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화랑 (문단 편집) == 조직 == 화랑도 조직은 여러 곳에 퍼져 있었고 각각 우두머리격인 1명의 화랑이 있었는데 이 화랑은 주로 [[귀족]]의 자제로 이뤄졌으며[* 단 고아 [[미시랑]]이 [[국선]]까지 오른 것 등, [[신라]]의 [[관직]] 진급상한선과는 달리 반드시 [[골품]]이 있어야만 화랑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화랑들을 통솔하는 총지도자격인 위치로 [[국선]](國仙)이 있었으며 국선에는 [[태종 무열왕|태종 무열왕 김춘추]], [[김유신]]도 국선이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 국선이 되려면 무조건 [[진골]] 아니면 [[성골]]이어야만 하며 [[6두품]] 이하는 국선이 될 수 없었다[* 국선 중 신분을 초월한 사례로 미시랑이 있는데, 미시랑 일화는 설화적 성격이 강하다.] 그리고 이 위에 화랑들을 관리하는 '화주'(花主)가 있다.[* 필사본 [[화랑세기]]에서는 화랑의 지도자를 '[[풍월주]]'라고 쓰고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설원]]이 최초의 국선이라고 쓰고 있는데, 화랑세기에서는 초대 풍월주는 [[위화랑]]이고 설원은 7대 풍월주라고 나온다.][* 근래 '화랑세기'의 기록을 근거로 '화주'를 관리가 아닌 '풍월주'의 아내가 맡는 직책으로 해석하는 경향도 생겼으나, 화랑세기가 논란이 많은 문서이고 이 외에도 다른 반박도 많아 아직은 소수의견에 머물러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화랑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할 뿐 자세한 기록을 찾기 어려워서, 현대 창작물들은 대부분 자세한 설정은 필사본 [[화랑세기]]를 일종의 '설정집'처럼 참고하는 경향이 강하다. 필사본 [[화랑세기]]의 영향으로 화랑의 수장의 명칭을 [[풍월주]]라고 알고 있는 경우도 많으나 [[삼국사기]]에는 화랑의 직제나 우두머리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풍월주라는 단어는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 [[삼국유사]]에서는 국선(國仙)이라 나오는데 여기에도 풍월주는 등장하지 않는다. 풍월주라는 명칭은 필사본 화랑세기를 제외하면 [[조선|15세기 이후]]에 등장한다. 다만 국선이 딱히 화랑의 우두머리 같은 것이 아니라 화랑과의 동의어, 이칭이라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각 화랑도 조직들은 화랑 아래에 [[평민]]부터 하급 [[귀족]]으로 구성된 '[[낭도]](郎徒)'를 적게는 수십 이상, 가장 많게는 수천 명 단위까지 거느리고 지휘했으며, 화랑과 낭도로 이루어진 단체를 향도(香徒)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향도로 [[김유신]]을 중심으로 모였던 용화향도가 있다.[* 향도 자체는 [[불교]]를 기반으로 한 신도 집단을 뜻한다.([[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326796&cid=46620&categoryId=46620|관련 내용:한국민족문화대백과]]) 말하자면 향도>화랑인 셈.] 이들은 [[미시랑]] 설화에서 보이듯 불교의 [[미륵]] 사상과 일체화된 존재로 종교적 신성성까지 갖추어 신라 사람들에게 경외시되었다. 화랑도 조직의 교육은 주로 [[승려]]가 담당했다. 승려는 기본적으로 [[한문]] [[불경]]을 읽고 내용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데다, 불교가 이제 막 서역과 중국에서 도입되던 고대에는 중국이나 일부는 서역, [[인도]]까지 [[유학]]을 가장 활발히 다녀오는 계층이었고 그들은 유교와 도교까지 같이 접하고 도입하며 [[삼교]]에 능통한 고대의 지식인 계층이었으므로 학생들을 가르치기에 가장 적합한 이들이었다. 다만 승려는 큰 범주에서 보면 화랑도 조직의 일원이긴 했지만 정식 구성원은 아니고 미성년인 화랑과 낭도를 대상으로 교육하는 [[교사]] 역할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