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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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善弼 / 崔宣必
생몰연대 미상
1. 개요[편집]
후삼국시대의 호족. 오늘날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1] 에 있던 재암성의 호족이었다.
청송 진보 지역에는 또 다른 호족 홍술도 자리잡고 있었지만, 최선필은 진보면 안에서 홍술과 다른 곳에 거점을 둔 호족으로 여겨진다. 고려사 지리지에서는 최선필의 거성 재암성이 보성부(甫城府)라고 하는데, 보성부는 통일신라 시절 상주 문소군의 진보현(眞寶縣)과 명주 야성군의 진안현(眞安縣)을 합쳐 만든 행정구역이다. 이 중 홍술이 진보현에 있었고 세력이 옆동네 의성에 걸칠 정도로 꽤 컸기 때문에 최선필은 진안현 부분의 호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이름은 정사인 삼국사기, 고려사에서는 성씨가 표기되지 않은 '선필'로만 등장하지만, 당대에 아주 가까운 939년 제작된 영주시 비로암에 있는 비로사진공대사탑비에서 성씨가 최씨로 기록되어있다.
2. 생애[편집]
고려 항복 이전의 기록은 정사에는 남아있지 않다. 다만 당대 금석문 기록상 그는 최씨인데, 대표적인 6두품 성씨 최씨라는 점을 들어 학계에서는 그가 과거 통일신라가 지방으로 파견했던 지방관이 난세를 맞아 토착화한 호족 유형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고려와 신라 사이를 중개해 준 기록을 봐선 신라 조정에도 우호적인 세력으로 보이며, 그가 나이가 많아 왕건이 상보(尙父)라고 불렀던 점을 봐선 후백제왕 견훤과 비슷한 연배에 왕건보단 한 세대 위였던 듯 하다. 한편 친불교 호족으로 당시 이름높은 선승 진공대사가 안전하게 머물 만한 거처를 제공했다.
왕건이 궁예를 무너트린 뒤, 옆동네 호족 홍술이 922년 고려에 항복했지만, 최선필은 한동안 독자 세력을 계속 지켰다. 고려사 열전에 의하면 돌아다니는 도적떼 정도만 방어하면서 성을 굳게 지켰다.
왕건이 서라벌의 신라 조정과 우호관계를 맺으려 하자 최선필이 먼저 가서 경순왕에게 안부를 묻게 하고 두 왕의 정상회담을 중개해 주었다.
오랫동안 친고려 친신라 성향으로 독자 세력을 지켰지만 930년 결국 고려에 귀순 의사를 밝혔다. 이는 이웃 호족인 홍술이 929년 견훤의 공격으로 멸망한 것이 원인일 수 있다. 왕건은 매우 환영하며 그를 아버지와 같다는 의미로 상보(尙父)로 부르고, 대광(大匡, 고려사) 국부 대장군(國父大將軍, 비로사진공대사탑비)이라는 파격적인 호칭을 주고 선필의 딸 해량원부인(海良院夫人)을 후궁으로 들여 정략결혼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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