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훈족 (문단 편집) ==== 451~, 서로마 침공 ==== 동로마로부터 뜯어낼 수 있는 것은 모두 뜯어낸 아틸라는 공격의 방향을 서로마로 돌린다. 아틸라는 서로마에서도 경제적 이득을 얻기위해 서로마를 침공하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첫째.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누이 [[유스타 그라타 호노리아]]가 보낸 청혼[* 이 여자가 딱히 정치적인 수를 쓴 게 아니라, 스캔들 때문에 유폐되자 그냥 막 질러본 미친 짓에 가깝다는 게 중론이다.]과 둘째, 게르만족을 상대로 훈족의 지배력이 유지되려면 군사적 위용을 보이면서 동시에 게르만족 귀족층에 정복의 성과를 분배하는 채찍과 당근 전략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복속된 게르만족들은 훈족의 힘에 의해 굴복하고 있을 뿐이지, 이들이 훈족에게 동화되거나 정교한 행정력하에서 통제되는 것이 아니었다. 즉, 훈족과 게르만족들은 어느 정도의 독자성을 유지한 채로 불안한 공존을 하는 상태였다. 당시 도나우 유역의 무덤을 발굴해보면 훈족 귀족층과 훈족에 예속된 게르만족 최상층의 귀족에서 대량의 부장품이 나오곤 하는데, 이것은 대부분 당시 로마에게 삥 뜯거나 약탈해온 금으로, 훈족이 전쟁으로 얻은 부를 상당히 불균등하게나마 재분배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한편 당시의 아틸라는 몇 년간 동로마를 털어먹으면서 발칸을 초토화시킨 결과 더 이상 약탈을 하기에도 마땅찮았고, 더 궁지에 몰린 동로마가 사생결단으로 나올 시 승리를 장담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동로마가 비록 아틸라와 벌인 두 차례(440, 447) 전쟁에서 참패하긴 했으나, 동로마의 주력군은 언제나 페르시아 전선에 배치되어 있는 상태였음을 동로마 측도, 아틸라도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지난 몇 세대 동안 털어먹을 수 있는 게르만족은 거의 다 털어먹고 예속시켰으며, 아틸라 역시 즉위 초기에는 여러 게르만 부족을 공격한 바 있었다. 즉 아틸라는 본인의 권력 유지와 훈족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나서야 했던 상황에서, 서로마를 제외하면 더 이상 공격할 대상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로마제국 최후의 100년」을 인용하자면, 아틸라의 훈족은 '패배할 때까지 멈출 수 없는 전쟁기계'였다. 451년 아틸라의 훈족과 그의 지배를 받는 게르만족들의 군대가 갈리아를 침공했으나 [[카탈라우눔 전투]](451)에서 서로마군과 서고트족 등 게르만족 연합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고 저지 당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452년에 피해를 바로 복구하는데 성공했고 곧바로 군세를 모아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를 침공해 아퀼레이아, 파도바, 베로나, 파비아, 밀라노 등 북이탈리아를 유린했다. 그러나 보급난과 전염병이 이들을 덮쳤고 이를 견딜 수 없던 아틸라는 교황의 중재[* 일설 중에는 교황이 아틸라를 예수의 이름으로 베드로와 바울의 응원을 받아 꾸짖었고 아틸라가 이에 반성을 하며 물러갔다. 라는 이야기와 함께 그걸 묘사한 미술작품도 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동로마와 같이 막대한 재물을 헌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를 받아들여 철수한다. 이듬해 아틸라는 새 부인을 맞아들인 결혼식의 첫날 밤에 의문사하는데, 사망 원인은 암살, 복상사, 과음 등 참으로 다양한 설들이 제시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