]의 [[후손]]이자 산림의 영수로 칭송받고 있었던 송덕상[* 송시열의 현손자이지만 학문적인 성취나 수준은 할아버지에 미치지 못하는 인물이어서, 정조가 재위 초에나 좀 쓰다가 그리 미더워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제자]]들 관리도 잘 못했는지 송덕상이 홍국영의 일로 옥에 갇히자 그의 제자였던 문인방, 이경래 등이 《[[정감록]]》 같은 도참서를 이념으로 삼고, 스승을 추대하려는 [[역모]]를 일으킬려다가 주살당했고 송덕상도 이 사건으로 다시 옥에 갇혀 울분을 토하다가 분사했다.]을 비롯한 홍국영의 사람들이 "32세에 사직이 웬 말이냐?!"면서 홍국영을 복귀시키라는 상소를 올렸고 홍국영은 내심 흡족해했다. 그런데 [[소론]]으로 정조의 즉위에 절대적인 공을 세운 중신 [[서명선]]이 평소에 홍국영의 전횡을 싫어하였기에 홍국영을 두둔하는 행보를 밟지 않았고, 이에 홍낙순 이하 홍국영의 수하들과 집안 사람들이 그를 맹렬히 [[탄핵]]했다. 하지만 정조는 오히려 홍낙순을 내쫓고 홍국영도 [[유배]]보내 버렸다. 가뜩이나 왕족과 신하들의 원한을 많이 받았던 홍국영이 임금의 눈 밖에 났다는 것이 확실시되자 그에 대한 온갖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정조가 도성 바로 턱 밑인 제기[* 현재의 [[동대문구]] [[제기동]]]에 그냥 놓아두며 꾸준히 문안을 요구하는 전언을 내리는 등 몇 번의 왕래를 하였으나 정조가 초본을 작성했다는 김종수의 유배 상소를 시작으로 반대파들의 계속되는 상소를 받으며 도성에 출입할 수 없는 조치와 함께 [[강원도]] 강릉으로 옮겨지고 말았다. 비참하게 몰락한 홍국영은 실의에 빠져 살다가 결국 유배지 [[강릉시|강릉]]에서 34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요절한다. 다만 널리 알려진 가난한 이미지의 최후와는 다르게, 죽은 뒤 홍국영의 처분을 논하며 항의하는 신하들의 언사를 보면 죽을 때까지도 정조가 하사한 토지 600결을 가지고 있었고, 몰수해야 할 노비의 수가 100명이었다는 언급이 있다. 지내던 집도 꽤나 좋았던 모양. 홍국영이 죽기 전부터 이것들을 몰수해야 한다는 관료들의 상소에 꾸준히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며 응하지 않은 정조를 고려하면 사적인 정이 어느 정도 작용한 결과로 보여진다. 홍국영이 쫓겨나고 나서 당시 그가 관여했던 기록들은 대부분 삭제되었다고 한다. 홍국영의 사후에 그의 사람이었던 훈련대장 구선복 등의 역모가 적발되었고, 상계군 이담에게도 [[반역]]죄가 적용되면서 풍산 홍씨는 그야말로 몰락의 길에 다다르고 말았다. 홍국영과 함께 송덕상도 몰락했는데 문제는 이 때문에 정조 초반기, 희한한 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송덕상이 삭탈 관직을 당하자 유생들이 통발로 반대 상소를 날리거나, 송덕상을 옹호하는 글을 지어 송시열의 사당에 고했다가 잡혀서 유배간 신형하, 신형하를 옹호해 유배된 박서집 등 대다수가 유배를 갔다. 심지어 송덕상의 제자를 자처하며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가 다른 일로 유배갔는데 우연히 같은 유배지였던 박서집에게 계획을 털어놨다가 박서집이 겁먹고 고발해서 잡혔던 문인방 등 그야말로 혼란의 연속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