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투아니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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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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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2018년)
출처(EFP: 유럽 영화 프로모션)
인구
280만 명
순수 자국생산 장편영화
28편
관객 수
430만 명
1인당 연간 영화 관람 횟수
1.54회
자국영화 점유율
27.9%
스크린 수
84개
1. 개요
3. 역사
3.2.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
3.3. 소련 지배
5. 영화 작품


1. 개요[편집]


리투아니아영화. 발트 3국 영화 중 가장 앞서있다고 평가받는다.

리투아니아의 영화 중심지는 빌뉴스카우나스로 이원화되어 있다. 이는 폴란드 제2공화국이 빌뉴스를 강탈했던 시절의 흔적이다. 빌뉴스를 폴란드가 강탈하면서, 영화학교 등 영화 인프라를 카우나스에 깔았던 것이 21세기까지 이어진 것이다.

2. 영화 시장[편집]


2017년 기준으로 2,040만 유로의 수입을 거뒀다. 1인당 연간 영화 관람 횟수는 1.54회로 독일 영화 시장의 수치와 비슷하다.

3. 역사[편집]



3.1. 러시아 제국[편집]


1896년 처음으로 리투아니아 빌뉴스에 영화 상영이 있었다. 1909년 Antanas Račiūnas과 Ladislas Starevich 감독으로 최초의 리투아니아 영화가 제작되었다.

3.2.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편집]


1919년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리투아니아는 독립하였다. 1921년 폴란드 제2공화국이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를 강탈[1]하면서, 1795년 멸망때가지 폴란드-리투아니아로 한 나라이던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의 관계는 매우 험악하게 변했다. 1926년 임시수도 카우나스에 리투아니아 카우나스 영화학교를 설립하였다.

3.3. 소련 지배[편집]


1940년 리투아니아는 소련에 합병되었다. 이후 리투아니아의 자체적인 영화는 소련 붕괴 때까지 정체된다.


3.4. 1990년대[편집]


1989년 동유럽 혁명의 여파로 탈린부터 빌뉴스까지 "인간 띠 잇기"를 통한 노래 혁명으로 발트 3국1990년 소련에서 분리독립한다. 이후 리투아니아 제2공화국은 재빨리 영화 산업 복원에 나서서 빠르게 영화 산업이 성장했다.

3.5. 2000년대[편집]


성장하던 리투아니아 영화 시장은 대침체가 닥치기 이전인 2006년부터 침체를 맞기 시작한다. 외형 성장과 내실 모두가 부실해졌다는 평을 받았다.


3.6. 2010년대[편집]


라트비아 영화에스토니아 영화와 달리 최악의 시점에서도 리투아니아 영화 시장에서 자국영화 점유율은 10% 밑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2015년 유로존 가입으로 유로존의 지원을 받으며 다시 리투아니아 영화가 성장하고 있다.


4. 영화 감독[편집]


  • 샤루나스 바르타스[2]
  • 알란테 카바이테
  • 요나스 메카스[3]

5. 영화 작품[편집]




6. 영화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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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폴란드 땅이던 기간 빌뉴스는 빌노(Wilno)라고 불리면서, 상공업과 농업이 조화를 이룬 폴란드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2] 리투아니아를 대표하는 영화감독... 이지만 성폭력 및 폭행 의혹이 있어 명성을 깎아먹고 있다.[3] 리투아니아에서 활동한 것은 아니지만 리투아니아에 대한 회상을 작품 내외적으로 여럿 밝힌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