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최선필 (r0 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고려사)] ---- [include(틀:후삼국시대 호족들)] ---- 崔善弼 / 崔宣必 생몰연대 미상 [목차] == 개요 == [[후삼국시대]]의 [[호족(한국사)|호족]]. 오늘날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청송에서 가장 유명한 [[경북북부교도소]]가 있는 곳이다.]에 있던 재암성의 호족이었다. 청송 진보 지역에는 또 다른 호족 [[홍술]]도 자리잡고 있었지만, 최선필은 진보면 안에서 홍술과 다른 곳에 거점을 둔 호족으로 여겨진다. 고려사 지리지에서는 최선필의 거성 재암성이 보성부(甫城府)라고 하는데, 보성부는 통일신라 시절 상주 문소군의 진보현(眞寶縣)과 명주 야성군의 진안현(眞安縣)을 합쳐 만든 행정구역이다. 이 중 홍술이 진보현에 있었고 세력이 옆동네 의성에 걸칠 정도로 꽤 컸기 때문에 최선필은 진안현 부분의 호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이름은 정사인 [[삼국사기]], [[고려사]]에서는 성씨가 표기되지 않은 '선필'로만 등장하지만, 당대에 아주 가까운 939년 제작된 [[영주시]] 비로암에 있는 [[http://db.history.go.kr/id/gsko_001_0420|비로사진공대사탑비]]에서 성씨가 최씨로 기록되어있다. == 생애 == 고려 항복 이전의 기록은 정사에는 남아있지 않다. 다만 당대 [[금석문]] 기록상 그는 [[최씨]]인데, 대표적인 6두품 성씨 최씨라는 점을 들어 학계에서는 그가 과거 [[통일신라]]가 지방으로 파견했던 지방관이 난세를 맞아 토착화한 호족 유형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고려와 신라 사이를 중개해 준 기록을 봐선 신라 조정에도 우호적인 세력으로 보이며, 그가 나이가 많아 왕건이 상보(尙父)라고 불렀던 점을 봐선 후백제왕 [[견훤]]과 비슷한 연배에 왕건보단 한 세대 위였던 듯 하다. 한편 친불교 호족으로 당시 이름높은 선승 진공대사가 안전하게 머물 만한 거처를 제공했다. 왕건이 [[궁예]]를 무너트린 뒤, 옆동네 호족 [[홍술]]이 922년 고려에 항복했지만, 최선필은 한동안 독자 세력을 계속 지켰다. 고려사 열전에 의하면 돌아다니는 도적떼 정도만 방어하면서 성을 굳게 지켰다. 왕건이 [[서라벌]]의 [[신라]] 조정과 우호관계를 맺으려 하자 최선필이 먼저 가서 경순왕에게 안부를 묻게 하고 두 왕의 정상회담을 중개해 주었다. 오랫동안 친고려 친신라 성향으로 독자 세력을 지켰지만 930년 결국 고려에 귀순 의사를 밝혔다. 이는 이웃 호족인 홍술이 929년 견훤의 공격으로 멸망한 것이 원인일 수 있다. 왕건은 매우 환영하며 그를 아버지와 같다는 의미로 상보(尙父)로 부르고, 대광(大匡, 고려사) 국부 대장군(國父大將軍, 비로사진공대사탑비)이라는 파격적인 호칭을 주고 선필의 딸 해량원부인(海良院夫人)을 [[후궁]]으로 들여 [[정략결혼]]을 맺었다. [각주] [[분류:후삼국시대/인물]][[분류:몰년 미상]]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