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현필 (문단 편집) ==== 헌법 내 4.19혁명 기재로 인한 반헌법적이란 주장 ==== 건국전쟁 키워드는 거짓말과 감추기라면서 [[박정희]] 대통령 재임 시, '''1962년 11월 5일 헌법 개헌을 통해 4.19 정신을 언급'''하였으니 이승만을 기리는 행위는 반헌법적이며, 보수우파들이 존경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정신과 모순된다면서 결국 이승만 추앙은 반 대한민국적이라 주장하였다.[[https://youtu.be/-Xn4ti7D55Y?si=P448rrZAU87Z4yrO|#]] 하지만 이것은 당시 5.16 군사정변을 통해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처한 정치적 상황상 구 권력자들을 견제하고 신군부를 중심으로 한 정치적인 재편을 해야 했던 당시 상황을 무시한 내용이다. 황현필이 언급한 "우리 민족의 나갈 길(박정희, 남종옥)" 은 [[5.16 군사정변]] 이듬해인 1962년에 나온 책이고, 실제로 이 책에서 박정희가 이승만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박정희는 [[4.19 혁명]] 발발의 근본적인 문제를 이승만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이 증거가 바로 '''1965년 7월 27일'''에 이승만의 유해를 모실 때 친히 지었던 조사에서 이를 알 수 있다. 박정희는 이 추도사를 짓고 이승만의 장례식에서 국무총리 [[정일권]]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낭독하게 했다.[[http://www.andongdaily.com/news/articleView.html?idxno=18874|#]] {{{#!folding 박정희 대통령의 이승만 대통령 조사(弔詞) 전문 펼치기(클릭) >---- >박정희 대통령의 이승만 대통령 조사(弔詞) > >「'''조국독립운동의 원훈이요, 초대 건국대통령이신 고 우남 이승만박사 영전에 정성껏 분향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삼가 조의를 드립니다.''' 돌아보건대 한마디로 끈어 '파란만장의 기구한 일생'이였습니다. > >과연 역사를 헤치고 나타나, 자기 몸소 역사를 짓고 또 역사위에 숱한 교훈을 남기고 가신, 조국 근대화의 상징적 존재로서 박사께서는 이제 모든 영욕의 진세인연을 끈어버리고 영원한 고향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생전의 일동일정이 범인용부와 같지 아니하여, 실로 조국의 명암과 민족의 안위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던 세기적 인물이었으므로, 박사의 최후조차 우리들에게 주는 충격이 이같이 심대한 것임을 외면할 길이 없습니다. > >일찍이 대한제국의 국운이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용감히 뛰쳐나서 조국의 개화와 반제국주의 투쟁을 감행하던 날, 몸을 철쇄로 묶고 발길을 형극으로 가로막던 것은, 오히려 선구자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의 특전이었던 것입니다. > >그리고 일제의 침략에 쫒겨 해외의 망명생활 30여 성상에, 문자 그대로 혹은 바람을 씹고 이슬위에 잠자면서 동분서주로 쉴날이 없었고, 또 혹은 섶위에 누워 쓸개를 씹으면서 조국광복을 맹세하고 원하던 것도, 그 또한 혁명아만이 맛볼수있는 명예로운 향연이었던 것입니다. > >그러나 마침내 70노구로 광복된 조국에 돌아와 그나마 '''분단된 국토위에서 안으론 사상의 혼란과 밖으로는 국제의 알력속에서도 만난을 헤치고 새나라를 세워, 민족과 국가의 방향을 제시'''하여 민주한국독립사에 제1장을 장식한 것이야말로, 오직 건국인만이 기록할 수 있는 불후의 금문자였던 것입니다. > >이같이 박사께서는 '''선구자로, 혁명아로, 건국인으로 다만 조국의 개화, 조국의 독립, 또 조국의 발전만을 위하여 온갖 노역을 즐거움으로 여겼고, 또 헌신의 성과를 스스로 거두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평생 견지하신 민족정기에 입각하여 '''항일반공의 뚜렷한 정치노선을 신조로 부동자세를 취해'''왔거니와, 그것은 어디까지나 박사의 국가적 경륜이였고, 또 그중에서도 '''평화선의 설정, 반공포로의 석방등은 세계를 놀라게 한 정치적 과단력의 역사적 발휘'''였던 것입니다. > >그러나, '''집권 12년의 종말'''에 이르러 이미 세상이 다 아는 이른바 '''정치적 과오'''로 인하여 살아서 역사의 심판을 받았던 쓰라린 기록이야말로 '''박사의 현명을 어지럽게한 간신배들의 가증한 소치였을망정 구경에는 박사의 일생에 씻지못할 오점이 되였던 것'''을 통탄해 마지 못하는 바입니다. > >하지만 이자리에서 다시한번 헤아려보면, 그것이 '''결코 박사의 민족을 위한 생애중에 어느 일부분일 망정 전체가 아닌것이요, 또 외부적인 실정 책임으로서 박사의 내면적인 애국정신을 말살하지는 못할것'''이라 생각하며, 또 일찍히 말씀하신 뭉치면 살고 헤치면 죽는다는 귀국일성은 오늘도 이 나라 국민들에게 들려주시는 최후의 유언과 같이 받아들여, 민족사활의 잠언을 삼으려는 것입니다. > >어쨌던 박사께서는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세기적 비극의 주인공이였던 것을 헤아리면, 충심으로 뜨거운 눈물을 같이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만, 그보다는 '''조국의 헌정사에 최후의 십자가를 지고가시는 어린양의 존재가 되심으로써,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위인이란 거룩한 명예를 되살리고, 민족적으로는 다시 이땅에 4.19나 5.16 같은 역사적 고민이 나타나지 않도록 보살피시어, 자주독립정신과 반공투쟁을 위한 선구자로서 길이 길잡이가 되여주시길 바라는 것'''입니다. > >다만 여러가지 사정으로 말미암아 박사로 하여금 그토록 오매불망하시던 고국땅에서 임종하실 수 있는 최선의 기회를 드리지 못하고 이역의 쓸쓸한 해변에서 고독하게 최후를 마치게 한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또 박사에 대한 영원한 경의로, 그 유택을 국립묘지에서 가장 길지를 택하여 유해를 안장해 드리고자 합니다. 생전에 손수 창군하시고 또 그들로서 공산침략을 격파하여 세계에 이름을 날렸던 바로 그 '''국군장병들의 영령들과 함께, 길이 이 나라의 수호신되셔서, 민족의 다난한 앞길을 열어주시는 힘이 되실 것'''을 믿고, 삼가 두 손을 모아 명복을 비는 동시에 유가족 위에 신의 가호가 같이 하시길 바라는 바입니다.」}}} 박정희가 1962년 11월 5일 헌법을 고쳐 4.19 정신을 넣었다고는 하지만, 엄연히 이승만 실각의 결정적인 사건이 된 [[3.15 부정선거]]가 간신배로 대표되는 [[이기붕]]의 폭주에 의한 일이었고, 그 결과 [[4.19 혁명]]이 발발했음을 분명히 추도사에 언급하고 있다. '''즉 헌법에 명시된 4.19 정신에서 말하는 불의는 이승만 정권 그 자체가 아닌, 3.15 부정선거 등의 자유민주주의를 해치는 악의이며, 4.19 정신은 그러한 불의에 항거하는 정신이라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정치사회적인 상황을 무시한 채 단순히 "헌법에 적혔으니 반헌법적" 이란 말은 개헌 당시의 주체와 정치사회적 상황을 무시한 말이며, 그저 갈라치기하려는 얕은 발언이라 볼 수 있다. 비록 박정희가 이승만 생전에 자신이 이승만의 입국을 막고 헌법에 4.19를 넣어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과 권력을 확보했을지언정, 개헌 3년 이후에 추도문에 나온 내용은 항일반공의 뚜렷한 정치노선을 신조로 건국 및 발전을 위해 살았고, 12년의 정권 막바지에 측근들을 통제하지 못한 정치적 과오로 인하여 살아서 역사의 심판을 받은 일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지만, 결코 이승만의 일생 전체가 과오는 아니었고, 내면적인 애국정신은 진심이었다면서 이승만의 공을 인정하고 있다. '''특히 4.19로 실각한 이승만을 국립 현충원에 모시면서 조국의 수호신이 되어 나라를 보살펴 4.19의 고민이 역사에 다시 나타나지 않기를 빌고 있으니, 박정희는 결코 헌법적인 이유로도 이승만의 존재와 공을 부정하지 않았다.'''[* 실제로 정치사에서 같은 진영에서도 견해 차이로 정적이 되거나 견제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며, 당대에는 힘을 견제할 필요가 있어 반대세력을 누르거나 전대의 업적을 가리는 일이 있지만, 후대의 평가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미국에서도 독립 선언서를 작성할 때 참여했던 사람들 중 연방주의자 [[존 애덤스]]와 공화주의자(반연방주의자) [[토마스 제퍼슨]]의 사례가 대표적인 예시인데, 이 두 명은 각각 미국의 제2대 대통령과 제3대 대통령이었고, 각각의 재임 시기 때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이 둘의 살아 생전에 서로가 정적이었고,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정치 싸움을 벌였음에도 미국인들은 이 둘을 모두 [[건국의 아버지들]]로 인정하며, 이로 인해 탄생한 미국의 연방정부와 주정부는 현재도 상호 대립 및 상호공존하는 미국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사상의 결과물로 자리잡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