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인글로리/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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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베인글로리의 영웅은 각자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이는 영웅이 공개될때 공식 공개되는 스토리에서 알 수 있다. 영웅들의 스토리는 매우 다양하며, 서로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베인글로리의 완성도를 한층 더 높여준 원인.
최초 출시 영웅부터 41번째 영웅인 키네틱까지의 영웅 이야기가 있으며, 그 이후에는 모종의 이유로 영웅 이야기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베인글로리 세계관에 대해서는 베인글로리/세계관 문서 참조.
스토리는 영웅 출시 순으로 정리한다.
2. 아다지오 & 이드리스[편집]
아다지오, 이드리스 영웅 이야기 |
1편 '하지 않은 조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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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통찰의 저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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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 '라나와 아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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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캐서린 & 케스트럴 & 알파[편집]
캐서린, 케스트럴, 알파 영웅 이야기 (폭풍경비대 대서사시) |
1편 '케스트럴의 시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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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캐서린의 임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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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 '끝내야 할 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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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편 '그녀의 활시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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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편 '그날 밤의 선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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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편 '내가 찾는 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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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편 '방패와 활' [1] 이 이야기에서 겨울 전쟁 캐서린 스킨이 나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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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편 '쿠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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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편 '다리를 건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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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편 '알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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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편 '파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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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편 '내 이름은 데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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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링고 & 글레이브[편집]
링고, 글레이브 영웅 이야기 | |
1편 '총알 잡기' | 1편 '그랑고르의 글레이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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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링고를 만난 글레이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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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 '동전 던지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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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쏘우[편집]
쏘우 영웅 이야기 |
1편 '쏘우의 야전 훈련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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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교량 파괴자 쏘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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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 '쏘우와 거대괴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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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페탈 & 플리커[편집]
페탈, 플리커 영웅 이야기 | |
1편 '페탈의 힘' | 1편 '적진 깊숙한 곳, 플리커가 찾은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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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뮤니언들의 수다' | 2편 '어둠사냥꾼과 숲의 순찰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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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코쉬카 & 오조[편집]
코쉬카, 오조 영웅 이야기 | ||
1편 '코쉬카 길들이기' | 1편 '허풍쟁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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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지뢰를 발견한 코쉬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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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 '홍등 축제' [2] 이 이야기에서 나비춤 코쉬카 스킨이 나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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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크럴[편집]
크럴 영웅 이야기 |
1편 '안식을 찾아서 협곡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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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크럴, 고문에서 살아남은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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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 '내가 찾는 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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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쥴[편집]
쥴 영웅 이야기 |
'쥴의 큰 그림 1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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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쥴의 큰 그림 2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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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쥴의 큰 그림 3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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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타카 & 그웬[편집]
1부 타카 영웅 이야기 |
'그림자 속의 칼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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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그웬 영웅 이야기 |
'총과 태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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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스카프[편집]
스카프 영웅 이야기 |
1편 '스카펑간디르의 귀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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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스카펑간디르의 생존자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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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 '미제 사건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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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편 '불난 데 부채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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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아단 & 셀레스트 & 복스[편집]
아단, 셀레스트, 복스 영웅 이야기 |
1편 '그날 밤의 선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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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불타는 만 위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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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 '가면 축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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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편 '선봉장 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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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편 '할시온 협곡으로 1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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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편 '할시온 협곡으로 2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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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포트리스 & 로나[편집]
포트리스, 로나 영웅 이야기 |
1편 '만물의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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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무너진 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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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 '위대한 떡갈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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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편 '스크바더의 공격' [3] 이 이야기에서 살인 토끼 로나 한정판과 특별판 스킨이 나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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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편 '언제나 북쪽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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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스카이 & 바론[편집]
스카이, 바론 영웅 이야기 |
1편 '스카이의 약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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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선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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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 '바론을 위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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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편 '시에라 킬로 양키 에코' [4] Sierra Kilo Yankee Echo. NATO 음성 문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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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편 '바론의 선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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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핀 & 흑깃 & 말렌[편집]
핀, 흑깃, 말렌 영웅 이야기 |
1편 '납치된 공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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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사이좋은 등반자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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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 '저항은 무의미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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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편 '악당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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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하시오 공주. 저기 나쁜 놈들이 보인다오!" 흑깃은 꿰뚫기 자세를 취하며 검집에 손을 갖다 댔다. 시커먼 망토를 두른 수상쩍은 삼인조가 미로의 그늘 속에서 스르륵 나타났다.
"하하하. 고생이 많군 제군. 우리 공주마마 납치하느라 말이야." 그들 중 제일 덩치가 큰 녀석이 빠진 앞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리고 가시 박힌 철퇴로 공주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서부턴 우리가 맡지."
"뭐 하는 짓거린가? 지금 우리 현상금을 뺏어가려 하는 건가?" 핀이 말했다.
"헛소리!" 흑깃이 화를 내며 말했다. "내 검술에 별 모양으로 썰리기 싫으면 당장 꺼져."
"이봐. 일단 인원은 저쪽이 많아." 핀이 별 긴장감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런 군상들 한 수레 갖다놔도 내 상대가 못되지. 옷 입은 꼬락서니를 봐봐. 저게 뭐냐. 넝마도 아니고." 흑깃이 코웃음 쳤다.
말렌 공주는 팔짱을 끼고 손가락을 두드렸다. "아...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날 납치만 해주면 좋으니까 서둘러. 경비병이 곧 여기에 올 거라고!"
"아. 친애하는 공주마마. 그 경비병들은 오늘 칼퇴근하셨다오." 중간 덩치의 불량배가 땅에 침을 타악 뱉으며 지껄였다. 그리고 어깨너머로 어딘가에서 자고 있을 경비를 가리켰다. "우리가 머리를 탁하고 쳤더니 억하고 기절하더라고. 너네도 순순히 따르지 않으면 똑같이 만들어 줄테다!"
"이 미천한 것들이 어디서 공주님한테! 저놈들 말본새 좀 보래. 몸에 바람구멍 뚫려 봐야 정신을 차리지?" 흑깃이 좀 과하게 챙 소리를 내며 칼을 뽑아 들었다. "어리석은 자들아 보아라. 이것이 바로 천하의 명검 '흑깃'이다."
"웩. 세상에. 칼 이름을 자기 이름 따서 짓다니..." 말렌 공주가 손발이 오그라든다는 듯 말했다.
"이 명검 흑깃과 나는 천하에 둘도 없는 콤비요!" 흑깃이 자랑스레 외쳤다.
"안 물어봤거든요?"
"자. 어서 빨리 나머지는 처리하고 공주를 들고 튀자고." 대화가 산으로 가는 것 같자 불량배 중 가장 작은 녀석이 흑깃 일행의 대화를 끊으며 말했다.
"흐흐흐. 이봐 거기. 그렇게 잘 가꾼 머릿결이 엉망이 되면 억울하지 않겠어?" 가장 큰 녀석이 비웃었다.
"저렇게 깔끔 떨고 다녀봐야 죽으면 다 똑같지." 중간 덩치가 조끼에서 단도 두 자루를 꺼내며 비아냥댔다.
"도저히 참을 수 없군! 핀 선생 여기는 나에게 맡겨!" 흑깃이 화를 내며 말했다.
"알았다." 핀이 대답했다. 그런데 정작 핀은 친애하는 애완조 수지가 저녁 식사로 날벌레를 잡아먹는 걸 보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이윽고 시작된 싸움. 하지만 상황은 일방적인 흑깃의 우세로 돌아갔다. 불량배들의 무기 사이로 흑깃은 잽싸게 움직이며 공격을 해댔다. 깡패들의 느린 움직임으로는 도저히 흑깃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흑깃의 미려한 검술이 불량배들의 몸에 상처를 낼 때마다 그들의 무기는 허공을 가르는 데 급급했다. "하하하 어리석도다! 거북이보다도 느린 솜씨야. 너희들 스승이 누구냐? 내가 그 스승한테 잘 말해주마. 네 제자는 최악이라고!"
하지만 흑깃이 제풀에 신나서 덩치 큰 녀석 둘을 쫓고 있을 때 작은 몸짓의 불량배가 그 틈을 노려 공주를 낚아챘다.
"이봐. 네 현상금 꺼리 저기 가는데?" 핀이 태평스레 말했다.
깜짝 놀란 흑깃은 부랴부랴 유괴범의 뒤를 쫓았지만, 결국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돌아오니 거의 다 제압해 놓은 나머지 덩치 둘도 사라지고 없었다.
"도와줘 핀선생!" 흑깃이 비명을 질렀다.
"흐음. 무뢰배들은 네가 다 처리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거 취소야 취소. 어서 빨리 우리의 소중한 현상금을 훔치려는 녀석들을 잡아줘!"
"좋아." 핀은 육중한 쇠사슬을 당겨 닻을 조준하더니 어둠 속으로 휙 던졌다. 그리고 다시 딸려오는 닻. 놀랍게도 거기엔 도망간 불량배 셋이 사이좋게 매달려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말렌 공주도 불량배들의 어깨에 얹혀 흑깃의 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녀의 연분홍빛 뺨에는 오렌지 나무 가시에 스친 상처가 나 있었다.
"잘했어 핀성생!" 흑깃이 환호성을 질렀다.
"이.. 바보 같은... 아저씨들..." 공주가 힘없이 중얼댔다. "이곳의 오렌지 나무 가시는 공주한텐... 독이... 야..."
그리고 흑깃의 품에서 정신을 놓았다.
상황은 악화 일로라, 머리 위의 발코니에서는 왕궁 경비병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이 녀석들 이쪽으로 도망쳤다! 어서 잡아!"
흑깃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어어어...거, 겁먹지 말고. 이, 이쪽이야. 왼쪽, 왼쪽 그리고 다음엔 오른쪽... 으으... 아닌가. 어, 어디로 가야하지?" "참으로 답답하구만." 핀은 느긋하게 말하고는 닻을 앞세워 미로의 가시덤불을 마치 불도저처럼 뚫고 나갔다.}}} |
5편 '잠자는 연못가의 공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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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호수 위에 낚시찌 하나가 평화롭게 떠 있었다. 바위에 걸터앉은 핀은 꾸벅꾸벅 졸다가 발에 끼워놓은 낚싯대가 미끄러지면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기를 반복하며 강태공 행세를 하고 있었다.
한편 핀 뒤에 펼쳐진 잔디에선 흑깃이 꺾어온 꽃들로 주위를 장식하며 아직도 의식이 없는 공주를 고이 안고 있었다. 경외로운 눈빛으로 공주의 머리를 쓸어 넘기던 흑깃이 중얼거렸다. "이걸 봐, 살면서 이렇게 매혹적인 여잘 본 적 있어? 삼단 같은 머리며 백옥 같은 얼굴이며, 우아한 손이며... 이렇게 아름다운 게 또 있을까! 이 초승달 같은 눈썹 좀 봐. 마치 말이야, 마치..."
"... 잠 좀 자자." 핀이 투덜거렸다.
"아니, 아니지. 표정에서... 위엄이 느껴진단 말이야. 마치 '그대가 진정 날 깨울 수 있을 것인가?'라고 묻는 거 같아. 물론이죠, 공주마마. 전..."
"후... 잠 좀 자자니까?"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하품을 하던 핀이 말했다. "그 공주마마 보쌈하느라고 밤새도록 뜬눈으로 지새웠잖아."
"이런 와중에 잠잘 궁리나 한단 말이야?" 흑깃은 핀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무릎을 구부리더니 허탈하게 말했다. "이리도 아름다운 공주께서 도움이 필요하시다고요? 걱정 따윈 하지 마십시오. 흑깃이 있잖습니까." 그러면서 흑깃은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비벼댔다.
그 와중에도 핀의 코 고는 소리가 퍼져 나갔다.
핀의 코골이에도 편안하게 걸터앉은 수지는 평화롭게 지저귀었다.
붉은수염 지느러미 잉어가 연못 밖으로 머리를 쑥 내밀더니 의심스러운 눈길로 찌를 바라봤다.
말렌 공주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상하네." 흑깃이 말했다. 핀이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입맞춤이 통하지 않는걸."
"네 기술이 문제지 뭐." 잉어와 눈이 딱 마주친 핀이 말했다. "입맞춤은 말이야, 예술이라고. 앞니를 어떻게 부딪쳤느냐가 중요하단 말이지."
"저런 인사하고 입맞춤한 트롤 여자들이 안쓰럽군그래."
"아직까진 내 입맞춤이 엉망이란 소리 들어본 적 없거든?" 핀이 낚시찌만 바라보며 나 잡아 잡소 하며 다가오는 잉어를 보며 말했다. "이런 내 아침 식사네? 그래그래, 이리 와서 맛있는 벌레 먹어야지?"
"어휴, 이런 엄청난 순간에도 로맨스라곤 털끝만큼도 없구먼." 흑깃이 투덜거렸다. 그리곤 몸을 숙여 더 긴 입맞춤을 날려 말렌 공주의 입술을 다시 한 번 빼앗았다.
수지는 그 순간에도 핀의 귀 주위를 윙윙거리던 파리를 잡아챘다.
잉어가 미끼를 덥석 물었다.
그러자 핀은 옳거니 하면서 벌떡 일어나 낚싯대를 홱 잡아 올렸다. 입꼬리가 돌돌 말린 모양을 한 선홍색 주둥이의 잉어가 찌에 걸려 올라오며 퍼덕거렸다.
말렌 공주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처구니가 없구먼!" 흑깃이 울부짖으며 말했다. 그는 짜증을 내며 팔을 꼬고는 털썩 주저앉았다. 그 사이 핀은 잉어 주둥이에서 바늘을 떼어내고 있었다. "공주가 이상한 게 분명해. 난 이 땅에서 최고로 입맞춤을 잘한단 말이야!"
핀이 꿈틀거리는 잉어를 들어 올렸지만, 흑깃은 너무 낙담한 나머지 눈앞의 잉어에 감탄할 겨를이 없었다. "그렇게 입맞춤해봤자 공주가 어떻게 알겠어." 핀이 넌지시 말했다.
"그래서 공주를 깨우려고 입맞춤하는 거잖아. 이 친구야!" 울부짖으며 흑깃이 말하자 수지가 깜짝 놀랐다.
잉어는 물고기의 생을 마감했다.
"입맞춤으론 공주가 깨어나지 않아.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주워들어서는..." 핀은 고개를 저으며 아침 식사가 된 잉어를 머리를 한 입 베어 물고 잘근잘근 씹었다.
"안 된다고?"
"그럼 되겠냐? 세라핌 깃털로 간지럽혀야지 잠자는 공주님이 일어날걸? 이 상황에는 파란색 깃털이 제일 잘 통해."
수지도 동의한다는 듯 조막만 한 머리를 끄덕였다.
"오호... 그러면 되겠는데!" 흑깃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세라핌의 파란 깃털이 필요해. 그래서 내 입맞춤이 통하지 않았던 거군."
"글쎄다. 요즘엔 예전처럼 세라핌이 많지 않아서 말이야. 근데 왜 못 깨워서 안달이야? 우린 공주를 구출한 게 아니라 납치한 거니 그 상태로 데려가도 문제없잖아."
"혼수상태에 빠진 공주 가지고 현상금을 어떻게 제대로 받아!"
"네가 공주를 좋아하는 거 아니고?"
"좋아한다고? 이거 보라고, 핀 선생. 어딜 봐서 내가 공주를 좋아한다는 거야? 공주는 우리 밥줄이라고. 나 이 바닥에서 굴러먹을 대로 굴러먹었어 왜 이래!"
"그럼 빠져들지 않게 조심해." 핀은 아침 식사의 나머지를 삼키면서 말했다. 그리고는 언제나처럼 식곤증에 못 이겨 다시 낮잠에 빠졌다. 핀이 낮잠에 빠진 걸 확인하자 흑깃은 말렌 공주의 손을 잡았다.
"공주마마, 그 깃털을 찾아서 잠을 깨워 드리지요."라며 속삭이듯 말했다. "어떻게 되는지 보자고." '숲의 마녀'울창한 나무를 헤치며 흑깃과 핀 그리고 수지는 달렸다. 깊은 잠에 빠진 말렌 공주는 장마철에 널어놓은 빨래처럼 힘없이 핀의 어깨에 매달려 있었다. 얼마나 헤맸을까. 일행은 마침내 깊은 숲속에서 마녀의 오두막을 발견했다. 담쟁이덩굴에 둘러싸인 오두막에선 향긋한 냄새가 나는 연기가 퐁퐁 솟아올랐다. “드디어! 늙은 마녀의 오두막을 찾았다!” 흑깃이 만세를 불렀다. “마법… 사아?” 핀이 흑깃을 쳐다봤다. “이렇게 깊은 숲속에 오두막이 있음 뭐겠나. 당근 마녀의 오두막이지!” “안 좋은 예감 든다. 숲속 마녀. 내버려 두는 게 좋다.” 핀이 흘러내린 말렌 공주의 팔을 끌어올리며 말했다. “평소라면 그랬겠지. 하지만 핀선생. 네가 그랬잖아. 공주의 잠을 깨우려면 마법 걸린 천족의 깃털이 필요하다고.” 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공주를 흑깃의 품에 넘겨주고 오두막 문을 두드렸다. ’쿵쿵쿵’ 회색 옷을 입은 머리가 하얗게 센 여자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나왔다. “안녕하신가 늙은 마녀여! 부탁이 하나...” “안돼.” 마녀가 흑깃의 부탁을 단칼에 잘랐다. “허허. 그댄 아직 내 부탁이 뭔지도 안 들어봤잖소.” “흥, 그럼 들어나 보지.” “난 지금 천족의 푸른 날개 깃털이 꼭 필요하오.” 흑깃이 간절히 부탁했다. “안돼.” 마녀가 흑깃의 부탁을 단칼에 잘랐다. “이 불쌍한 공주님이 도통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소. 그녀를 업고 가시덤불을 헤치고 오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흑깃이 한숨을 쉬었다. “옮긴 건 나다.” 핀이 대꾸했다. “그럴 줄 알았지.” 마녀가 콧방귀를 꼈다. “크흠, 그건 그렇고. 대체 왜 우리 부탁을 거절하는 거요?” 흑깃이 물었다. “나보고 할망구 마녀라 한 게 누구더라?” “허허, 좀 나이 들어 보인다 했지 언제 할망구라 했소.” 흑깃이 항의했다. “넌 그 잘난 면상을 가지고 여자들 깨나 울리고 다녔겠지?” “뭐 자랑은 아니오만 그런 편이오.” 흑깃이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 네 품에 안겨 있는 죽은 여자처럼 말이야.” “그럼 그럼... 아니 무슨 소리요! 이 공주님은 단순히 자고는 것뿐이라니까!” “오렌지 나무 가시에 찔렸구먼. 고놈은 참 못된 독을 가지고 있지.” 마녀가 인상을 찡그렸다. “아닐 거요. 제발 도와주시오. 내 일생 이처럼 간절한 사랑을 해본 적이 없소!” 흑깃이 울상을 지었다. “충고하는 데 젊은 양반. 아예 이 여자를 깨우지 말게. 일어나면 널 차버린다에 내 국자와 냄비를 걸지.” “당신이 사랑을 해봤다면 이해할 것이오!” “흥, 그대가 여자와 사랑에 대해 뭘 안다고... 보자, 이런 고귀한 공주님은 그 아름다움 만큼이나 내면엔 날뛰는 어둠이 있기 마련이지.” 마녀가 축 늘어진 말렌의 손에 들린 거울을 조심스레 살폈다. “헛소리. 이런 미녀가 어둠을 품고 있을 리 없소.” 흑깃 펄쩍 뛰었다. “그건 자네 생각이고. 이렇게 하지. 거기 여자 손에 들린 거울을 건네다오. 그럼 천족의 깃털을 주마.” 마녀가 제안했다. “이 거울은 우리 게 아니다.” 핀이 고개를 저었다. “짹짹.” 어깨 위의 수지도 핀을 따라 했다. “좋아. 주겠소!” 오랫동안 공주를 들고 있어 팔이 빠질 것 같던 흑깃이 낼름 대답해버렸다. “그럼 일단 안으로 들어오게나.” 마녀가 일행을 안내했다.}}} |
6편 '영원히 행복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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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렌 공주는 콧잔등에 간지러움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성공이다 핀선생! 그녀가 일어났어!”
말렌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마녀의 오두막 안이었다. 뭐가 들었는지 요상한 빛깔을 내뿜는 유리병, 벽에 걸린 정체를 알 수 없는 식물, 그리고 벽난로 가엔 늙은 마녀가 앉아 있었다.
“고귀한 레이디. 저 광활한 숲속을 그대를 업고 죽기 살기로 헤쳐왔다오. 갖은 고생 끝에 이 마법의 깃털을 구해 그댈 깨울 수 있었소.” 황금빛 머리카락의 남자가 감미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말렌은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아! 분명 궁전에서 그녀를 납치한 자다.
“거참. 내가 옮겼다. 아까도 말했다.” 너무 큰 덩치 때문에 현관문에 겨우 머리만 들이민 강트롤이 툴툴댔다. 강트롤 위에 저 새, 내가 키우던 쿠크다스였는데 잘 있구나.
말렌은 자세를 바로 하고 그녀 앞에 다소곳이 허리를 굽이고 있는 남자의 뺨을 어루만지며 이름을 떠올리려 애썼다. “나의 왕자님. 이 사례를 어찌 해야 할까요?”
“그대의 입맞춤 한 번이면 충분하오.” 흑깃이 공주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말렌은 흑깃의 품에 녹아들듯 안겼다. 둘의 입술이 포개지고 감미롭고 달콤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잘 됐군. 너희들 결혼식에 나도 꼭 부르게나.” 마녀가 끼어들었다.
“뭐, 뭐시라?” 흑깃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녀는 ‘결혼식’이라 했다.” 핀이 친절하게 다시 말했다.
“결혼식!” 말렌이 꽥꽥댔다.
“대체 무슨 소리요. 우린 이제 겨우 입맞춤한 사이인데! 결혼이라니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아도 유분수지.” 흑깃이 뒤로 물러났다.
“분위기 보아하니 안 봐도 그림이구먼 뭘.” 마녀가 놀렸다.
“결혼식 정말 좋아요! 꼭 내 언니 결혼식보다 더 크고 화려해야 해요! 하도 길어서 왕궁 앞마당을 채우는 멋진 드레스를 입고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을 거라구요.” 말렌이 흥분했다.
“하지만 법으로 왕족은 왕족하고만 결혼할 수 있다지?” 마녀가 초를 쳤다.
“맞소. 난 용기 있고 잘생겼지만 아쉽게도 왕족 혈통이 아니오. 우린 금지된 사랑을 할 처지요.” 흑깃이 비극의 주인공이 된 마냥 대사를 지껄였다.
“하지만 난 크고 화려한 왕가의 결혼식을 원하는 걸요.” 말렌이 칭얼댔다.
“여왕이라면 널 왕족으로 만들어 줄 수 있을걸? 마녀가 제안했다.
“양민을 왕자로.” 핀이 말했다.
“도둑을 남작으로.” 수지가 새의 언어로 노래했다.
“몰락 귀족을 대공으로?” 말렌이 눈물을 훔치며 거들었다.
“패배자를…”
“거기까지 하지.” 흑깃이 끊었다.
“한 가지 더 짚을 건, 그렇게 해도 넌 그저 허울뿐인 왕족일 뿐이지. 차라리 아가씨가 에벤타이드의 여왕이었다면...”
“그럼 난 누구랑도 마음대로 결혼할 수 있죠! 됐네요. 우리 폭풍 여왕을 무찌르기만 하면 되는 거죠?” 말렌이 외쳤다.
“말처럼 쉽지 않지.” 마녀가 지적했다.
“왜죠? 우리 일행에 강인한 트롤이랑, 날 구해준 검술의 대가도 있는데!” 말렌이 칭얼댔다.
“그것만으론 부족해. 강력한 마법사 그리고 불을 뿜는 용도 한 두 마리 필요하지.” 마녀가 새로 얻은 거울을 응시했다.
“용 한 두 마리쯤이야 쉽죠 뭐.” 말렌이 어깨를 으쓱했다.
“용, 구하기 힘들다. 상점에도 안 판다.” 핀이 지적했다.
“그 말대로야. 하지만 다행히 마법사는 금방 찾을 수 있겠군.”
“잠깐. 그거 내 거울이잖아욧!” 말렌이 마녀를 쳐다봤다.
“아, 아가씨. 천족의 깃털은 비싸다고. 대가를 지불해야지.” 흑깃이 말렌을 타일렀다.
“후후... 여기 이 남자는 거울의 용도를 몰랐겠지.” 마녀가 거울을 빙글빙글 돌렸다.
“이 도둑! 내 소중한 거울을 당장 돌려줘요.” 말렌이 발을 동동 굴렀다.
“거울은 깃털의 대가로 받은 것. 마땅히 내 것이다. 대신 이건 돌려주마.” 마녀가 손끝으로 거울의 뒷면을 두드리자 놀랍게도 유리에서 말렌의 형상을 한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흑깃이 긴장하며 검을 뽑으려 했으나 말렌이 그를 막아섰다. 그리고 천천히 한 손가락을 들어 올리자 말렌의 그림자도 그 동작을 따라 했다.
“그 옛날 이 나라의 왕과 왕비는 아주 예쁜 아기를 낳았지.”
어리둥절한 흑깃과 핀 사이로 마녀가 끼어들었다.
“아이는 고귀하고 아름다웠으나 성깔이 장난 아니었다. 또한,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났을 땐 주변을 마법으로 초토화했지. 그렇단다. 그때 태어난 아이는 순수혈통의 마법사였던 게야. 다들 알다시피 제국에서 순수혈통 마법사는 무조건 여왕의 군대에서 복무해야 하지.”
말렌과 거울에서 튀어나온 그림자는 이제 점점 하나로 합쳐졌다.
“숲의 마녀인 나는 보통은 왕가의 일에 끼어들지 않아. 하지만 이 왕과 왕비는 상당히 많은 대가를 바치며 나에게 도움을 청했지. 그래서 난 말렌 공주의 반틈, 강력하지만 어두운 마법사의 자아를 이 거울 속에 가두었다. 그 후로도 공주는 철없고 모자란 흉내를 내어 폭풍 여왕의 마수를 피해갔지. 하지만 이제는...”
마녀가 이야기를 풀어놓는 사이, 두 말렌은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
“아이야, 이젠 그대가 여왕이 될 차례란다.”
“그건 너무 어려운 일이다.” 핀이 걱정했다.
말렌은 휙 돌아서 핀과 흑깃을 노려보았다. 그들이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그녀의 몸 가장자리에서 기괴한 검은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난 용을 가질 거야. 세상의 모든 용은 다 내 걸로 할거야. 그리고 에벤타이드의 여왕으로 등극해 당신과 함께 영원히 행복하게 살 거라구. 내가 정했어!”
하나로 합쳐진 말렌은 더 성숙하고 아름다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꾸벅 숙여 마녀에게 인사한 뒤,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흑깃과 핀을 지나 현관문을 나섰다.
두 모험가는 충격에 빠졌다.
“그래서, 흑깃. 우린 우리만의 길을 간다. 맞나.” 핀이 물었다.
“맞아 흑깃! 바로 그 이름이었어. 이제야 기억이 나.” 말렌은 그 말을 남기고 폴짝폴짝 뛰며 숲속으로 사라졌다.
“그녀를 보라고 핀. 저렇게 생기발랄하고 즐거워 보이는데 어찌 곁을 떠날 수 있겠나...” 흑깃이 한숨을 쉬었다.
“그럼 공주를 따라가지. 용 구하러.” 핀이 발걸음을 옮겼다. “잘들 가시게나. 폭풍 여왕에게 진정한 폭풍이 뭔지 똑똑히 보여주라고!” 마녀가 오두막의 문을 닫으며 외쳤다.}}} |
16. 기디안 이야기[편집]
16.1. 1장: 라임[편집]
1장: 라임 영웅 이야기 |
1편 '모든 게 사라지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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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랑고르 가의 일원들은 거대한 빙상 위에서 바람이 몰아치는 트로스탄 첨탑을 집어 삼키는 화마를 하릴 없이 바라보았다. 기디안 무역 중심지였던 도시가 생지옥으로 변해가자 그랑고르 일원들의 얼굴은 연기로 일렁거렸고 그들의 가슴은 콱 막힌 듯 답답해져 옴을 느꼈다. 그들은 눈물과 슬픔을 가득 담은 기디안 금화를 빙하의 갈라진 틈새로 뿌렸다. 먼저 저 세상으로 간 자들이 노잣돈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폐허가 된 지금 금화 따위는 이 일대에서 쓸모 없어 질 것이 아닌가.
쿵쿵... 현자들은 흩날리는 눈송이로 뒤덮인 곳에 모여 손에 든 지팡이로 땅을 구르며 고대 이야기의 리듬을 탔다. 그랑고르의 대장로는 상아를 한 번 훔치고는 세대에 걸쳐 이어 내려오고 되풀이된 첫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 트로스탄이여! 곧 잊힐 그 장엄함이여."
"현자들은 알고 있었느니." 모두 입을 모아 노래를 흥얼거렸다.
"인간들은 거칠게 빙하를 뚫으리라. 인간들은 대지에서 고귀한 수정을 뽑아내리라. 인간들은 우물을 말려버리리라." 그란고르에서 다음으로 나이가 많은 여인이 날카로운 음색으로 노래를 이어갔다.
"현자들은 알고 있었으니."
"전리품 사냥꾼들은 인간을 무기와 바꿔버렸다." 다음 음률이 계속되었다.
"현자들은 알고 있었으니."
"도시는 탐욕의 무덤이 되어버렸고." 노래가 이어졌다.
"현자들은 알고 있었으니."
"아, 멀어라. 조상들의 육신이 여기 있으니 불쌍한 영혼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으니." 그랑고르의 대장로는 고통 속에 절규했다.
"현자들은 알고..."
산봉우리에서 얼음 같은 칼바람이 대지를 진동시키며 그들의 노래를 멈추었다.쉬이익!미친 듯이 옷가지를 끌어모으며 엄마는 절규했다. 그 소리에 화마를 바라보던 모두의 시선이 위로 쏠렸다. 산사태 대신에 살을 에는 바람과 함께 나타나는 건 한 남자였다. 굽은 등에 쭈글쭈글한 양파 껍질과 같이 금방이라도 벗겨질 듯한 검버섯 핀 피부가 남자의 나이를 말해주는 듯 했다. 발톱과도 같은 그의 손에는 지팡이가 들려 있었고, 그의 어깨엔 그랑고르의 가죽이 웅장한 모습으로 둘러 있었다. 그랑고르 일원들은 누구도 그를 본 적이 없었지만, 그들 모두 이 은둔자를 알고 있었다. 얼음의 지배자, 그랑고르 포식자, 칼 봉우리의 공포... 바로 라임이었다. 병력이 압도적으로 많았음에도 무장을 완벽하게 갖췄음에도 그랑고르 일원들은 두려움에 벌벌 떨며 뒷걸음질 쳤다. 얼음 마법사는 살을 베는 듯한 거대한 서릿발을 내뿜었다.
"꼬마는 어디 있는가?" 라임이 나지막히 물었다.
"그 녀석의 엄마는 알고 있어." 그랑고르의 대장로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건 그랑고르 사이의 관용적 표현일 뿐이었다. 바로 아무도 모른다는...
냉소를 한껏 품은 라임은 그랑고르 사람들을 차디차게 외면하고 돌아섰다. 그리고는 산비탈로 내려가는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면서 혼잣말로 계속 투덜거렸다. 불타 버린 도시를 둘러싸 흐르는 강물은 잿더미로 뒤덮여 칠흑 빛으로 바뀌었다. 쾅! 라임이 땅에 지팡이를 박으니 칠흑 빛으로 흐르던 강물이 그 자리에서 꽁꽁 얼어붙었다. 콜록콜록... 기침에 헛기침까지 이어가며 라임 영감은 지팡이를 질질 끌고는 도시로 들어섰다. 그가 지나쳐온 거대한 화마에 짜증을 가득 담아 그는 지팡이를 흔들었다. 피시식! 그 거대했던 화마는 자신을 강하게 몰아친 서리를 감당하지 못하고 꺼져갔다.
"꼬마야!" "야, 꼬마야!" 라임이 불러댔다.
그 날 아침 이 도시엔 무역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여행자들이 바글바글했더랬다. 하지만 지금은 타 버린 울타리를 가로질러 분지 양쪽에 흐르는 강으로 뛰쳐나가는 가축들로 넘쳐났다. 실로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마법사는 마법을 시전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를 반복하면서 당당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손에서 뻗어져 나간 마력 담긴 서리 화살은 화염을 차례대로 잠재우며 화마가 쓸고 간 안가와 상가를 두꺼운 얼음장으로 뒤덮었다. 그는 이윽고 멈춰서서 마법사의 탑을 바라보았다. 찬란하게 빛나는 고대 기디안 첨탑을 기반으로 지어진 이 장대한 탑은 트로스탄 지방 정부의 중심부였다. 하지만 그것도 옛이야기였다. 탑의 상층부는 부서졌으며, 그나마 힘겹게 서 있는 나머지 부분도 화마에 그을려 과거의 영광은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라임은 나머지 부분마저 얼음으로 뒤덮어 버리고 말았다. 그가 지나간 마을 주위에는 그의 목소리로부터 확연히 느낄 수 있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어이 꼬마야, 늦었구나! 어디로 가고 싶니?" 그는 마을 중앙의 불꽃에 삼켜지지 않은 유일한 장소, 할시온 우물에 다다를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사방의 부서진 잔해에서 나오던 유독한 연기는 이제 모두 얼음 밑에 잠들었다. 할시온 우물 가장자리, 그곳에 평범한 그랑고르보다 훨씬 큰 덩치를 자랑하는 털로 뒤덮인 어깨에 얼굴을 푹 파묻은 왜소한 여인이 있었다. 여인의 손에는 소용돌이치는 잿더미에 으스스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손전등이 들려 있었다.
"아, 이런!" 짜증이 날대로 난 라임은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여기 대장이 누군가!"
여인은 눈물 자국이 남은 검댕투성이 얼굴을 이방인 쪽으로 돌렸다. 다른 둘보다 훨씬 몸집이 작은 이 여인은 어깨를 축 내리더니 턱을 실룩거렸다. 여인은 부들부들 떨면서 라임의 물음에 대한 답으로 타고 남은 기디아 고위 마법사의 로브를 들이 밀었다.
"아이는?" 라임이 따져 물었다. 여인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애타는 심정으로 그랑고르의 팔둑을 잡으며 도움을 청했다. "아이가 사라졌어요." 여인은 대답하고는 그랑고르 일원의 퉁퉁한 얼굴을 처절한 심정으로 올려다 보았다. "모든 게 사라졌단 말이에요."}}} |
2편 '냉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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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 박힌 강철 장화를 신고 장갑 낀 손에는 얼음 도끼를 들고 모피로 온몸을 감싸 중무장한 한 소년이 검은 눈을 부릅뜨고 동굴 입구에 서 있었다. 지난 수십 년 간 누구도 동굴 속 가파른 오르막길을 지나 빙하의 꼭대기에 다다른 적이 없다. 바로 그 차디찬 빙하의 꼭대기에 괴팍한 전설의 얼음 마법사 라임이 살고 있다. 누군가를 조우했던 때보다 긴 세월이었다.
"지금 당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너희 엄마가 날 가만 안 둘 텐데..." 소녀의 친구이자 탄탄한 체격의 그랑고르가 투덜댔다.
"이것보다 더 험한 것도 지나가 봤어."
“저 가파른 곳을 오르는 게 무서운 게 아니라 저 꼭대기에 있는 게 무섭단 말이야.”
소년은 통통한 그랑고르 친구의 눈 덮인 어깨를 토닥거렸다. 그리고는 위를 한 번 올려다보고는 천천히 조심조심 올라갔다.
소년이 꼭대기에 올라 숨을 헐떡이면서 머리를 쑥 내밀자, 눈앞에 털이 뒤덮인 장화가 들어왔다. 고개를 위로 올려보니 말로만 듣던 전설의 얼음 마법사가 솔방울을 으적으적 씹어먹고 있는 게 아닌가? 소년은 한 손으로 마법사에게 잡아주길 청하며 "마법사님, 배우고 싶은 게 있습니다!"라며 큰소리로 외쳤다.
"첫 번째," 라임은 소년의 이마 정중앙에 장화 한 짝을 턱 놓더니 투덜거리며 말했다. "날 혼자 둘 것." 라임이 쿡 찌르니 소년은 사정없이 미끄러지며 기껏 올라온 차디찬 동굴 속으로 떨어졌다. 아래 있던 그랑고르 친구 앞에 떨어지기 전까지 소년의 으악 하는 비명과 쿵, 퍽 소리가 마법사의 너털웃음과 함께 섞여 메아리쳤다.
"으음..." 소년의 친구인 그랑고르가 안타까움에 신음 소리를 냈다.
"난 괜찮아." 소년은 헉헉대더니 다시 올라갈 준비를 했다.
다시 꼭대기에 오르자, 소년은 마법사가 천막에 다리를 꼬고 앉아 반쯤 언 순록의 뱃속에 있던 이끼를 잘글잘근 씹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소년은 정상에 발을 디디며 다시 한 번 그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라임님, 마법사님의 마법이 엄청나다고 들었어요."
라임은 들은 체도 안 하고 입을 열고 계속 잘근잘근 씹어댔다.
"저는 마력을 받고 태어났어요. 기디안 마법 학교 상급반에도 다녔고요. 그랑고르 사냥꾼 시험도 통과했어요."
라임의 희끗희끗한 눈썹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소년은 인내심이 바닥에 떨어졌다. "흥, 엄청난 마법사이긴커녕 그냥 할배인 거 아니에요? 아이들 겁이나 주려고 할배 얘길 떠들고 다닌 거로군요."
라임은 콧구멍에 손가락을 쑤셔 넣더니 바짝 얼은 코딱지를 튕겨내 소년의 볼에 명중시켰다.
화가 잔뜩 난 소년은 굴을 통해 다시 내려갔다. 모닥불을 피워놓은 그랑고르 친구가 물끄러미 그런 소년을 바라봤다.
"말도 꺼내지 마." 소년은 대꾸했다.
"또 올라갈 거야?" 그랑고르 친구가 물었다.
"응." 소년은 굳게 대답하더니 또 그 길을 올라갔다.
이번에 소년은 서리 마법사 앞 눈밭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머리에 둘러 추위를 막아주던 모피를 풀고 보송보송한 눈으로 얼굴을 덮었다. "마법사님." 덮인 눈으로 소년은 웅얼거리며 말했다. "마법사님 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읽어서 알아요. 제가 같은 운명이 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라임은 소년을 무시하고는 자기 일과를 계속 이어갔다. 마법사는 덫과 함정에서 일용할 양식을 모으고 먹고 낮잠을 자기까지 하며 하루를 보냈다. 어느 덫 해질녘. 라임은 소년의 어깨를 툭툭 걷어찼다. "얼어 죽고 싶은 게야?" 나이가 들어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라임은 쩌렁쩌렁 소리를 질러댔다. "멍청한 녀석, 들어와!"
그가 사냥한 그랑고르의 가죽과 송곳니로 만들어진 천막 안에서 라임은 소년의 재잘거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름이 뭐냐!"
"사무엘입니다."
"추잡한 그랑고르 녀석들과 어울리는 거냐?"
사무엘은 바짝 긴장해 어깨를 움츠렸다. "그랑고르 사람들은..."
"... 사람이 아니지. 그 녀석들의 시험을 통과한 것과 그 녀석들과 진정으로 어울리는 것은 다른 얘기다. 그래, 솔직하게 네놈이 누군지 말해 봐라."
"전 기디안입니다. 마법사 길드에서 전투마법사의 석좌를 맡고 있는 대마법사 로라의 피를 이어받은 아들이고..."
"기디안 사람이자 그랑고르라..."
"원하신다면 제 조상의 10대손까지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 루시아 거리에서 빵을 최고로 바삭하게 굽는 게 누구더냐?"
사무엘의 기가 팍 죽었다. "네 살 때 트로스탄에 있는 집에 입양돼서 잘..."
"허허, 그럼 산 아랫마을에서 주제도 모르고 짖어대는 거리의 똥개보다도 기디안에 대해서 모르겠군." 라임은 껄껄 웃었다. "마력을 갖고 태어난 아이가 짐승같이 자랐구나. 하지만 기디안의 그 답이 없는 쇠고집에는 약도 없지."
"마법사님 아들도 마력의 자식이잖아요." 사무엘이 소리를 죽여 말했다.
"내 아들 녀석 꼴이 나기 싫으면 말이다." 라임이 눈을 감고 말했다. "기디안 마법 학교 최상급 반은 쳐다도 보지 말아라. 트로스탄의 수정을 싣고 나가는 배 갑판이나 닦으란 말이야. 훈훈한 릴리안 포도밭에나 가라고. 젠장, 괴물의 눈알이나 모으고 마법일랑 잊어라. 기디안도 잊고."
"하지만 제 어머닌..."
"... 널 원하지 않았던 게야. 아니라면 널 키웠겠지."
짙게 깔린 눈과 같은 정적이 천막 안을 가득 채웠다.
라임은 천막 문을 열더니 소년에게 말했다. "집으로 가라."
사무엘은 굳은 모습으로 밖으로 나와 얼굴에 모피를 다시 둘러썼다. 탁한 회색 하늘에 녹색과 붉은색 섬광이 번쩍거렸다.
"그리고 동이 트면 다시 와라!" 서리 마법사는 우렁차게 소리쳤다. 그제야 온종일의 등반과 노인과의 독대로 지친 소년의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었다.}}} |
16.2. 2장: 라이라[편집]
2장: 라이라 영웅 이야기 |
1편 '결자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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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스탄의 진흙 해변, 그랑로그 한 마리가 바람의 흐름을 가늠하고 있었다. 라이라와 라임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이제 유령 도시로 변해버린 트로스탄을 헤집고 다녔다. 푸른빛으로 빛나는 힘의 우물을 지나 빙벽에 난 소로를 따라 걸음을 내디뎠다. 산산 조각이 난 잔해, 죽음의 재를 뒤집어쓴 시체를 열심히 뒤져봐도 사무엘은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늙은 마법사는 라이라 뒤에서 풍성한 눈썹을 치켜뜨며 말했다. "라이라. 그대가 돌아가지 않는다 해도 뭐라 할 녀석은 아무도 없네."
라이라는 바로 대꾸했다. "전 기디안입니다.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흠흠..." 라임은 어색하게 말을 흐렸다.
"시간이 되었네요."
라이라의 말에 라임이 손을 앞으로 뻗자 손바닥에서 얼음 구체가 만들어졌다. 안 그래도 낮은 온도는 더욱 내려가 라이라의 팔에는 소름이 돋았다. 라임의 손가락으로부터는 얼음 줄기가 새어 나왔으며 그의 턱수염에는 고드름이 끼었다. 이윽고 지팡이에도 서리가 끼자 라임은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가 강하게 내리찍었다. 놀랍게도 그가 지팡이로 찍은 자리에는 거대한 얼음 기둥이 하늘 높이 솟아올라, 힘의 우물을 덮어버렸다.
"자네 차례네." 라임이 라이라를 재촉했다. "마력을 거두시게나."
라이라가 손을 펼치자 주문서가 휘리리릭 넘어갔다. 그녀가 고대의 주문을 외자 놀랍게도 트로스탄 전역에 펼쳐졌던 마법의 결계는 빛으로 화하여 책 속으로 흡수되었고, 멀리 칼 봉우리의 얼음 구름과 눈도 그 여파로 같이 요동쳤다. 몰아치는 눈보라가 슬픈 도시 종말을 새하얗게 채색했다.
모든 게 끝나고 라임과 라이라는 제일 마지막으로 트로스탄을 떠나는 배에 올랐다. 뱃머리에서 라이라는 주문책을 가슴에 꼭 안은 채, 그녀가 평생 일구어 놓은 대업적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일찍이 트로스탄은 일확천금을 노린 광부, 도적들 따위의 베이스캠프로 시작한 도시였다. 이후 라이라의 마법 결계에 보호를 받으며 그 세를 불려 나갔다. 그 후 안전한 정착지를 찾던 기디안들이 속속 도착했고 그들은 힘을 합쳐 탑, 동상, 농지, 그리고 무역로 등을 세우고 가꾸며 찬란하게 번성했다. 그리고 그 중심, 트로스탄의 위대한 마법탑에서 라이라는 이 모든 것을 굽어보았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 다 지나버린 과거의 영예일 뿐이다.
~
시계를 돌려 20년 전... 라이라는 그때도 쇄빙선의 뱃머리에서 이 도시를 지켜보았다. 당시 트로스탄은 소수의 개척민이 이제 막 정착을 시작한 촌 동네였다. 기디안 이주민들을 태워 나르는 거대한 쇄빙선이 앞장서서 만의 얼음을 육중한 몸체로 부수고 있었다. 잔인하도록 시린 북녘의 하늘과 무섭도록 시퍼런 바다 사이에서 트로스탄은 늑대무리에 둘러싸인 양처럼 언제 그 명을 다할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태였다.
하얀 법복을 걸친 점술사 라이라는 입술을 깨물며 새장에서 예식용 흰 비둘기들을 꺼내 하늘로 날려 보냈다. 쇄빙선 주위를 선회하던 비둘기들이 배의 돛대에 내려앉자 라이라는 바로 이것이 상서로운 징조라고 목성 높여 외쳤다. 이는 대가를 받고 거짓을 고하는 것이기에 그녀의 마음은 심히 편치 않았다. 하지만 이런 짜고 치는 희극이라도 쇄빙선 주위의 조막만한 작은 배에 나눠탄 하층민들에게는 절실했다. 미신에 쉽게 흔들리는 그들은 아마 라이라의 확답이 없었다면 결코 배에서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 마력을 가진 베인 수정이 발견되기 전이라, 칼 봉우리 근처는 굶주린 배를 채우려는 그랑고르 몇몇만이 어슬렁거릴 뿐이었다. 하층민들이 다시 기디안으로 돌아가 버리면 트로스탄은 영영 개척되지 못하리라. 이들이 먼저 정착해야 기디안 사회의 기술자들, 이를테면 건축가, 상인, 예술가, 부농, 조선업자, 학자들이 건너올 것이다.
트로스탄만에서 한차례 거짓부렁을 한 라이라는 망토를 여미고 칼 봉우리로 향했다. 붉은색 망토는 멋지긴 했지만 그녀가 눈에 젖는 것까지 막아주진 못했다. 겨울의 막바지, 봄의 초입의 칼 봉우리에는 대규모 진눈깨비가 언제나 찾아왔다. 방금 그녀의 '제국의 영광과 희망찬 미래'에 대한 연설도 흩날리는 진눈깨비 때문에 서둘러 끝마치지 않았던가.
이제껏 그 정도의 인파 앞에 선 적도, 하늘에 대해 거짓을 고한 적도 없었기에 라이라는 일찍 끝난 연설에 오히려 안도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지금부터 할 일이 차라리 실패했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실패를 관장하는 신이 있다면 나의 말을 들어 주길..." 그녀가 혼잣말했다.
"흠, 뭐라 그랬소?" 그랑고르 안내인이 그녀에게 물었다. 안내인은 털가죽으로 온몸을 꽁꽁 싸맨 초라한 행색이었다. 그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눈 폭풍 사이로 번뜩였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라이라가 답했다. "이런 날씨에 피차 고생이 많군."
"으하하! 뭐 하라면 해야지!" 넉넉한 배를 잡고 그랑고르가 통쾌하게 웃었다. 이후 목적지에 다다르자 라이라는 빛나는 빙하를 응시했다. 얼음의 대지에 오로지 그녀만이 서 있는 듯 했다. 라이라는 차디찬 공기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잠시 가슴에 머금었다. 그리고 안개와 같은 마법의 숨결을 내뱉으며 말했다. "암브로시우스" 그러자 그녀의 마법책이 허공으로 날아오르더니 그녀의 주위를 뱅글뱅글 돌았다. 라이라가 내뱉은 마법의 단어는 룬문자로 바뀌어 마법책에 차곡차곡 새겨졌다. 그리고 그녀가 이를 한 번 더 반복하자 그녀를 괴롭히던 진눈깨비가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증발했다. 눈에 젖어 축축해진 망토도 달아올라 새것처럼 빳빳해졌다. 라이라는 따사롭기 그지없는 훈훈한 기운을 양손에 모아 앞으로 쭉 뻗었다. 그러자 거기서 한 줄기 빛이 폭발처럼 튀어나와 트로스탄 전역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눈보라는 그렇게 생성된 마법 결계를 침범하지 못하고 결계 밖에서 부서져 내렸다. 정착민들은 이 믿을 수 없는 마법의 조화를 휘둥그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결계 한쪽 귀퉁이에서는 할시온의 힘을 간직한 위대한 빙하가 깨져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훗날 이 빙하가 녹은 물은 두 줄기 강으로 변해 트로스탄을 관통하며 도시의 젖줄 역할을 하게 된다.}}} |
2편 '첫 실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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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대단하군.' 라이라는 생각했다. 정착민들은 기디안어와 그랑고르어를 적절히 섞어, 상당히 그럴듯한 새로운 말을 창조해 냈다. 다양한 인종이 섞이는 트로스탄 항구에서 제대로 일을 하려면 이들의 말을 반드시 할 줄 알아야 했다. '뭐, 음을 내는 과정에서 목을 지나치게 긁는 것 같긴 하지만 말이야.' </br> </br> 고작 5년 전이었다. 라이라가 위대한 마법의 결계를 생성하고 빙하를 녹여서 강을 만든 것은. 그런데 벌써 트로스탄 개척지는 몰라볼 정도로 성장했다. 항구 근처의 여관은 마법 수정의 힘을 노리는 탐험가들로 북새통이었으며, 그들로부터 거둬들이는 세금도 짭짤했다. 짐과 승객을 실어나르는 배들도 항구를 끊임없이 들락거렸다.
그랑고르 안내인을 대동한 채 항구에 서 있는 라이라 앞으로 일단의 장정들이 다가왔다. 고풍스러운 무구, 황금빛 망토. 기디안 정예병들이다. 라이라는 기디안 특유의 손인사를 건네고는 그들 중에서 가장 화려한 복장을 한 자 앞으로 나가았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은 소년을 발견하고는 눈썹을 추켜올렸다. "트로스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장군. 하지만 의외로군요. 제 후임은 당연히 강력한 힘을 가진 마법사인 줄 알았는데요. 트로스탄을 지탱하는 마법의 힘은 노도와 같아서 다루기 쉽지 않답니다."
"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부인. 부인의 후임은 실제로 마법사입니다." 장군은 잡은 손을 앞으로 뻗어 소년을 라이라 앞으로 살며시 밀었다. "대법사 로라 님이 아이와 함께 이 말을 꼭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라이라는 뜻밖이라는 듯 눈을 크게 뜨고는 소년을 살펴보았다. 멋들러진 칠흑 망토는 소년의 작은 몸집으로 지탱하기엔 너무 커 보였고,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렇군요. 그래, 로라가 무슨 말을 하던가요?"
"전투 마법사 라이라에게 고한다." 장군은 목청을 가다듬고 대마법사의 말을 전했다. "기디아의 마법사 길드는 그대에게 대법사이자 순혈인 로라와 학자이자 순혈인 타이터스의 아들, 사무엘을 보낸다. 그대는 사무엘이 성년이 될 때까지 잘 지도 감독하여 트로스탄의 차기 총독으로 키워내도록 하라."
"흠, 이건 뭐 하는 뭔가?" 그랑고르 안내인이 물었다.
"기디아의 정치질이라고 하지." 라이라가 무뚝뚝하게 답했다. "아니면 별 쓸데없는 농담이거나."
그랑고르는 허리를 굽혀 소년에게 인사했다. "안녕 샘. 나이가 얼마인가?"
아이는 조막만 한 손을 들어 손가락 네 개를 폈다.
"네 번의 겨울을 지냈구나. 정말 잘하구먼!" 그랑고르는 미소 지으며 사무엘의 머리를 토닥였다.
"로라... 그녀는 내 능력이 무서워 날 이 오지에 처박았지. 그게 벌써 십 년도 더 되었군." 라이라가 냉소지으며 말했다. "두려움이 아직도 그녈 사로잡고 있구나."
"트로스탄의 중앙에 마법사의 탑이 있어. 꼬마의 짐은 그곳에 푸는 게 좋겠군." 그랑고르가 아이를 들어 올리더니 어깨에 태우고는 말했다. 한 무리가 되어 천천히 걸어가는 병사들과 그랑고르 그리고 사무엘의 뒤를 보며 라이라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본다.
~
기디아의 마법사 탑. 라이라는 자신의 거처에 있는 침대에 누워 밖을 내다보았다. 칼날 만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창문의 커튼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당시 트로스탄은 오랜 전쟁에 지친 기디아인들에게는 신천지로 받아들여졌다. 생각보다 더 쌀쌀한 바람에 라이라는 추위를 느끼고는 타이터스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나 안아줘." 라이라가 보챘다. "춥단 말이야." 타이터스는 그녀를 안아주는 대신 간질였고 라이라는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이거 놔. 자긴 별로 안 춥나 보네. 됐어, 차나 한 잔 내올게."
라이라를 놓아준 타이터스는 침대 옆 간이 탁자에서 봉인된 편지를 슬쩍 집어 들었다. "우리 무서운 마법사님. 빠져나가려면 날 두꺼비 따위로 만들지 그랬어?"
"무슨 소리야." 라이라는 따스한 입맞춤을 하며 말했다. "난 자길 믿는다구."
"그건... 실수하는 거 같은데." 타이터스가 그녀에게 편지를 흔들며 말했다. "대법사에게서 온 거야. 정말 중요한 내용이 담겨있더군."
"대마법사? 무슨 용무일까." 라이라는 타이터스의 몸에서 나는 백단향의 체취를 맡으며 물었다. "그리고 그 편지는 대체 뭐야."
"시종이 아침 식사와 함께 전달해 줬지."
"아 뭐야. 내 꺼면 내가 열어야지."
타이터스는 라이라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편지를 빼며 말했다. "전투 마법사 라이라에게 고한다. 어쩌고 저쩌고... 그리하여 트로스탄 정착지 개척을 위해 그대를 즉시 칼 봉우리로 파견하는 바이다."
"뭐야. 날 칼 봉우리로 보낸다고?" 라이라가 편지를 뺏으려 했지만 타이터스 손에 꼭 쥔 채 내주지 않았다.
"추신. 학자 타이터스와의 혼인 신고는 따라서 기각하는 바이다. 대신 타이터스는..."
타이터스가 한눈판 사이 라이라는 잽싸게 그의 손에서 편지를 낚아채고 읽었다. "순혈 마법사 로라와 평생을 함께하라." 라이라는 순간 자제심을 잃고 떠들어댔다. "이건 분명 누군가의 행정 실수야. 어떤 바보가 내 이름과 로라의 이름을 착각한 게 분명해. 예전에도 이런 적 있었다니까."
"자긴... 순혈이 아니잖아." 타이터스가 라이라를 살포시 안으며 말했다.. "어쩌면 내 결혼은 이렇게 예정된 것일 수도 있어. 마탑이 원하는 건..."
"순수 혈통의 아이지." 그녀가 씹어 뱉듯 말했다. "하지만 그 전에 난 모든 걸 완벽하게 처리했어. 절차상 그 어떤 문제도 없었다고!" 그리고 라이라는 타이터스의 귀에 입술을 대고는 조심스레 속삭였다. "마탑의 결정을 우리가 따를 필요는 없어. 도망치자. 타이젠 관문을 넘어 멀리 도망가서 농사나 짓고 사는 거야."
"라이라... 자긴 어렸을 때부터 마탑의 기대를 한몸에 받은 유망주야. 나와의 결혼 때문에 자기가 쌓아온 모든 걸 잃게 둘 순 없어." 타이터스는 라이라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향기를 맡으며 말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건 기디아의 안녕과 발전이야." 차마 그를 반박하지 못한 라이라는 정인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는 흐느꼈다.}}} |
16.3. 3장: 랜스[편집]
3장: 랜스 영웅 이야기 |
1편 '아르케론 사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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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은 섬의 구석에 있는 한 방에서, 홀쭉한 뺨에 우울한 차림새를 하고 길을 나섰다. 그의 옆으로 섬의 원주민들이 낮의 땡볕 더위를 피해 휴식을 취하는 해먹이 보였다. 원주민들은 해먹 위에서 삼삼오오 모여 잠을 자거나 칭얼대는 아이들을 어르곤 했다. 저 멀리에는 한가로이 풀을 뜯어 먹는 염소무리도 보였다. 하늘 높이 시원스레 뻗은 야자수 나무나 만발한 꽃들 사이로 부지런히 오가는 꿀벌을 보면, 과연 이곳이 섬이 맞는지 의심이 갔다. 이 섬은 바로 대양의 유람자 아르케론, 거대한 고대 거북의 등껍질인 것이다!
까무잡잡하게 탄 섬의 아이들은 파도가 만든 웅덩이에서 맨발로 뛰어 놀았다. 아이들은 조개, 굴, 말미잘, 불가사리 따위를 가지고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영특해 보이는 꼬마 하나가 능숙하게 성게의 내장과 속살을 빼서 입에 털어넣었다. 그보다 더 나이가 많은 아이들은 자신의 머리보다 더 큰 알이 들어있는 바다새의 둥지를 털어먹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사무엘은 그 사이로 미끄러운 물이끼를 밟고 넘어지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전진했다.
이윽고 섬의 가장 고지대에 가까워지자 사무엘의 굶주린 위장을 사정없이 자극하는 맛있는 음식 냄새가 났다. 원주민들은 공터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어른들은 뜨거운 석탄 위에서 생선을 굽고 있었고, 아이들은 구울 해산물을 가져오거나 해조류를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바삭바삭 익어가는 커다란 물고기의 배에는 섬에서 나는 과일과 향료가 듬뿍 들어있었다.
"피할 곳을 찾게나 아가씨들. 비구름이 몰려오는군." 사무엘의 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이내 여인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아, 누군가 했더니 사무엘이 아닌가. 어서 오시게."
벚꽃이 흩날리는 나무 아래엔 키 큰 남성 하나와 여인 둘이 음식 바구니 앞에 앉아 있었고, 세 명 모두 무릎까지 오는 특이한 긴 옷을 입고 있었다. 남자는 다리를 꼬고 앉은 여인의 손톱에 물을 들이고 있었고, 다른 여자 하나는 남자의 머리카락을 날카로운 칼로 다듬고 있었다.
사무엘은 그들이 앉아있는 그늘 반 발짝 앞에서 어색하게 멈춰 섰다. "흠. 그쪽이 누구신지 모르겠습니다만..."
"겁낼 것 없어. 나는 랜스라고 한다네." 남자가 말했다. 랜스의 머리카락을 다듬던 여자는 그의 귀 뒷머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꿀과 치즈를 들게. 기분이 한결 나아질 거야."
"오늘은 식사를 하지 않습니다." 사무엘 말했다.
"어디 아픈 건가요?" 머리카락을 다듬던 여자가 날카로운 면도날을 든 채 물었다.
“아닙니다.” 사무엘이 대답했다. “단식일이라 그렇습니다. 단식은 힘을 기르고 정신을 또렷하게 하지요.”
"이 같은 만찬이 앞으로 얼마나 있을 것 같나!" 랜스가 탄식했다. "이런 아리따운 여성의 손가락에 뭍은 꿀을 핥을 수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축복이지!"
놀란 사무엘의 눈에 손톱에 물을 들인 여인이 짓궂은 미소를 지은 채 꿀단지에 손가락을 넣은 게 보였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최대한 숨기며 사무엘은 물었다. "그녀들은... 당신의 아내가 아닙니까?"
"사람은 누구의 소유물이 아니라네." 랜스가 답했다.
"그럼... 저들도 당신의 아이들이 아니란 말이고요?" 사무엘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이들은 모두가 보듬어야 하는 존재예요. 아이들의 순수함은 우리의 영혼을 살찌게 하죠." 여인이 날카로운 면도칼을 집어넣자, 벚나무 가지에서 아이 하나가 내려와 랜스의 어깨에 앉았다. "하하하 샘! 우리의 성의를 거절할 셈이오? 오늘은 당신의 그 단식이란 걸 깨도록 하시오."
"전 샘이 아니라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이 약간은 퉁명스레 대꾸했지만 랜스의 제안을 거절하진 못했다. 그는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바구니에 생선을 조금 덜고는 먹기 시작했다. 잘 익은 생선은 뼈째 씹히며 고소한 맛이 났다. 사방에서 귀여운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고 일부는 사무엘의 다리를 잡고 꺄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모두가 배부르게 먹은 뒤 일행은 섬 가장자리의 오솔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얕은 너울에서 바다 트롤이 물개를 사냥하고 있었다. 트롤의 물개 사냥법은 특이했는데 먼저 튼튼한 팔로 물개의 목을 꽉 조인 채 물에서 한참 동안 두었다. 이후 숨을 못 쉬어 기진맥진한 물개를 물에서 꺼내고는 튼튼하고 거대한 턱으로 숨통을 끊어놓았다.
"아이들이 보기에... 좀 잔인한 장면이지 않습니까?" 사무엘이 걱정하며 물었다.
랜스는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사무엘의 경직된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올리고는 말했다. "바다 트롤은 일 년에 한 번 알을 낳으러 해변으로 오지. 그리고 우리는 이들은 보살펴 준다네. 그 보상으로 바다 트롤은 아르케론의 연약한 복부를 포악한 바다 생물로부터 보호해 주지. 하하. 녀석들 격렬하구먼."
섬의 가장자리, 항구에 늘어선 바지선의 끝자락에 있는 공터에서 원주민 남성들이 바다 트롤들의 머리에 안장을 올렸다. 이들은 대나무 갑옷과 방패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등나무 장창 꼬나쥐고 있었다. 격렬한 마상창시합이 벌어지는 순간이다! 남자들은 바다 트롤의 목에 올라타고 상대방을 향해 돌진했으며, 이내 장창과 방패가 부딪혀 굉장한 소리를 냈다. 부서진 대나무 파편이 뜨거운 햇볕을 수놓았다. 이 격렬한 바다 사나이들 중 으뜸은 랜스였다. 그는 정말 타고난 장창수로, 안장에서 자유자재로 위치를 바꾸며 장창을 사용해 상대방을 족족 떨어뜨렸다. 랜스가 득의양양한 승리의 미소를 지으면, 그가 탄 트롤은 기쁨의 포효를 내질렀다.
이윽고 창시합이 끝난 뒤 사무엘과 랜스는 함께 밤하늘의 달을 바라보았다. "이곳이 바로 우리의 고향이라네. 어떤가?" 랜스가 물었다.
"언젠간...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사무엘이 답했다. "거대 거북 아르케론이 언제까지나 살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아르케론의 등껍질에 새겨진 나이테로 볼 때, 이 위대한 거북은 기천 년을 살아왔지. 아직도 대양의 그 어떤 거센 파도도 그의 앞길을 막지 못한다네."
"하지만 살아있는 모든 것은 언제가 죽는 법이고 그것이 그것은 만고의 진리잖습니까."
"믿음을 가지게나 친구여." 랜스가 사무엘의 기운을 북돋워 주며 말했다.
"비록 만물에 정답이란 있을 수 없지만," "진실한 믿음은 분명 가치 있는 것이지."}}} |
2편 '기디안의 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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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이 섬에서 머문 지도 어언 한 달. 그리고 오늘이 그 마지막 날이었다. 랜스는, 그가 물속에 뛰어들어 거대 거북 아르케론의 눈을 보려고 하는 모습을 해변에서 지켜보았다. 문득 랜스의 머릿속에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옛날 그도 같은 시험을 치른 적이 있었다. 작디작은 존재인 인간을 응시하는 눈... 사람의 키보다도 더 큰 눈동자... 랜스의 상념은 사무엘이 물 밖으로 나와 내뱉는 기침 소리에 끊겼다. 랜스는 그의 등을 두드리며 물었다. "고생했네. 아르케론의 눈을 보았는가?"
"예 보았습니다." 겨우 숨을 진정하며 사무엘이 답했다.
"위대한 거북이 뭐라고 하던가?"
사무엘의 미간이 좁아졌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거북이가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저런 아니야. 아르케론의 말은 가슴으로 들어야 한다네."
"다시 말씀드리죠. 가슴으로도 그 거북의 말을 못 알아들었습니다"
"흐음... 알았어. 뭐 그래도 아르케론과 당당히 마주했으니 이제 자네도 자격이 있지." 그리고 랜스는 사무엘을 데리고 해변 주위를 걸었다. 이따금 수면 밖으로 머리를 내민 바다 트롤이 재롱을 부리자 랜스는 트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르케론의 덩치는 너무나도 커서 칼날만을 통과할 수 없네. 따라서 내가 기디안 도시까지 바지선으로 데려다주지." 그리고 랜스는 놀랍게도 다음 문장을 기디안어로 말했다. "우리의 운명은 결국 하나일지니."
"흠. 그 말을 아르케론 인에게서 들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습니다." 약간 퉁명스럽게 사무엘도 기디안어로 대꾸했다. 바지선이 대 있는 항만 근처에는 섬의 아이들이 잠수하며 진주조개를 낚아 올리고 있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자맥질을 하는 아이들 손에는 조개를 잡을 그물이 쥐어져 있었다.
랜스는 사무엘을 이끌고 바지선 중 하나의 선실에 도착했다. "오래전 내가 어렸을 때, 자네 같은 기디안 한 명이 이 아르케론에 왔지. 그는 생에 마지막으로 드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 했어. 아무렴.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훌륭한 기사였지."
"그럼 저와는 하늘과 땅 차이군요." 사무엘이 빈정댔다.
"그는 나한테 창과 방패를 다루는 법과 용기, 자비, 규율, 정의, 명예, 충성, 예의. 이런 기사도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쳐 줬어." 랜스의 눈동자가 기쁨으로 빛났다. "그리고 기디안 도시의 유구한 음악과 열정, 나아가 영혼을 취하게 하는 아름다움까지도 말해 줬다네."
"흥. 그 잘난 분께서는 전쟁, 부정, 부패 같은 현실적인 것들은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까?"
"뭐 자네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 이 세상엔 바로잡을 게 많긴 해. 그리고 세상을 바로잡으려면 아르케론의 등 위에서만 있으면 안 돼. 여길 보게. 그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날 때 내가 물려받은 거네." 랜스가 선실의 초를 켜자 따뜻한 공기와 함께 은은한 빛이 선실 바닥에서 흘러나왔다. 랜스는 바닥 밑을 뒤져 갑옷과 방패 그리고 장창을 꺼냈다. "그때부터 난 평생 기디안의 유물에 매료되어 살았지."
랜스는 방패를 들어 올려 사무엘에게 보여주려 했지만, 사무엘의 관심사는 무기가 아니었다. 그의 눈은 잘 정돈된 주방 도구, 나뭇가지 모양의 촛대, 고대의 지도, 깃털로 장식된 축제 가면, 사자 머리 모양의 놋쇠 문고리 등을 훑고 있었다. 그는 그중 녹슨 반찬 통 하나를 꺼내 들고는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아름다운 방패군요. 그런데 방패 표면에 상처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 잘나신 기사님은 싸움은 별로 안 하셨나 보군요."
"전투가 기사의 모든 건 아닐세." 랜스가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분명 내 목숨을 바쳐 기디안인을 지키겠다고 맹세했어. 그 고귀한 맹세만으로도 기사의 자격은 충분한 법이야."
"그러니까 전 당신의 보호는 필요 없습니다." 사무엘이 반찬 통을 내던지며 말했다. "전 당신의 꿈속에서나 나오는 그런 멋진 기디안 기사가 아닙니다. 더구나 네 살 이후로는 도시에는 가보지도 못했습니다."
"자넨 예전 그 사람의 판박이야. 난 알 수 있다네."
"당신이 저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러십니까? 그리고 기디아에 대해선 뭘 아시죠? 당신이 그렇게 열심히 배운 건 다 의미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보다 루시아 거리에서 어느 가게가 가장 맛난 빵을 굽는가 등이 훨씬 가치 있는 정보입니다." 사무엘은 먼지 쌓인 책을 하나 집어 들더니 책장을 빠르게 넘기며 말했다. "기사도는 그냥 오래된 가문들이 기우는 가세와 재물을 지키려 꾸며낸 거에요. 당신의 그 대단하신 정의, 정직, 예의... 이런 것들 따위와는 저 밤하늘의 별 만큼이나 떨어져 있다고요."
랜스는 부드럽게 아이를 타이르는 아버지처럼 말했다. "사무엘. 그 가치들은 내 모든 것일세. 알겠나?"
그래서 첫 동이 틀 때 즈음 사무엘은 랜스의 바지선에 검은 망토를 눌러쓰고 불편하게 앉아있었다. 완전 무장한 랜스는 과히 기디안의 기사란 말이 아깝지 않을 만큼 멋진 모습이었다. 그는 바다 트롤들을 능숙하게 다루며 도시의 항구로 향했다. 도시가 가까워지자 아침 햇살이 내리쬐며 도시의 분수, 조각상, 첨탑, 물레방아간 등을 장밋빛으로 물들였다. 걷히는 아침 안개 사이로 그 광경을 본 랜스는 말문이 막혔다. 그의 큰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이윽고 바지선은 도시의 항구에 도착했다. 항구는 도시로 들어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배들과 인파로 북새통이었다.
사무엘은 랜스의 거대한 갑옷 뒤에 숨어 어색하게 바지선에서 내렸다. 랜스는 손을 들어 항구의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으나, 모든 이들의 눈은 랜스 뒤의 젊은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윽고 군중 속에서 손에 반지를 낀 비단옷을 입은 여인이 앞으로 나섰다. 환영의 뜻으로 손바닥을 앞으로 편 그녀의 입에서 인사가 흘러나왔다. "집에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 사무엘. 네가 잘못된 건 아닌지 가슴 졸였단다." "예 어머니." 사무엘이 답했다.}}} |
16.4. 4장: 사무엘[편집]
4장: 사무엘 영웅 이야기 |
1편 '악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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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사무엘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라이라가 사무엘이 걸어놓은 그랑고르풍 머리 장식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무엘은 눈이 녹아 물이 뚝뚝 떨어지는 외투를 바닥에 팽개치고는 정리정돈이 안 된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런. 또 지루한 강의를 하러 오셨나요?" 그는 한쪽 팔로 얼굴을 가리고는 투덜댔다. "이번 주제는 뭐죠? 마력의 안정? 아니면 명령에의 복종?"
라이라는 펼쳐진 책, 지도, 종이 따위로 어질러진 난장판을 지나, 거대한 바다사자의 골격을 피해 사무엘 옆으로 다가왔다. 일찍이 사무엘은 그랑고르 종족의 사냥 의식에서 바다사자를 잡은 적이 있었다. "대체 이 거대한 녀석으로 뭘 한 거니? 설마 잡아먹은 거야?"
"사냥 의식에 참여한 그랑고르 부족과 함께 나눠 먹었어요. 전 오른쪽 지느러미, 족장은 왼쪽 걸 먹었죠."
라이라는 몸서리치며 말을 이었다. "방 청소 좀 해야겠구나 얘야. 침대 위에 거미줄이 그대로 있구나."
"조심하세요. 이 녀석은 특별한 잠거미예요. 꿈을 먹고 그 꿈을 거미줄로 짜는 능력이 있죠. 전 연옥에서 녀석을 가져왔어요."
라이라의 눈이 순간 분노로 타올랐다.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연옥에 관계하지 말라고. 그곳의 악몽과 악령은..."
"하지만 꿈과 유령과 발키리도 있죠. 라임 할아버지에 의하면..."
"이런, 그 망령든 늙은이와 아직도 어울려 다니느냐? 이번 주 내내 그자와 있었어?"
사무엘은 여전히 한쪽 팔로 눈을 가린 채 큭큭 웃었다. "그래서 뭐 어쨌단 거죠. 저한테 실망이라도 하셨나요. 이미 전 사부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건 포기했다구요. 사부님의 사전에 행복이라는 단어가 있긴 한지 궁금하군요."
"젊은이의 치기 치곤 말이 심하구나."
"항상 그렇게 또 나에게 강의하시죠." 사무엘이 과장되게 하품하며 비꼬았다.
라이라는 혀를 차고는 지긋이 사무엘을 바라보다 말했다. "아니. 지금 강의를 할 사람은 내가 아니고 기디안의 대마법사란다." 그리고 그녀는 침대 위에 작지만 무거운 보이는 강철 기계를 내려놓았다. 사무엘은 기계를 곁눈질했다.
"이게 뭐하는 장치죠?"
"이건 갓 트로스탄에 도착했단다. 기디안의 마탑에서 드디어 홀로그램을 활용할 수 있게 되었더구나. 모든 게 이곳 트로스타니아에서 출토된 강화 수정 덕분이지. 몽릴에서는 이런 홀로그램 전언을 수년 전부터 이용하곤 했어."
"... 캠페스트리아에서는 더 오래 되었어요." 사무엘은 이제 침대에 바로 앉아 장치를 요리조리 살피기 시작했다.
"이것도 일종의 진보라면 진보라 할 수 있지. 트로스탄에서 우리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던 거야."
"뭐 어쨌든요. 그럼 대마법사께서 내놓은 자식놈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확인해보죠."
"사무엘." 라이라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양쪽 다 이런 감정 표현에 익숙하지 않아 순간 어색함이 흘렀다. "내 생각에 어쩌면 이 전언은..."
"걱정마세요 사부님. 이제 전 예전에 엄마 꽁무니만 따라다니며 한 줌의 애정이라도 갈구하던 애가 아니에요, 14년간이나 나 몰라라 한 여자에게 흔들릴 만큼 전 약하지 않아요" 사무엘이 코웃음 쳤다. "라임 할아버지가 그러더군요. 날 보면 야생의 들개가 떠오른다고요."
라이라는 그 말을 듣고 차마 뭐라 위로하지 못하고 그저 장치를 바라만 보았다. 흘러내린 풍성한 머리칼이 다행히 그녀의 표정을 가려주었다. 사무엘이 장치의 단추를 누르자 장치가 파란색으로 변하고 윙윙 울리더니 이내 여성의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기억에는 특별히 남아있지 않았지만 사무엘은 분위기로 확신할 수 있었다. 바로 기디안 대마법사의 얼굴이었다.
"사무엘." 잡음과 함께 홀로그램으로부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법사 라이라가 너의 진도에 대해 나한테 말해주었다. 아홉 번의 시련을 무사히 통과했다고 하더구나. 네가 자랑스럽다. 기디아의 마법사 길드는 네가 열 번째 시련도 무사히 통과하리라 기대하고 있다. 최종 시련을 마치면 고향으로 돌아와 길드에 정식으로 가입할 수 있을 게다. 마법사 라이라가 잘 이끌어 줄 것이라 믿는다."
홀로그램은 여기서 잠시 쉬더니 곧 말을 이었다.
"길드에서 정식 지위를 받은 뒤, 난 널 트로스탄의 총독에 임명할 예정이다. 그럼 총독의 명으로 그랑로그 종족을 지금보다 더 외곽지대에 살게 하거라. 그 조치로 칼 봉우리에서 우리의 세 확장과 수정 광산 개발이 더 수월해질 거다. 너와 그랑고르 종족의 끈끈한 유대가 그래서 중요하다. 모든 걸 마치면 편안한 마음으로 다시 고향에 돌아올 수 있을 거야."
"아들아. 우리 길드, 우리 제국의 운명이 너의 양어깨에 달려있다. 너의 도움으로 기디아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것이다."
굳은 표정을 마지막으로 홀로그램은 픽하고 사라졌다. 사무엘은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으로 기계장치를 바라보았다. "그랑고르인들을 트로스탄의 외각으로 이주시키라고..." 그가 씩씩댔다. "빌어먹을. 어머니는 그랑고르인을 하나라도 만나보고 저런 소리를 하는 건가?"
라이라가 주위를 환기하려 긴 소매 사이로 박수를 쳤다. "뭐 필요하다면 어쩔 수..."
"아뇨. 그랑고르는 트로스탄을 버리지 않을 겁니다. 난 연옥에서 똑똑히 보았어요. 그네들의 영혼은 바로 이 땅과 함께 살아왔고 앞으로도 함께할 거라고요."
"마치 자신이 그랑고르인 것 마냥 말하는구나." 라이라가 지적했다.
사무엘이 침대에서 일어나 방 안을 서성이며 말했다. "이는 사실상 그들 모두를 죽이는 조치입니다. 어머니는 그랑고르 종족 전체의 멸망을 요구하고 있어요.
"넌 기디아인이다."
그 말에 사무엘은 휙 돌아서서 라이라를 노려보았다. "정말 어이가 없군요. 이 말도 안 되는 명령을 제가 따르리라 보나요?" 거칠게 시작한 그의 말은 이윽고 천둥이 되어 방 전체를 울렸다. 놀랍게도 그의 목소리는 어둠의 힘이 넘실대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어둠녘 구체로 변해 그와 라이라를 둘러쌓다.
구체 안에 흐르는 끔찍한 악몽의 기운. 라이라는 맹세코 사무엘에게 이런 사악한 마법을 가르친 적이 없었다. 그녀가 손을 내밀며 비명을 지르려는 순간, 라이라는 헉 소리와 함께 악몽에서 깼다. 대체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는 혼란한 정신을 뒤로하고, 그녀는 보호의 성역을 시전하여 어둠의 기운을 몰아냈다. 침대 머리맡에는 잠거미가 거미줄로 집을 짓고 있었고, 그 모양은 불타고 있는 트로스탄의 형상을 묘하게 닮아갔다.}}} |
2편 '시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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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깃털 장식을 한 거대새들이 가마를 끌고 기디안 거리를 달렸다. 제일 선두의 대마법사의 가마, 두 번째의 라이라와 라임의 가마, 마지막으로 랜스와 사무엘이 탄 가마가 행렬을 이뤘다. 랜스는 굳이 마지막 가마에 사무엘과 함께 타기를 고집했다. 가마의 커튼 사이로 기디아 시내의 풍경이 스쳐지나갔다. 도시를 둘러싼 거대한 흑요석 장벽을 따라 정찰 망루와 병사 훈련소가 산재해 있었다. 그보다 안쪽의 도심 구역에는 어두운색의 행정탑, 온갖 측량 장비가 마당에 놓여 있는 지도제작자탑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법사탑이 서 있었다. 기디아의 상징인 마탑은 다른 탑들보다 적어도 수십 미터는 높게 솟아 도시를 굽어보았다. 탑의 층마다 난간에는 역대 대마법사의 황금 조각상이 장식되어 있었고, 이들은 모두 '선'이라 불리는 고대의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사무엘은 자신을 노려보는듯한 조각상들을 외면하고 마탑의 대강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익숙지 않은 매캐한 마법의 향기가 공기 중에 가득했다. 라이라와 라임은 사무엘을 따라가려는 랜스를 막아섰다. 여기서부터는 그 혼자서 가야한다.
대강당으로 향하는 통로에는 흑요석으로 만들어진 기둥들이 서 있었고, 통로의 끝에는 두 개의 크고 작은 석단이 놓여 있었다. 사무엘은 작은 석단 위에 올라섰다. 높은 쪽 연단에는 마법 길드의 고위 마법사들이 근엄한 표정으로 자리했고 가장 선두에는 대마법사가 그를 내려보고 있었다. 어두운색 장식이 수놓아진 법복을 입은 대마법사. 이윽고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순수 마법사의 혈통을 지닌 사무엘." 끈끈한 목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그대의 열 번째 시험이 이제 시작되었도다. 통과한다면 그대는 마법사 길드에 정식으로 들어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팡이 '선'을 앞으로 내밀었다. "만만의 준비를 하였으리라 믿는다."
사무엘은 허리띠에서 지팡이 '악'을 꺼내며 물었다. "그래서... 제가 당신에게 불복종한 것은 추궁하지 않는 겁니까? 기디아의 희망, 트로스탄을 파괴한 것에 대해서 따져 묻지 않으시나요? 아니면 자신의 그 고귀한 혈통이 이런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인정하기 싫은 겁니까?" 사무엘이 지팡이를 움켜쥐며 쏘아붙였다.
순간, 선에서 한줄기 광선이 사무엘의 뒤로 날아갔고 곧 지독한 고통이 그를 엄습했다. 배를 움켜쥐며 인상을 찌푸린 채 미지의 공격자를 바라보는 사무엘. 그곳에는 자신과 똑 닮은 어둠이 일렁이고 있었다. 이딴 것을 두고 시험이라니... 이건 배신이다! 사무엘이 미처 분노하기도 전에 그의 그림자가 다시 공격해왔다.
~
랜스의 돌격은 빛나는 녹색 벽에 막혔다.
"모든 행동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라네." 라이라가 말했다.
옆에서는 라임이 무표정한 얼굴로 싸움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표정과는 다르게 그의 손은 하얘질 정도로 지팡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
급류가 흐르는듯한 소리가 사무엘의 귀를 강타했다. 그가 오른쪽으로 피하자 그림자도 바로 따라붙었다. 그림자가 쏜 섬광이 사무엘의 왼발에 맞았고 그는 이를 악물며 힘의 단어를 읊조렸다. 사무엘의 지팡이에서 튀어나간 마법 광선이 간발의 차로 그림자를 스치고 지나갔다. 공격이 실패한 것을 본 사무엘은 힘의 단어을 한 번 더 외쳤다. "우루즈!" 안타깝게도 이번에도 광선은 그림자를 맞추지 못했다. 이제 거꾸로 사무엘이 공격받을 차례. 그림자가 살인 광선을 뿌리자 사무엘은 어둠의 마법으로 응대했다. 대강당은 둘의 싸움으로 뜨겁게 달아올랐고 사무엘은 노력했지만 자신의 그림자를 제압하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림자에겐 불가능한 게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임기응변.
사무엘은 우측으로 뛰어나가는 척하다가 잽싸게 뒤로 물러서며 근처의 기둥으로 향했다. 그리고 기둥에 새겨져 있는 사자 머리 조각상의 송곳니를 꽉 움켜쥐고 제비를 넘으며 순식간에 조각상 머리 위로 올라갔다.
"케나즈!" 사무엘이 다시 외치자 일순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고 그 흐름을 타고 수백, 수천의 고대 마법사 영혼들이 대강당을 맴돌았다. 어둠이 사무엘을 삼키는 그 순간 그는 다시 지상으로 뛰어내리며 악을 크게 휘둘렀고 마법의 화살은 그림자를 직격했다.
단말마와 함께 그림자가 사라진 자리. 사무엘은 지옥의 마왕처럼 혼돈을 거느린 채 당당히 섰다. 연단 위에서는 대마법사가 선을 다시 뻗었다.
"쿡쿡. 눈 가리고 아웅이라... 이건 허울뿐인 시험에 불과해. 실제로는 처형이라고." 사무엘이 가쁜 숨을 내쉬며 비꼬았다. "이 방법으로 라임 스승님의 아들도 죽였지? 당신은 그냥 말 잘 듣는 꼭두각시가 필요할 뿐이야!"
"아직 시험은 끝나지 않았다." 대마법사가 말했다. "집중하거라."
두 번째 그림자가 선에서 튀어나오며 사무엘 등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빠르게 거리를 벌리는 사무엘의 손에는 악이 칼처럼 쥐어져 있었고, 타오르는 눈동자로 상대를 노려봤다.
하지만 그는 곧 화들짝 놀라 탄성을 내질렀다. 그곳에는 공포에 사로잡힌 조그마한 아이가 서 있었고, 그 모습은 그가 14년 전 처음 트로스탄에 도착했을 때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었다. 지팡이 악은 그의 작은 손아귀로 쥐기에는 너무나도 커 보였다.
"이게 뭐하는 수작이야." 사무엘은 분노했다. "나의 현재 그리고 나의 과거. 다음에는 미래의 나이든 나라도 상대하라는 거냐?"
"일단 이번 관문을 통과하고 보지." 대법사가 무심히 말했다. "실패하면 그다음도 없을 거다."
그림자 소년의 지팡이에서 마법의 화살이 날아들었지만 사무엘은 그런 어설픈 공격 따위는 쉽게 피해버렸다. 익숙하지 않은 손놀림으로 지팡이를 휘두르는 소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실패... 실패라. 좋아, 그리해 주지." 그리고 사무엘은 해골 형상의 악령을 소환했다. 소환된 악령은 그림자 소년뿐만 아니라 연단의 마법사들까지도 깊은 잠에 빠뜨렸고 이는 대마법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
녹색으로 빛나던 벽이 사라지고, 일렁이는 차원문이 랜스의 발치에 나타났다.
"뭘 망설이는 거야." 라이라가 재촉했다. "어서 가라고!"
~
사무엘은 높이 뛰어오르며 추락하는 대마법사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지상에 착지한 그는 혼미한 상태의 대마법사의 손에서 지팡이 선을 빼앗았다. 그리고 그녀를 노려보며 윽박질렀다. "그녀는 어디에 있나!"
"누, 누구를 말하는 거냐?"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대마법사가 더듬댔다.
"기디아의 소녀." 사무엘이 대법사를 내려보며 똑바로 말했다. "트로스탄이 당신의 유일한 무기가 아니었잖아. 폭풍 여왕 조카딸. 그녀를 어디에 숨겼어!"
대마법사는 격통에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그녀는 동맹군을 모으고 있다. 할시온 협..."
사무엘의 코웃음이 대마법사의 말을 끊었다. 그는 선과 악 지팡이 두 개를 그녀의 얼굴에 겨냥했다. "잘했어. 어머니. 이제 그만..."
그때 강철 갑옷이 철컥이는 소리와 함께 건장한 기사 하나가 낙법으로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무기를 높이 뽑아 들고 방패를 단단히 받쳐 든 그 모습에 사무엘은 지팡이를 회수하며 뒤로 물러났다.
"다시 생각해 보시게. 친구여." 랜스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사무엘의 입꼬리가 소름 끼치는 각도를 그리며 올라갔다. "기디아의 연놈들 한 수레 갖다놔도 그대만 못하군요." 사무엘은 그렇게 말하며 랜스 옆의 빛나는 차원문으로 몸을 던졌다.
다시 대강당 밖의 차원문 입구. 라임의 앞으로 뻗은 손바닥에서 살을 에는 냉기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라이아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렸고 고드름이 그녀의 귀와 턱에 달렸다. 그녀의 마법서는 얼음투성이인 상태로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라임은 차원문을 빠져나온 사무엘을 고통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라임 사부님." 사무엘이 속삭였다. "어리석은... 어서 도망치거라."}}} |
16.5. 5장: 그레이스[편집]
5장: 그레이스 영웅 이야기 |
1편 '불을 뿜는 소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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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그로브 나무가 늘어선 강 길엔 울창한 덩굴과 화려한 들꽃이 가득했다. 번쩍이는 황금 갑주를 걸친 당당한 성기사를 선두로, 십수 명의 전사와 토착민 안내인들이 대열을 이루었다. 행렬의 중간에는 탐험가들이 열심히 주변을 관찰하며 그림을 그리고, 표본을 수집하고, 정보를 기재했다. 성기사의 조그마한 딸은, 그의 강인한 손가락을 조막만 한 손으로 꼭 쥐었다.
"섬이 마음에 드니 그레이스?"
이제 갓 6살이 된 그레이스는 이번이 기디아를 벗어나는 첫 여행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아름다운 밀림은 그녀의 흥을 돋웠고, 아이 얼굴만 한 꽃, 깃털을 뽐내는 새, 무엇하나 아름답지 않은 게 없었다. 심지어 본래라면 거추장스러웠어야 할 날파리들도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응. 세상에서 가장 예쁜 곳이야." 애늙은이 같은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좋아. 그럼 이곳을 '그레이스 섬'으로 하지. 잘 받아적도록." 성기사는 일단의 군도를 모두 껴안듯이 양팔을 크게 벌리며 말했다. 단장의 명령에 지도제작자의 깃펜도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레이스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두리번거릴 때, 성기사와 수행원들은 마치 자신들이 세상을 창조한 듯, 만물에 이름 붙이기에 바빴다. 순진무구한 토착민들은 그 모습을 보며 밝은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사이로, 하늘거리는 쪽빛 사롱을 걸친 아이가 그레이스 어깨 위 원숭이에게 자두를 먹였다.
"정말 친절한 사람들이야."
"섬사람들의 문화엔 친절과 평화가 각인되어 있지. 심지어 이들은 어릴 때 뾰족한 송곳니와 앞니를 갈아 폭력성을 줄인다더구나." 성기사가 동의했다.
"윽. 아플 거 같아." 그레이스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물론 괴롭지."
"그럼 그런 짓 그만하라고 해 아빠."
"사랑하는 내 딸아. 사냥꾼은 호랑이보다 사냥을 잘할지도 몰라. 하지만 거꾸로 호랑이에게 어떻게 사냥하는지 가르쳐 주는 건 어리석은 일이란다."
"하지만 이들은 호랑이가 아니라 사람인걸."
"그래. 일종의 사람 같은 존재지." 성기사가 대꾸했다.
그레이스가 인상을 찌푸릴 때, 그녀의 시야가 환하게 밝아졌다. 앞이 보이지 않는 그레이스가 비틀대자, 어깨에 올라탄 원숭이는 도망갔고 행렬은 그 자리에 멈춰섰다.
"아, 아빠..." 그레이스가 신음했다.
"겁내지 말거라 얘야. 빛이 무엇을 보여주는지 말해다오." 성기사가 그레이스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행렬 앞에는 두 갈래 길이 놓여있었다. 그대로 숲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커다란 얼음벽이, 강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타오르는 화염벽이 나타났다. 그레이스는 열기로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답했다. "얼음과 불... 얼음과 불의 벽이 보여요." 그레이스가 조용히 속삭였다.
"어느 쪽이 불의 벽이니?"
그레이스가 손가락으로 강을 가리키는 순간, 환상처럼 얼음벽과 화염벽이 사라졌다.
성기사는 딸의 말을 듣고 행렬을 일렬종대로 늘어뜨려, 강 위에 나 있는 돌다리로 향했다. 그곳에는 신비한 기운을 간직한 고대의 사원이 있었다.
걸음을 서두르는 그들 앞에 토착민 안내인이 끼어들었다. 그는 미소짓고 있었지만, 목소리엔 긴장이 가득했다. "기사님. 감히 말씀드리건대 외부인이 신전에 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만 돌아가시지요." 안내인이 간청하며 소매를 걷어 올리자, 끔찍하게 그을린 흉터가 나타났다.
"괜찮다. 물러서거라." 성기사는 나지막이 명령하며 안내인의 팔을 잡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화상 흉터에서 손바닥 모양의 새살이 자라났다.
성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신전을 바라보았다. 집채만 한 바위가 켜켜이 쌓인 신전은 범접할 수 없는 위용을 뽐냈고, 강가를 빼곡히 덮은 맹그로브 나무도 신전 주위는 모두 불타 뼈대만 앙상했다. 성가신 모기떼와 깩깩대는 원숭이 무리도 보이지 않아 기괴한 적막감만이 감돌았다. 행렬의 선두가 신전 입구로 진입하려는 찰나, 그레이스보다 어려 보이는 토착민 소년이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허리에 사롱을 동여맨 소년의 몸뚱아리에는, 안타깝게도 안내인의 팔에 난 것과 같은 화상이 전신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이 아이는 레자라 합니다. 저희는 '불을 뿜는 소년'이라 부르며 두려워하죠." 안내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의 팔에 나있던 흉터는 성기사가 심어놓은 회복의 기운으로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아빠. 이 아이 다쳤어요." 그레이스가 걱정했다.
성기사는 그레이스를 소년에게 이끌었다. "가서 배운 대로 행하거라."
그레이스는 돌층계 참을 지나 조심스레 신전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기디아식 인사를 건네자 소년이 움찔했다.
"겁 먹지마. 널 치료해줄게." 그레이스가 부드럽게 말하며 정신을 집중하자, 그녀의 정수리에 눈부신 빛이 강림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배운 대로 힘을 운용하자, 빛은 얼굴을 지나, 목을 거쳐 그녀의 심장으로 이어졌다. 심장의 고동과 함께 빛이 더 커지는 순간, 그레이스는 양손을 소년의 얼굴에 갖다 댔고 성스러운 힘은 손바닥을 통해 소년에게 전해졌다.
새하얀 빛이 자신을 감싸자 소년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앞에 서 있는 소녀에게서 적의가 느껴지지 않음을 깨닫고, 얌전히 그 힘을 받아들였다. 빛이 소년의 몸을 휘감자 끔찍했던 흉터는 사라지고 새살이 자라났다.
"돼, 됐어. 훨씬... 보기 좋구나." 강렬한 힘을 사용한 반동으로 그레이스가 힘겹게 입술을 열었다. 그녀 앞에는 흑진주처럼 매끈한 피부를 가진 잘생긴 소년이 서 있었다.
소년은 입을 열어 뭔가 말하려 했으나, 튀어나오는 것은 타오르는 불과 회색빛 재뿐이었다.
성기사는 불이 그레이스를 덮치기 전, 빛나는 방패로 그들 사이를 막아섰다. 화염이 거칠게 타올랐으나, 성기사가 불러일으킨 신성한 가호를 뚫진 못했다. 은인에게 감사의 표시도 하지 못하는 저주받은 운명에, 소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흐느끼는 소년 곁으로 성기사가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넌 순혈 마법사로구나. 그 강대한 힘을 제대로 다루려면 체계적인 훈련이 필요하단다. 빛의 힘을 타고난 그레이스가 그랬듯이 말이야. 처음엔 이 아이도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빛의 환상에 고통스러워했지. 그레이스 내 딸아. 마법사의 탑에 이 아이를 맡길 때까지 네가 보살펴 줄 수 있겠니?" "응! 얘. 넌 지금부터 내 동생이야. 이름은... 그래 타이터스. 타이터스가 좋겠어." 그레이스가 소년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
2편 '여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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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하운드가 다리에 코를 킁킁대는 느낌에 그레이스는 잠에서 깼다. 창밖은 아직 어두컴컴했으며 새벽 여명이 막 비추는 참이었다. 기지개를 쭉 켠 그레이스는 사냥개와 함께 텅 빈 훈련장으로 나갔다. 무기 진열대의 잘 관리된 여러 병기 중에서 그녀는 강철 철퇴를 집어 들고 굳은 몸을 풀기 시작했다. 지난 세월 수없이 반복한 동작이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풀려나왔다. 아름다운 춤사위를 펼치는 그레이스의 마음은 명경지수처럼 고요히 잦아들었다. 거듭된 훈련은 그녀를 괴롭히던 빛의 환상을 완벽히 통제했다. 무아지경에 빠진 그레이스의 의식은 점점 떠올라 훈련장 전체를, 그 너머 도시 전체를 관조했다.
처음엔 한 남자가 다급히 외치는 힘의 언령만 들려왔다. 사이한 존재감을 뿜는 일련의 단어들은 허공에 시커먼 어둠을 만들어냈고, 그 사이로 구원을 갈구하는 끔찍한 존재들이 기어 나왔다. 연옥이 현세에 소환된 것이다!
그레이스 계속 정신을 집중하며 환상을 이끌었다.
'연옥을 불러온 자를 보여다오.'
환상은 크게 일렁이더니 도심의 어두컴컴한 골목을 배회하는 기사를 비추었다. 그는 그레이스의 기억에 없는 자로 기디아식 갑옷을 입고 한 손엔 방패, 다른 손엔 장창을 쥐고 있었다. 남자는 차가운 아침 공기를 헤치며 고집불통 청년 하나를 본 적 없냐고 시민들을 수소문했다. 그 와중에 때론 드높은 고대의 탑들을 보며 경의를 표하고, 싱그럽게 흘러내리는 분수에 감탄하고, 빵집 굴뚝에서 새어 나오는 갓 구운 빵의 냄새를 음미했다.
이윽고 그레이스는 명상을 끝내고 환상을 꺼뜨렸다. 아침 수련이 끝난 걸 본 수행자들이 시원한 물과 깨끗한 수건을 땀 흘린 그레이스에게 바쳤다.
"도시 관문에 남자가 하나 배회하고 있을 것이다. 이리 데려오라." 그레이스는 아침 식사가 준비된 강당으로 발을 옮기며 명령했다.
기사단에서 그레이스의 환상과 명령은 절대적. 수행원들은 그녀가 자리에 앉아 첫술을 뜨기도 전에, 환상에 나타났던 남자를 식탁 앞에 대령했다. 그는 기사단의 위용과 그레이스의 고귀함에 압도되어 경건한 모습으로 주변을 살폈다. 수행원들은 그가 가지고 있던 방패와 장창을 그레이스에게 가져다 주었다.
"이 양식과 재질. 잊을 수 없지. 이 방패와 창은 겐나로 경이 평생을 아꼈던 것이다. 그를 아는가?"
남자는 그레이스의 말에 밝은 미소를 지었다. "내 스승이자 은인이오. 그분은 나의 고향 아르케론에서 평화로운 최후를 맞이했지. 그리고 나에게 자신의 무구를 물려주었소."
"저런. 아까운 인재를 잃었군. 미사단에 일러 겐나로 경의 영혼을 축복하라 하겠네. 그는 기디아의 뛰어난 기사이자 내 아비의 둘도 없는 친구였지. 그래... 겐나로 경의 유지를 이었다면 그대도 성기사단에 들어오는 게 어떠한가?" 그레이스가 방패와 창을 돌려주며 권유했다.
"사실 그게 내가 이곳에 온 이유였소. 하지만 예전부터 지키겠다고 맹세한 청년 마법사 하나가 위험에 빠졌소. 그는 마지막 열 번째 마법사 시험을 치르러 이곳 마탑에 들어왔는데, 그 시험은 치졸한 함정이었소! 그리고... 난 맹세를 지키지 못할 위기에 처해있다오." 남자가 근심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그 아이는 죽었는가?"
"잘 모르겠소. 분명 죽은 건 아닌 것 같지만, 도처에서 내가 겪어보지 못한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
"그렇군. 그 아이는 현세에 연옥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그레이스가 나지막히 말했다.
"연옥이라니 지옥을 일컫는 말이오? 사실 시험이 함정임을 알아챈 그는 대마법사를 죽이려 했다오. 바로 자신의 친어머니를."
"뭐라, 친모?" 그레이스의 심장이 요동쳤다.
"그렇소. 두고 볼 수 없었던 난 일단 그를 막았고 자신의 공격이 막히자 도망쳤소. 난 그를 찾아 내 맹세를 지켜야 하오."
그레이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번쩍이는 기사 갑옷이 아닌 평범한 훈련 복장인데도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기품은 사방을 가득 채웠다.
"전사여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엄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난 랜스. 아르케론의 랜스요." 랜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릎을 꿇으라, 아르케론의 랜스."
랜스가 겸허하게 무릎을 꿇자 그레이스는 그의 머리를 짚고 빛의 힘을 불어 넣었다. 성스러운 빛은 랜스의 얼굴을 지나, 척추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드높은 용기와 고귀한 명예로 그대는 기디아 대마법사의 생명을 구했다. 그리고 자신이 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기디아 기사단에 들어올 충분한 자격이 될 터! 그대 랜스는 항상 정의와 용기를 추구하며 기사단에 충성하고 약자에게 자비를 베풀 것을 맹세하는가?"
"맹세합니다." 랜스의 목소리가 감격에 겨워 떨렸다.
"기사단에 온 것을 환영한다 전사여. 이제부터 그대는 기디아의 기사 랜스이다. 신의 가호가 그대와 함께하길." 그레이스는 미소 지으며 랜스를 일으켜 세웠다. "입단의 나머지 절차는 행정처에서 처리할 것이다."
랜스는 그레이스의 환대에 감사하며 그녀와 함께 발걸음을 떼었다.
"그럼... 이제 기디아의 대마법사를 알현하러 가는 것이오 단장?" "아니. 내 동생을 찾으러 간다."}}} |
16.6. 6장: 레자[편집]
6장: 레자 영웅 이야기 |
'화염 마법사, 레자' 1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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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염 마법사, 레자' 2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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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사슬니[편집]
사슬니 영웅 이야기 |
1편 '호박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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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슬니는 뜻밖의 친구를 만드는데...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하나 있지. 시간 여행은 정작 시간이 중요한 게 아냐. 핵심은 바로 속도지! 자, 잘 잡고 있을 테니 뚜껑 따 봐." 음습한 지하 감옥 안, 작지만 단단한 체구의 난쟁이가 말했다.
난쟁이의 머리 위에는 대체 뭐가 들었는지 움직일 때마다 출렁이는 강철 통이 있었고, 감방의 한 켠에는 무거운 쇠사슬로 구속된 사슬니가 웅크리고 있었다. 그가 거대한 엄니를 곧추세우고 강철 통 가까이 움직이자 쇠사슬이 끊어질 듯 출렁였다.
사슬니는 먹을 것을 좋아한다. 아니, 사실 엄청난 대식가다. 위장에 들어가는 건 뭐든 먹어치우는데 도통 배탈이 나지 않는다. 그의 식단에는 어쩌다 감옥 간수들이 던져주는 참새 꼬지, 토끼 구이, 어둠녘 야수 뱃살 튀김뿐만 아니라, 시든 배추나 옥수수 쪼가리 같은 음식물 쓰레기까지 올라가 있다. 심지어 케케묵은 가죽 장화 같은 도저히 먹거리로 볼 수 없는 것도 사슬니는 거뜬하다. 가죽 부분은 쫄깃쫄깃 씹는 맛이 있고 신발 끈은 슥싹슥싹하면 치실로 안성맞춤이란다. 오묘하게 풍기는 구린내도 특유의 풍미가 있다나?
쿵쿵... 바지직.
사슬니가 엄니로 통의 뚜껑을 따자 녹색으로 빛나는 끈적이가 흘러나왔고 모조리 그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끄억' 커다란 트림 소리가 감방 안에 울려 퍼지자 난쟁이는 코를 움켜쥐었다.
"아주 썩은 내가 진동하는구먼." 그가 투덜댔다.
"썩.은.냄.새" 사슬니가 동의했다.
"이놈의 지하감옥은 교정 시설이라 들었는데, 수감자 대우가 너무 심한 거 아냐? 우리도 정당한 대접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너도 말이지 이곳에서 그 빌어먹을 쇠사슬에 묶여 뒹굴다 보니 네 꼴이 어떤 줄 알아? 짓이겨진 떡갈비 같다고."
"난. 엿이. 더. 맛있다." 사슬니가 고개를 흔들었다.
"뭐야 생긴 거 답지 않게 단 걸 좋아하는 거냐. 좋아. 우리 둘 여기서 탈출하기만 하면 내가 엿을 매일 만들어주지!"
"탈출. 엿. 좋다."
"녀석 참 잘 먹는구나. 한 통 더 가자." 난쟁이는 강철 통을 하나 더 들어 올렸다.
이번에도 통 속의 부패한 액체는 남김없이 사슬니의 위장으로 들어갔다.
사슬니가 감옥에서 만난 이 난쟁이는 무척 특이했다. 그가 이제껏 본 '작은 인간'들 중에서는 가장 크고 탄탄한 체구를 가졌으며, 거지 같은 지하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도 그를 절망에 빠뜨리지 못했다. 난쟁이는 쉴새 없이 나불대는 주둥이로 자신의 천재성을 과시했는데 - 그래 봤자 듣는 이는 사슬니밖에 없었지만 - 자기가 만든 시대를 앞서간 발명품들이 아니었다면 문명은 수십 년은 뒤쳐졌을 거라 호언장담했다. 그 와중에 어떤 특이한 발명품 하날 둘러싸고 왕실의 오해를 샀고 성질 급한 여왕이 결국 그를 지하 감옥에 가뒀다고 한다. 하지만 난쟁이는 간수들에게도, 독성 가득한 끈적이에도, 감방 동료인 사슬니에게도 겁먹지 않았다. 사실 사슬니는 그 위압적인 외모와 무시무시한 엄니와 달리 부드러운 성격이다. 너무 오래 굶지만 않으면 뜻밖에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들어봐. 시간 여행에서 내 실수는 차원 내에서 움직인 거야. 첫 시도에 사촌 땜장이를 기계에 담아 2분 미래로 보냈다 다시 불렀어. 사라졌던 녀석은 정확히 2분 뒤 꽁꽁 언 동태 같은 꼴이 되었더라고. 다들 모르는 이야기지만 우리가 발을 디디고 선 이 행성은 매우 빠르게 우주 공간을 여행하고 있어. 사라졌던 내 사촌은 그 2분간 아무것도 없는 차가운 우주에 나가 있었던 거야. 인석아. 이해하는 거냐?" 난쟁이가 사슬니의 도톰한 배를 두드리며 물었다.
"쪼.금.이해.한다." 사슬니가 중얼거렸다.
"좋아. 왜냐면 지금부터 할 일은 너와 관련 있거든."
사슬니의 두 귀가 쫑긋 솟았다.
"속도와 중력. 이 두 가지를 통제하면 시간을 다스릴 수 있지. 시간을 다스리면 공간을 조작할 수 있어. 여기서 도출되는 결론은? 언제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거야!"
"오.호.바깥.으로도?" 사슬니가 물었다.
"지직... 어이 난쟁이 계속해봐. 지직..." 감옥 내 확성기로 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무뢰배들아. 난 부모님 지어준 자랑스러운 이름이 있단 말이다!" 난쟁이가 주먹을 흔들며 욕했다.
"프.랭.키." 사슬니가 끼어들었다.
"그래 맞아 친구." 난쟁이가 미소를 지으며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하지만 사슬니는 구석의 강철 통을 하나 더 따고 끈적이를 들이키느라 프랭키를 보지 못했다.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너 이름이 사슬니인 거냐 아님 너네 종족이 사슬니인 거냐?"
"맞.아."
"허 참. 어쨌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속도를 엄청나게 빠르게 하기 위해선 중력으로 빛을 가둬야 해. 시간의 팽창이라 불리는 현상이지. 그리고 이 천재님이 그걸 해냈다는 말씀! 특별히 고안한 이 정육방체라는 녀석으로 말이야."
"정.육.점...체?" 눈앞에서 시뻘건 고기가 아른거리는지 사슬니가 침을 뚝뚝 흘렸다.
"근데 문제는 이 녀석이 아직 시험 단계라 탑승자는 모두 작살이 난다는 거야." 프랭키가 머쓱한 듯 머리를 긁었다. "그래서 요는 니가 일단 날 삼켜야 해."
"싫.다."
"아 영원히는 아니야. 시공간의 이동이 끝날 때까지만." 프랭키가 재빨리 정정했다.
그리고 프랭키의 목소리가 속삭임으로 변했다. "우리가 해야 할 건 저 스크바더의 똥구멍 같은 간수에게서 내 육방체를 되찾고 니가 날 삼키는 거야. 그럼 우린 안전하게 이곳에서 탈출하는 거지. 이동이 끝나면 넌 날 다시 토해내면 돼. 성공하면 상으로 엿 열 개를 주지."
"호.박.엿."
"응? 아무 엿이나 안 돼?"
"호.박.엿!"
"거참 웃기는 녀석이네." 프랭키가 실소를 흘리며 이젠 거의 강물처럼 흘러내리는 사슬니의 침을 피했다.
"대체 누가 호박 따위로 엿을 만든다는 거야?"
프랭키의 투덜댐을 듣자 사슬니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발을 쿵쾅쿵쾅 굴렀다. 그리고 프랭키에게 달려들어 밀쳐냈다. 겨우 피한 난쟁이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녀석 알았어, 알았어. 난 천재 기술자. 엿에다 대충 호박을 얹어보지 뭐." "호.박.엿." 사슬니의 눈이 반짝였다.}}} |
2편 '탈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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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키와 사슬니는 감옥에서 탈출하는데...
"좋았어. 그럼, 신사 먼저!" 프랭키가 손짓했다.
"이것. 때문. 안. 된다." 사슬니가 고개를 도리도리 젓자 그를 구속한 쇠사슬이 흔들렸다.
"이런 깜빡 했군. 보자, 압연강철에... 서른 번 단조한 녀석인가. 딱 봐도 불량품이군. 감방에서까지 기가 막힌 원가절감을 볼 줄은 몰랐는데... 네 몸무게가 2톤이 조금 넘으니까 관성 이론에 대입해 보면..." 프랭키의 입이 수식을 중얼거리는 와중에 그의 손가락은 허공을 빠르게 노닐었다.
"밀리미터 제곱에, 위에 상수 하나 얹고. 그렇지. 거의 다 되었어..."
멍하게 프랭키의 짓거리를 바라보던 사슬니. 순간 그가 기지개를 크게 한 번 켜자 벽 한쪽이 부서지며 쇠사슬이 맥없이 딸려나왔다. 잠깐 난쟁이와 괴수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다.
"크, 크흠. 좋아. 장애물도 없어졌으니 가 보자고." 프랭키가 감옥의 철문을 가리켰다.
사슬니가 쇠사슬을 질질 끌며 돌진하자 쾅 소리와 함께 경첩이 부서지고 문이 떨어져 나갔다. 관성이 붙은 사슬니가 반대편 벽까지 가서 처박히는 걸 보며 프랭키는 산책하듯 느긋이 감방에서 걸어 나왔다. 문 근처에 있던 경비는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사슬니는 어쩔 줄 모르는 경비를 통째로 꿀꺽 삼켰다. 경비의 허리춤에 달린 열쇠가 사슬니의 뱃속에서 짤랑짤랑 소리를 냈다. 프랭키는 거대한 덩치를 앞세우고 위풍당당히 간수의 집무실로 향했고, 복도의 확성기에선 한발 늦게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모든 죄수는 즉시 감방으로 돌아갈 것. 사슬니가 탈출했다. 반복한다. 사슬니가 탈출했다.'
사슬니는 간수 집무실 출입문을 엄니로 찍어 멀리 던져버렸다. 일견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둘은 곧 책상 밑에 숨어 비루먹을 강아지처럼 떨고 있는 간수를 발견했다.
"내 꺼야. 정육방체 냉큼 토해내." 프랭키가 여유롭게 말했다.
"정.육.점.체." 사슬니의 입에서 다시 침이 떨어졌다.
"알았어, 알았다고! 뭐 우린 사용도 못 했어. 별 거지 같은 장치 다 보겠네. 그리고 이 반동분자들! 이 짓거릴 하고 감히 살아나가길 바라는 거냐. 이곳은 벌써 지원병들이 물샐 틈 없이 포위 중이다!" 분위기에 떠밀려 구석의 금고를 열면서도 간수의 주둥아리는 끊임없이 나풀댔다.
"흐흐. 그리고 거기 그 냄새 나는 짐승 놈부터 사살하라는 명령도 내렸지!"
"뭬야? 감히 내 친구에게 그런 험한 말을! 얘도 엄연히 이름이 있다고." 프랭키가 간수의 손에서 장치를 홱 빼앗으며 화를 냈다.
"사.슬.니"
"그래 맞아 친구. 자, 이제 배 속에 있는 그 녀석 뱉어내. 잘못하다 소화될라."
구토 소리와 함께 점액에 뒤덮인 채로 경비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 끔찍한 모습을 본 간수의 얼굴은 더러움과 공포에 새파랗게 질렸다. 프랭키는 그를 가볍게 무시하고 정육방체를 찬찬히 살폈다.
"후후 내 귀염둥이 잘 있었나. 이놈을 작동시키면 여기 여섯 면이 거의 이 방 만큼 커지지. 그리고 그 공간에 빛을 가두는 거야. 이후 육방체는 초고속으로 회전하며 빛을 가속해. 시공간 여행에 충분한 속도에 다다를 때까지"
"설명. 그만. 탈출. 부터!" 사슬니가 포효하자 간수와 경비는 뒷걸음질로 집무실에서 달아났다.
방해꾼이 사라진 걸 확인한 프랭키는 정육방체를 꾹 눌러 정보를 입력했다.
"6837.33 킬로미터 북쪽... 아니 북동이군. 위도는 37.56, 경도는... -122.32쯤이려나. 공전 주기는 182.6일이고 자전까지 고려해야 하니..." 프랭키가 부산을 떨자 정육방체가 웅웅 소리를 내며 빛을 모으기 시작했다.
찬란히 쏟아지는 빛살에 사슬니는 눈을 찡그린 채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염려 붙들어 매 친구. 내 머릿속에 완벽한 이론을 세워 두었어. 이 몸의 계산은 틀린 적이 없다고!"
"못. 믿겠.다." 사슬니가 투덜댔다.
"설정 완료! 자, 이게 날 꿀꺽 삼켜!" 프랭키가 잽싸게 사슬니의 엄니를 잡고 외쳤다.
사슬니는 이빨로 난쟁이의 살점을 뚫어버리지 않게 조심하며 그를 삼켰다. 정육방체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이제 너무 밝아져 마치 태양이 지상에 떨어진 것 같았다. 빛과 소음의 도가니에 사슬니는 귀를 접고 눈도 감은 채 조용히 기다렸다.
사슬니의 생체 갑주가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갈라지려 할 때, 환하던 빛도 감옥을 무너뜨릴 기세로 울리던 소리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간수의 집무실은 온데간데없었고 대신 확장된 정육방체의 벽에 사슬니의 모습이 비쳤다. 놀랍게도 그 모양새는 각기 달랐는데 어떤 사슬니는 아기였고 또 다른 녀석은 갓 허물을 벗은 청년이었다. 그 반대편에는 멋들어진 분위기를 풍기는 미중년의 사슬니도 있었다.
"사슬...니?" 모든 사슬니의 입이 일제히 열렸다 닫혔다.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사슬니를 뒤로하고, 정육방체는 언제 자기가 날뛰었냐는 듯 얌전해졌다. 시커먼 어둠 속, 사슬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파악하려 애썼다.
댕!
그때 사슬니가 있는 공간 전체가 위로 움직이며 평온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일종의. 승강기. 인가.'
하지만 곧 기계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고 상승이 멈추더니 승강기는 바닥을 향해 사정없이 곤두박질 쳤다.
"쾅!"
사슬니는 내동댕이쳐지며 뭔가 자신의 위장에서 날뛰는 걸 느꼈다.
"어.맞아. 깜빡.했군." 그는 서둘러 프랭키를 토해냈다.
"콜록, 콜록. 대체 왜 이렇게 늦은 거야!" 난쟁이가 기침하며 얼굴에 덕지덕지 붙은 소화액을 닦아냈다.
"어... 미.안."
프랭키는 자랑스러운 수염의 각도를 세우는 걸 마지막으로 손질을 끝내고, 뚜껑이 날아간 승강기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끊어진 전선의 불똥이 튀고 있었고, 그 너머로 거대한 동물이 울부짖는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다행이군. 예상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어."
"호.박.엿.은?" 사슬니가 다그쳤다. "걱정마 친구. 저 위의 문제를 해결한 뒤 얼마든지 주지!"}}} |
18. 바티스트[편집]
바티스트 영웅 이야기 |
'순찰 대장의 부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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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날이 가장 짧다는 동지. 지평선을 넘어 불타는 태양이 낭만적인 노을을 하늘에 새기는 와중에, 순찰 대장은 휘파람을 불며 길을 나섰다. 초승달 도시에서도 손꼽히는 부유층이 사는 동네는 고소한 올리브 향과 달콤한 자스민 향이 가득했고, 잘 정돈된 뜰과 저택이 그의 눈을 즐겁게 했다. 최연소 순찰 대장이라는 영광을 누리는 남자는 당당했다. 다림질로 날 세운 제복과 빳빳이 풀 먹인 정모, 단단한 체구의 군마는 대장의 위엄을 드러냈다. 무엇보다 허리에 걸린 마검이 그의 위세에 정점을 찍었다. 대장은 초승달 도시 주민들이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하는 모습을 뿌듯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길은 곧 구도심으로 이어졌고, 섬사람들 영역에 다다르자 부촌의 상큼한 향기와 달리 썩은 나무 냄새, 주민의 쉰내, 상한 고기의 악취 따위가 났다.
구도심 중앙 광장에 다다랐을 때 시끌벅적한 노랫소리 와 고함이 들렸다. 순찰 대장은 혀를 끌끌 차며 광장을 바라보았다. 섬사람들은 형형색색의 의복을 입고 동지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꽹과리 소리와 북소리는 점점 격해졌고 사람들의 노랫소리도 널리 울려 퍼졌다.
참을 수 없는 일탈의 중심에는 섬사람이 신봉하는 무녀가 있었다. 이미 관청에 열 번도 넘게 체포된 적이 있는 이 골칫덩이는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며 기괴한 주문을 주절댔다. 그녀의 눈동자는 홱 돌아가 흰자위만 보였고, 정신 사납게 움직이는 맨발 사이에는 연기 나는 솥이 놓여 있었다.
바티스트 교주, 강림하소서!
바티스트 교주, 강림하소서!
광기의 현장을 본 순찰 대장은 소름이 돋았다. 일단 말을 다시 끌고 근처 한적한 거리에서 안전히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제국은 법으로 토착민의 자주권을 보장했고, 특히 수도 몽릴에서 상당히 떨어진 초승달 도시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파견 온 순찰 대장의 눈에는 집단 광기와 다름없었기에, 그의 마음엔 걱정이 가득했다.
"... 겁 먹은 건가..."
순찰 대장은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잽싸게 뒤를 바라보았지만 어두운 거리엔 아무도 없었다.
"거기 누군가?" 목소리의 위엄을 유지하려 애쓰며 물어보았지만, 웃음소리만 들려왔다.
강림하소서, 바티스트!
강림하소서, 바티스트!
다시 울려 퍼지는 인파의 악다구니에 광장을 바라보니, 무당이 양손을 끓는 솥에 집어넣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작은 비명도 지르지 않았고, 솥에서 쌀과 검은콩을 꺼내는 손도 멀쩡했다. 무당의 손에서 쏟아지는 곡식을 받아먹으려 섬사람들이 달려들었다.
"이것들은 미쳤어. 정신이 나갔다고!" 기병대장은 고개를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저들의 여왕이 자신의 백성을 챙기는 것이다." 속삭이는 목소리는 순찰 대장의 어깨 바로 너머에서 들렸다. 대장은 마법의 검을 뽑아 들고 다시 두리번거렸지만 거리엔 역시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너희 여왕은 대체 뭘 하느냐."
이번 목소리는 광장 한복판에서 흘러나왔다. 순찰 대장의 척추를 타고 전율이 흘렀다. 하지만 곧 용기를 내어 마음을 다잡고 마검을 앞세운 채 광장으로 나아갔다. "그만! 난 순찰 대장이다. 그대들은 집회법을 위반하고 있다!"
악기를 두드리는 소리도, 빙글빙글 돌아가던 춤도,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도, 흩날리는 상의와 치마도 모두 멈췄다. 군중들이 그의 말을 따르자 순찰 대장은 더욱 용기를 냈다.
"좋아. 그래. 축제는 끝났다. 모두 집으로 돌아가라."
"이곳이... 우리의 집이다."
순찰 대장은 이번엔 참지 않고 아예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칼을 겨눴다. 하지만 목소리의 출처를 본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광장 중앙에 있는 폭풍 여왕의 동상에서 끊임없이 속삭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약 일 년 전 이곳에 세워진 여왕의 동상에는, 무엄하게도 섬사람들이 저질러 놓은 낙서와 장난질이 가득했다.
"오히려 집으로 돌아가야 할 존재는 너다. 안식을 찾아야지."
순간 동상 밑의 땅이 격하게 흔들리고. 뼈만 남은 손들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앙상한 팔과 툭 붉어진 핏발 선 눈, 째진 입을 한 끔찍한 망령들이 쏟아져 나왔다.
순찰 대장이 마검을 휘두르자 푸른 마법이 펼쳐졌다.
"며, 명백한 질서 위반이다! 그대를 현장범으로 체포한다. 버, 법에 금지된 주술 사용과 지역 평화를 깨트린 죄목이다." 순찰 대장은 강하게 질책하려 했으나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목소리로는 쉽지 않았다.
"후후후, 지금 평화라고 했느냐."
흔들리는 순찰 대장의 눈동자에 교주의 모습이 비쳤다. 멋진 중절모를 쏘고, 맵시 있는 조끼를 입고, 한 손에는 거대한 낫을 든 채. 동상 옆에 우아하게 앉은 그의 곁에서 망령들이 시중을 들었다.
"네가 말하는 거짓된 평화는 하등 쓸모가 없느니." 바티스트는 영혼을 뒤흔드는 미소를 지으며 순찰 대장을 바라보았다.
"그, 그대는 대체 누군가. 신분을 밝혀라!" 대장이 윽박질렀다.
"난 전설이자 수많은 이들의 믿음에서 탄생한 초월적인 존재." 바티스트가 망자들이 바치는 포도주잔 들며 말했다.
순찰 대장은 잠시 머뭇거리다 뒤돌아서 도망쳤다. 마치만 곧 강력한 통증이 그를 엄습했고,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힌 듯 나동댕이 쳐졌다.
"제, 제발, 목숨만은..."
"크하하하, 죽음을 피하고 싶은 건가." 바티스트가 웃으며 물었다. 칠판을 긁는듯한 끔찍한 소리가 순찰대장의 귀를 후벼팠다. "대체 왜 죽음을 피하려 하는가. 인생은 고통이며 지루할 뿐이다. 언젠간 모두 죽음이란 안식에 들지. 죽음이야말로 위대한 서사시. 모든 생명의 지향점이자 구원이다."
쓰러진 순찰 대장은 흐느끼며 기어서라도 바티스트에게서 도망치려 했다. 그렇게 깔끔하게 관리하던 제복이 진흙으로 엉망진창이 되는데도 개의치 않았다. 아끼는 말도 부르려 했으나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섬사람들은 그를 둘러싸고 나지막한 장송곡을 불렀다.
"사술로 네 영혼은 이곳에 묶여있다.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소용없으니. 망령이 되어 나와 함께하는 것은 축복. 함께 우리는 여왕의 통치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망령들이 에워싸고 마검을 가져가는데도 순찰 대장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죽음의 기운이 서리자 마법의 검도 빛이 바랬다.
마침내 바티스트는 친히 몸을 일으켜 순찰 대장에게 다가왔다.
"그대에게 안식을 내리노라." 거대한 낫이 순찰 대장의 몸을 훑고 지나가자 영혼이 빠져나와 바티스트에게 향했다.}}} |
19. 어둠추적자[편집]
어둠추적자 영웅 이야기 |
1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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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팀 워커 서신(書信) 회수본 발췌
조합장 이외의 자는 열람 엄금
그날, 난 일곱섬 군도(群島)에 있는 어둠녘이 창궐한 활화산으로 향했다. 이곳의 화산 환경은 가혹하기 짝이 없는데, 돈을 아낌없이 퍼부어 특수 제작한 탐험복 덕분에 약간의 멍과 생채기를 제외하면 난 멀쩡했다. 난 마치 휴식을 모르는 광인(狂人)처럼 나아갔고, 내 마음은 곧 속살을 드러낼 비밀스러운 광경에 흥분했다.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면 난 두렵다. 뭐가 있을지 모르는 어둠의 심연으로 혼자 나아가는데 무섭지 않다면 그게 인간일까? 끈적한 핏물처럼 대지를 흐르는 용암은 내가 지나갈 만한 암석의 길을 닦았다. 섬 중앙에 가까워지자 놀랍게도 식생(植生)이 나타났다. 척박한 토양에 뿌리를 내리는 은침(銀針)류 식물과 적녹색 이끼가 화강암을 덮었고, 퍼석퍼석한 대지 위에는 잡목과 고사리 따위가 자랐다. 화산재를 육안으로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지자, 만물이 점점 거대해졌다.
그때 놈이 날 발견했다. 어둠녘 말이다. 놈은 사냥감의 공포를 탐지한 포식자처럼 내게 달라붙었다. 그리고 이제껏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언어를 속삭였다. 난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안도하는 순간 놀랍게도 그 목소리는 내 마음속에서 다시 울렸다.
“Ebbet ikro ido?”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단어였다. 그런데도 정신을 차려보니 난 멍하게 내 이름을 읊조리고 있었다.
화덕 속에서 부풀어 오르는 빵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마치 그 빵처럼 모든 생물체가 컸다. 어른 팔뚝만 한 전갈과 딱정벌레가 서로 드잡이질했고, 저녁 식탁의 접시만한 민달팽이가 가시나무를 기어올랐다. 두꺼비를 네 마리쯤 붙여놓은 듯한 독개구리는 바위 위에서 나를 노려보았다. 동물뿐 아니라 식물도 마찬가지였다. 비오는 날 우산으로 써도 될 만큼 커다란 잎사귀가 흩날렸고, 덩굴과 나무줄기는 한줌의 햇살이라도 더 받으려 서로를 휘감고 악다구니를 썼다. 누군가 그랬지 밀림은 녹색의 지옥이라고. 그보다 더 들어맞는 표현이 있을까!
나도 모르게 바위 가장자리에 핀 꽃 하나를 꺾었다. 지저분한 화산재 속에서도 영롱히 빛나는 꽃을 도저히 지나칠 수 없었다. 그러자 환상인지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지, 꽃송이가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그리고 꺾인 줄기에서는, 순식간에 새 봉우리가 맺히고 꽃이 피어나 오만한 자태를 뽐냈다.
“Astek givav ikri edu buvad bebu…”
때마침 불어온 폭풍이 아니었다면 난 이 불가사의 속에서 영원히 헤맸을 것이다. 어둠과 화산재 때문에 앞이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난 계속 나아갔다. 그와 더불어 오싹한 속삭임도 거세졌고 머리가 지끈거려 잠시 걸음을 멈춘 순간 발밑 땅이 흔들렸다. 균형을 잃은 나는 불어닥친 강풍에 휩쓸렸다. 두꺼운 야자수 가지를 잡고 자세를 가다듬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불타는 만의 놀이동산 기구(機構)에 탄 것처럼 정신없이 이리저리 부딪히던 그때, 난 어둠녘의 폭풍 속에서 신기한 현상을 체험했다. 안개와 먼지 사이로 나 자신의 무수한 환영(幻影)이 나타난 것이다! 환영은 내 몸을 투영한 것이지만 분명 나 자신과는 달랐다. 또한, 너무나도 기괴한 분위기를 풍겨 근처에도 가기 싫었다. 사방을 둘러싼 환상은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했고 그때마다 내가 느끼는 알수없는 통증은 강해졌다.
폭풍이 화산의 심연으로 날 끌어당겨 더 위험해지자, 난 무언가에 홀린 듯이 스스로 환상을 받아들였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환상이 되었다. 환상처럼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아니, 나도 내가 어떻게 폭풍을 뚫고 나왔는지 모르겠다. 어둠녘의 폭풍에서 빠져나오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머릿속에는 알 수 없는 속삭임이 울려 퍼졌다.
“Ikro vli ve shavod.”
날 구출한 남자의 말에 따르면 당시 난 알 수 없는 단어를 웅얼대고 있었다 한다. “Oeda vli stishad!” 물론, 난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동료 탐험가들은 겁을 먹고 내가 죽을 거라 짐작했다. 그리고 마치 날 역병 걸린 인간처럼 취급하고 탐험도 당장 중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헛소리! 겁쟁이들! 어둠녘의 심연을 겪지도 않은 주제에 이 무슨 꼴불견인가. 난 당장 일기에 사슬고리 밑그림을 그렸다. 탐험복 어깨에 사슬고리를 달면 어둠녘의 폭풍 속에서도 단단히 자세를 고정할 수 있으리라.
결국 이 일곱섬 군도에서 벌어지는 기현상도 내가 밝혀낼 것이다.
모든 비밀이 밝혀질 때까지 ''마르팀 워커''}}} |
2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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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팀 워커 서신(書信) 회수본 발췌
조합장 이외의 자는 열람 엄금
어둠녘을 탐험한 지 몇 주 아니 몇 달이나 지났을까. 시간의 흐름은 어둠녘 속에서 뒤틀리기에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하기 쉽지 않소. 어쨌든 끓어오르는 어둠녘을 뒤로하고 오염되지 않은 '순수의 땅'에 발을 디디니 새삼 모든 게 신기하더군. 시끌벅적하기만 할 뿐 무의미한 마을과 도시들, 덧없는 정부와 기관에 둘러싸여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주민들. 그간 '환영 도약'으로 어둠녘을 헤치는 도중, 난 그 사이사이에서 조막만 한 순수의 땅을 봐왔소. 인간들은 채 한 뼘도 되지 않을 영토 안에서 자신들을 격리하고 만족하며 살아가더군. 사실 그들로서는 내가 괴물처럼 보일 것이오. 소용돌이치는 어둠녘 속에서 시커먼 복장과 사슬고리를 달고 나타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니 오해받아도 할 말 없지. 문헌을 곱씹어보면 예로부터 이런 과정으로 설화, 전설, 민담 따위가 퍼져나가기 마련이니.
그대의 편지는 초승달 도시에서 받아보았소. 내 탐험을 더는 후원할 수 없으니 그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적혀있더군. 가장 큰 이유는 에벤타이드 조약이 만료되었다는 거고, 그 밑으로 내가 다칠 걸 걱정하는 내용이 주저리주저리 달려있었지. 실제로 힘의 우물 근처에서는 어둠녘의 폭풍이 강해지지만, 튼튼한 사슬고리 덕분에 몸을 지탱하는 데는 전혀 문제 없소. 또한, 흉포한 어둠녘 야수도 사슬고리를 걸고 흔들어주면 거짓말처럼 얌전해지지.
그러나 내 정신 상태에 대한 그대의 걱정은 유효하오. 이제 난 어둠녘이 근처에 있으면 끊임없는 환청을 듣소. 내가 환영 도약으로 놈의 심부(深部)를 헤집고 다니는 것에 대한 복수일 수도... 어둠녘은 나조차도 몰랐던 나에 대한 것을 말한다오. 이런 거대한 고독에 빠져보지 않았을 땐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사실들을 말이오. 누군가 커다란 창으로 내 가슴에 구멍을 뚫어놓은 것 같소. 백번 양보해 긍정적으로 보자면 인류의 삶과 이 세상에 대한 통찰력이 더 깊어졌을 수도 있겠지.
지역 군도민(群島民)과 충만한 밤을 보낸 뒤 올리브 해변으로 나아가는 중이오. 그대의 염려는 잘 알겠소. 하지만 그대도 내가 발견한 것과 지도를 보면 모두 이해할 수 있을 거요.
모든 비밀이 밝혀질 때까지
마르팀 워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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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팀 워커 서신(書信) 회수본 발췌
조합장 이외의 자는 열람 엄금
편지에 두 대륙에 있는 힘의 우물 위치를 동봉하오. 어둠녘이 창궐한 기디아의 통치주(州) 아우릴리엄과 르나이아, 타이젠 관문 둘러싼 시퍼런 바다 밑, 어둠녘의 영향을 받아 생태계의 야만성이 극대화된 올리브 해안, 호랑이 반도의 일곱섬 군도와 호랑이 반도, 고대의 장벽과 잊힌 대륙을 관통하여 건널 수 없는 신기루 사막의 깊숙한 곳까지. 그대는 분명 봐야 하오. 그리고 하나도 놓쳐서는 안 되오. 나의 탐험의 중요성과 그대의 후원이 하는 이 엄청난 역할을 말이오.
조합에서 나와 내 업적을 폄하하고 내 가족까지 연좌제로 엮었다 들었소. 고향의 내 가족은 이제 생활비도 떨어지고 아이들은 직장도 구할 수 없게 되었소. 심지어 기디아에서는 이 마르팀 워커가 죽었다고 하고, 내 서적들을 불온 도서로 지정하여 폐기처분 했다던데 사실이오? 분명 이는 날 증오하는 어떤 이가 지어낸 헛소리요! 어쨌든 내 개인소장품은 안전을 위해 유리 도시에 있는 통찰의 저택(邸宅)에 보관해 두었소.
실은 내가 유리 도시에 잠시 머물 때 의사들이 날 검진했다오. 진찰실 거울 앞에서 난 정말 오랜만에 탐험복을 벗은 내 모습을 봤소. 피부 색깔이 거무튀튀한 색으로 바뀌었더군. 거금을 들인 탐험복도 어둠녘의 영향을 완전히 막진 못한 것이오. 그리고 이는 내 '어둠녘의 침식(浸蝕)' 가설을 뒷받침할 중요 증거가 될 거요. 신기루 사막의 내로라 하는 과학자들도 여기에 동의했다오.
모든 비밀이 밝혀질 때까지 마르팀 워커}}} |
3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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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팀 워커 일지(日誌) 회수본 발췌
새로 취임한 조합장이란 녀석이 내 업적을 출판하길 거부했다. 심지어 날 광증에 빠진 머저리로 취급했다 한다. Stida evibez! 아내가 오래전 보냈던, 이젠 나이가 들어버린 내 아이들 대한 편지도 읽어보았다. 겨우 몇 달 전 고향을 떠나며 아이들의 뺨에 입맞춤했는데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났다니... 시간의 흐름은 어둠녘 속에서 무척 변덕스럽다. 해와 달의 움직임 그리고 별자리까지 세심히 관찰한 결과, 내가 집을 떠나온 지 무려 90년이 지났다는 걸 알아챘다. 놀라운 일이다. 내 허약한 육신(肉身)은 애초에 바스러져야 하는데 강화제를 먹은 것처럼 팔팔하다. 이 괴현상에 대해 상세히 적어두자. 지도기록자들이 이단이라 욕해도 날 막을 수 없다. 세상을 뒤흔들 이런 귀중한 정보를 알아보지 못하다니 쯧쯧쯧.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도 유분수지!
나는 이제 인간의 언어를 말하지 못한다. ida gekra ivi beu idat daxdaz. 오로지 수화를 통해서 매우 천천히, 순수의 땅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다. 물론, 그때도 어둠녘의 환청은 끊임없이 들려온다.
또한, 난 어둠녘의 야수들과 소통하는 법도 배웠다. bast! Ikra dabdaz vis. 아, 소통을 하는 거지 통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놈들은 식초보다 톡톡 쏘는 리옹의 여름 여왕만큼이나 까탈스러우니까. 허... 그 고지식한 여자의 치세가 계속되길! 내가 발견한 것들을 그녀에게 보내야겠다. 듣자니 여왕의 군대는 산속 깊숙한 힘의 우물에서 자원을 추출한다고 한다. 내가 기록한 힘의 우물 지도가 있다면 여왕의 군대는 이를 발판삼아 더 강력해질 것이다. 곧 에벤타이드를 평정하고 쇠락하는 기디아 제국에 탐욕의 이빨을 들이밀겠지. 뭐, 날 광인 취급한 기디아에의 사소한 복수라고 해 두자.
모든 비밀이 밝혀질 때까지
마르팀 워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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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기록이 모든 역사서에서 사라졌다. 기록말살형(記錄抹殺刑)이 내려진 것이다. Ide velshibe ebbat ide vli gekre. 그래도 상관없다. ide vl’oede idam bastad. 지도제작자들이 기디아의 정치놀음에 정신 못 차릴 때, 오직 나만이 야만의 세상을 탐험하고 미지의 세계를 기록했다. Ide f’ijbre jid idam. 어둠녘의 힘이 점점 강해져 토양을 좀먹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을 테지. Ikri ust edu beu idum. 그것은 살아있는 생물과 같다. 물에 조금씩 젖어 드는 종이처럼 우리의 마음에 침투해 공포를 심는다. hehva… ov hehva... 그 엄청난 어둠! 과연 이 대자연의 현상을 거부하는 것만이 능사인가? 인류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어둠녘을 받아들여 우리 혈관을 가득 채워야 한다. 우리의 심장은 어둠의 힘으로 힘차게 뛰어야 한다. 현재 인간이 알고 있는 세상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다. 바로 지근(至近)에 무한한 힘이 넘치는 어둠녘이 있는데 어찌 이를 이용하지 않는 것인가! 받아들이고 동화(同化)하면 더는 사회 제도의 비천한 노예로 기어 다니거나, 하루살이처럼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된다. 어둠녘 안에서는 오늘도 jid’hok도, 죽음의 공포도 없다. 나에게 진정한 멸망이 찾아오는 날 내 시체는 웃으며 썩어갈 것이다. 역사의 한 장을 멋지게 장식했다고 자평하며.
모든 비밀이 밝혀질 때까지
마르팀 워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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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녘은 무엇이고 세상은 무엇인가... givav… 모든 것이 뒤섞여 혼란스럽다. 속삭임이 끊임없이 들려오는 이유는 오직 나만이 진정으로 어둠녘을 이해해서 그런 게 아닐까. 오늘 아침, 부칠 지도와 일기 꾸러미를 들고 순수의 땅으로 향했다. 항구로 가는 도중 난 오직 어둠녘의 언어만 듣고 중얼거렸다. buvo exi stex? 그리고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마침내 깨달았다. 어둠녘은 세상이다! 인간들이 순수의 땅에 살아가는 것처럼 나도 어둠녘의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Ve dlibu... 양자는 동전의 앞뒤, 현실과 꿈의 관계와 같을지니... 꿈을 꿀 때 꿈속의 존재에 얼마나 가치를 두는가? 무의미하다. 그리고 그건 어둠녘의 야수들도 마찬가지. 그들이 순수의 땅의 존재들을 사냥하고 죽이는 건 당연하다. 그렇게 허무한, 약해빠진 생명체는 공기를 들이마실 자격이 없다.
어둠녘으로 돌아가기 전 생각을 정리하자. 내 머릿속에서 인간의 언어가 점점 사라지고 있음이니. 언제부턴가 난 순수의 땅에 거할 때도 어둠녘의 속삭임을 듣는다. 속삭임만이 나의 유일한 동반자. ikri ust beu idam. 어찌 되었든 이제 내가 살아가는 세상은 하나뿐. 내가 어둠녘이고 어둠녘이 나다! 그 누구도 날 막지 못한다. Ikri idat, e voda vl’ebbut.
모든 비밀이 밝혀질 때까지
마르팀 워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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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은 날 보고 괴물이라 한다. ide ikre kiovebraka 아내의 달콤한 목소리, 흩어지는 아이들의 웃음, 어머니가 구운 구수한 빵과 버터의 냄새, 심지어 내 이름까지 모든 것들이 아침 안개처럼 바스러져 간다. 이제 난 전래동화에 나오는 공포의 존재가 되었다. '착한 어린이는 절대 순수의 땅을 벗어나면 안 돼. 어둠녘의 추적자가 널 잡아먹을 테니...'
그동안 잡다한 소식의 편린을 들었다. 기디아에서 발발한 내전, 호랑이 반도에서 발굴된 수정 광산, 통찰의 저택이 일궈낸 기술 혁명, 그리고 갓 즉위한 새파란 폭풍 여왕이라는 자가 몽릴에 있는 힘의 우물 위에 새로운 도읍을 세웠다는 사실도. 그렇다. 난 때를 기다리고 있다. 그때가 오면 날 멸시한, 내 삶을 망치고 내 이름을 진흙탕에 처박고 내 가족을 파멸로 이끈 제국에게 복수할 것이다. 어둠녘의 추적자...Ikra ov... 그래 나보고 괴물이라 했겠다? ikri v’ahskad f’ave.
Edu drovliz ikre skiv gekradaz, 어둠추적자}}} |
20. 로렐라이[편집]
로렐라이 영웅 이야기 |
1편 '용의 몰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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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지오의 아름다운 노래를 듣기 전,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은 언제나 그대로였다. 그녀는 물고기떼와 춤추고, 산호 정원을 가꾸고, 진주조개와 대화를 나누고, 해파리와 말미잘 사이를 헤엄쳤다. 그리고 매년, 위대한 거북 아르케론이 머리 위를 지나갈 때마다 장난스럽게 거북의 배를 두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수면 위에서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참으로 아름다운 곡조이자 그녀가 처음으로 들어보는 노래였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수면 위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자, 천족 하나가 장엄한 날개를 고이 접고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안녕. 로렐라이."
그렇게 그가 불러주었을 때, 그녀에게 처음으로 이름이 생겼다.
"나는 아다지오. 그대에게 줄 선물을 가져왔다."
아다지오가 손을 펼치자 탐스러운 오렌지 하나가 보였다.
놀란 로렐라이의 입에서 심심풀이 삼아 물고 있던 해마가 떨어졌다.
"와 정말 예쁘네요. 이게 말로만 듣던 태양인가요?" 로렐라이의 눈이 반짝였다.
"이건 오렌지라고 하지. 먹는 거야."
로렐라이가 오렌지에 코를 내고 냄새를 맡자 과일 특유의 상큼한 향이 났다. 맹세코 바닷속에서는 단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신선한 향기였다.
"용의 몰락 깊숙이 파묻힌 알을 내게 가져와. 그럼 이 오렌지를 그대에게 주지." 아다지오가 오렌지를 다시 감췄다.
로렐라이는 시커먼 바닷속으로 끊임없이 잠수했다. 산호초를 지나, 물고기 떼들을 뚫고 마침내 심해 아귀의 반짝이는 낚싯불만 보일 때, 로렐라이는 바다 밑바닥에 도착했다. 적막함만이 가득한 이곳엔 현재의 바다가 육지였을 때 멸망한 용의 뼈들이 가득했다. 로렐라이는 용의 몰락 진흙 속을 뒤져 거대한 알 하나를 들고 수면으로 올라왔다.
밝은 햇살을 비추자 알은 금빛으로 빛났다. 아다지오는 로렐라이를 칭찬하며 오렌지를 건넸다. 허겁지겁 받아들고 깨무는 로렐라이에게, 아다지오는 웃으며 먼저 껍질을 벗기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로렐라이는 껍질 채 씹었다. 바닷속에서만 산 그녀는, 태양을 닮은 싱그러움을 뿜어내는 이 과일의 작은 한 조각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다지오가 알을 들고 날아오르자 로렐라이는 바다로 돌아갔다. 그리고 또다시 물고기들과 춤추고 산호 정원을 가꾸며 오랜 세월을 보냈다. 로렐라이는 아다지오의 노래와 오렌지의 맛을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그녀가 아르케론의 배를 다시 천 번 간지럽혔을 때, 잊은 지 오래된 노래곡조가 다시 들려왔다.
이번에도 아다지오와 인사를 나눈 로렐라이는 해저에서 알을 꺼내왔다. 노란색 소용돌이 문양이 새겨진 알을 건넨 로렐라이는 어김없이 아다지오에게 오렌지를 대가로 받았다.
그리고 또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아르케론의 배를 천 번 간지럽혔을 때, 로렐라이는 점박이 알을 아다지오에게 주고 그와 함께 파도치는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왜 아르케론이 천 번 지나갈 때마다 알을 구하는 거죠?" 로렐라이가 손가락에 묻은 끈적한 오렌지즙을 핥으며 물었다.
"그게 인류의 멸망 주기이기 때문이지." 아다지오가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용들이... 멸망했던 것처럼요?" 로렐라이가 꼬리를 파닥였다.
아다지오는 따스한 눈빛으로 로렐라이를 바라보았다.
"인류는 다른 생물보다 빠르게 지식을 배우고 환경에 적응하지. 하지만 그만큼 빠르게 문명을 만들고 탐욕이라는 함정에 빠진다. 태곳적 용들이 그랬던 것처럼 멸망을 부르는 탐욕 말이야. 이 알은 인류에 대한 구원이다."
"흐음... 꽤 어려운 말이군요." 로렐라이가 인상을 찡그렸다.
"때론 모르는 게 약이 될 때도 있는 법."
그리고 다시 아르케론의 천 번 주기가 돌아오기 직전, 로렐라이가 정확히 구백구십 다섯 번 아르케론의 배를 간지럽혔을 때 노랫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녀는 기쁨에 넘쳐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었으나 어디에도 아다지오는 없었다.
"안녕 로렐라이." 목소리로 판단하건대, 이 여자가 노래를 부른 게 맞았다. 검은 외투를 입은 여인은 머리에 왕관을 쓰고, 앞이 보이지 않는 듯 두 눈을 가리고 있었다. 불길해 보이는 까마귀 떼들이 여자의 머리 위를 빙빙 돌았고, 그녀는 한 손에 오렌지가 가득 든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로렐라이는 여태껏 이리 많은 오렌지를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호기심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당신은 사람인가요?"
"나는... 여왕이다."
"그대도 알을 원하나요?"
"그래. 알 중에서도 특별한 녀석이 필요하지." 여왕이 미소지었다.
그 말을 들은 로렐라이가 용의 몰락을 뒤져 알 하나를 가지고 올라왔다. 보라색과 분홍색이 섞인 아름다운 알이었다.
"당신이 말하는 알이 이건가요?" 로렐라이가 알을 내밀었다.
"고맙구나 로렐라이.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이 알이 아니란다. 다른 알을 더 가져다주면 오렌지를 또 주마." 여왕이 알을 경비대원에게 넘기고 로렐라이에게 먹음직스러운 오렌지를 주었다.
로렐라이는 오렌지를 우물거리다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오렌지를 더 준다고? 한 번에 하나만 받을 수 있는 거 아니었어? 수 천 년이 지났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다! 그녀가 허겁지겁 잠수해 이번엔 푸른 줄무늬 알을 가져오자 여왕의 경비대가 나와서 알을 받았다. 로렐라이의 기대 대로 여왕은 이번에도 오렌지를 상으로 주었다. 행복한 표정으로 오렌지를 먹으며 로렐라이가 물었다.
"이 알인가요?" 내심 아니길 바라는 눈빛이었다.
"아니. 하지만 아직 오렌지는 많이 남았단다." 여왕이 오렌지 바구니를 흔들었다.
그렇게 로렐라이는 몇 번이나 바닷속을 들락거리며 알을 날랐다. 이윽고 경비대원들의 팔이 알들로 가득 찼을 때, 로렐라이는 너무나도 어두워 바라보는 것만으로 두려운 알을 가져왔다.
"잘했구나. 그래 바로 그 알이다." 여왕이 속삭였다.
"다행이네요. 그럼 이 알이 인류를 구원해 주나요?" 로렐라이가 손뼉을 쳤다.
여왕은 잠시 멈춘 채 로렐라이가 뱉은 말의 의미를 생각했다. 상공을 맴돌던 까마귀 한 마리가 로렐라이에게 다가가 고개를 까딱이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구원이라... 적어도 이번은 아니다." 그리고 여왕은 로렐라이에게, 아직도 오렌지가 절반이나 남은 바구니를 건네고 길을 떠났다. 그녀와 경비대가 저 멀리 사라지자 맑았던 하늘에 먹장구름이 일기 시작했다. 로렐라이는 불청객들이 떠나간 자리에 남아 멍하니 자리를 지켰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로렐라이는 바위 위에 하염없이 앉아 배가 아파올 때까지 오렌지를 먹어치우고 바다로 돌아갔다.
이후 아르케론의 배를 고작 다섯 번만 긁었을 때, 노랫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번엔 여왕이 아닌 아다지오가 언제나처럼 한 손에 오렌지를 하나 들고 로렐라이를 찾았다. 그녀가 붉은색 알을 건네주자 아다지오가 오렌지를 내밀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로렐라이는 오렌지를 거절했다.
"오렌지는 괜찮아요. 대신 내게 진실을 말해줘요." 그녀가 요구했다.
"이 용들이 인류를 구원하는 건 사실이다. 안식의 밤이 타오르는 낮을 덮어야만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는 것처럼. 천지조화와 자연의 섭리이지. 마치 죽음이 삶의 구원인 것처럼..." 아다지오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그가 떠나간 뒤, 로렐라이는 태양이 하늘 가로지르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활활 타오르다가 노란색으로 그리고 핏빛으로 빛나다 마침내 아스라이 수평선으로 넘어가는 것을. 천지가 무채색의 흑야로 뒤덮였을 때, 로렐라이는 소름 끼치는 진실을 깨달았다.}}} |
21. 바리야[편집]
바리야 영웅 이야기 |
'여왕의 묘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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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여왕은 앤빌의 왕에게 악의 가득한 협박을 하는데...
높디높아 생명이 살아가는 데 필수인 대기마저 희박한 곳. 찬란한 공중 도시 앤빌은, 물결을 헤치는 범선처럼 푸른 하늘을 가로질렀다. 신이 빚어낸 듯한 이 기적의 도시 가장자리를 어둠녘에 물든 까마귀 한 마리가 선회했다. 까마귀의 광기 어린 눈빛은, 엔빌의 중심지에 있는 세간의 지식을 집대성한 대도서관을 향했다. 그리고 곧 날개를 접고 급강하하는 매처럼 도서관의 유리창을 깨고 침입했다. 흩날리는 유리 파편이 까마귀의 깃털을 뚫고 박혔고, 피가 차가운 바닥을 수놓았다.
책장에 빽빽이 꽂힌 수많은 책들. 그리고 표지에 박혀있는 기괴한 외눈박이 눈알들. 그 눈알들이 초대받지 않은 손님을 바라보았다. 까마귀는 책들의 시선은 안중에도 없는 듯, 도서관 중앙의 커다란 파란 수정을 맴돌았다. 억겁의 세월을 살아온 고대인. 앤빌의 왕이자 두 얼굴을 한, 세상의 관찰자가 수정 안에 있었다. 관찰자는 까마귀가 침입했는데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대신 까마득한 책장의 한구석에서 마법서 하나가 떠올랐다. 그리고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개입한 것처럼, 책장이 정신없이 넘어가더니 마법서의 빈 쪽이 드러났다. 관찰자가 입술을 움직이자 고풍스러운 서체로 말이 책에 적혔다.
"몽릴 깊숙한 곳... 힘의 우물이 다시 차오를 때, 에벤타이드에서는 폭풍 여왕이 일어나 어둠녘에 대항해 순수의 땅을 지켰다. 여왕은 어둠녘의 거대한 힘을 꺾기 위해, 정예 군을 조련하고 백성들의 철저한 통합을 명했다."
미쳐버린 까마귀는 머리통이 까지는 건 아랑곳하지 않고, 일생일대의 적수를 만난 것처럼 수정에 머리를 부딪쳤다. 까마귀가 머리를 박을 때마다 수정을 밝은 녹색으로 빛났다 다시 파란색으로 돌아갔으나, 두 얼굴로 과거와 미래를 내다보는 관찰자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 기록을 이어갔다.
"그러나 가진 힘만으론 어둠녘에 대응하기 버거워지자, 여왕은 도움을 청했다. 생명이 발을 딛고 선 지상의 세상이 아니라 연옥과 천상에서... 두 곳 모두 어둠녘의 힘이 감히 미치지 못하는 곳. 여왕은 타락한 까마귀 둘을 각각 보내 그녀의 뜻을 전했다."
어느덧 힘이 다한 까마귀는, 피 섞인 녹색 안개를 토하며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연옥에서처럼 천상에서도! 연옥에서처럼 천상에서도!"
"이에, 앤빌의 왕이자 세상의 관찰자는, 천둥의 지배자 바리야를 소환해 에벤타이드를 구하고자 하는 여왕의 부름에 응하노라."
관찰자의 말이 끝나자 책이 덮이더니 허공에서 변하기 시작했다. 찢기고 뜯어지고 접히던 책은 까마귀가 지켜보는 와중에 바리야로 변했다. 관찰자의 의지가 세상에 현현한 것이다.
바리야가 양손을 들어 올리자 앤빌을 둘러싼 온 하늘이 울렸다. 무시무시한 전하가 도서관을 가득 채웠고, 응축되고 응축되어 그녀의 손에서 무시무시한 천둥창으로 변했다. 바리야가 손을 뻗자, 천둥창은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가 까마귀의 심장을 꿰뚫었다.
여왕의 전령을 처리한 바리야는 무심히 지켜보고 있는 관찰자를 바라보았으나, 관찰자는 더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이후 바리야는 도서관을 빠져나와 까마득한 절벽이 내리꽂히는 공중 도시의 가장자리로 걸었다. 그리고 삶과 죽음의 수레바퀴가 돌아가는 곳, 사랑과 전쟁의 줄다리기가 벌어지는 곳, 어둠녘과 순수의 땅의 혈투가 펼쳐지는 곳, 바로 지상으로 떨어졌다. 그녀 머리 위에서 전하가 모여 번개 구름을 형성했고, 수천 마리의 말벌 떼가 우는 것 같은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장이 나를 부르나니...' 바리야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마침내 천둥 번개와 함께, 바리야가 지상에 강림했다.}}} |
22. 토니[편집]
토니 영웅 이야기 |
1편 '토니의 여행: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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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팔에 낀 핵주먹으로, 몽릴 중심부로 통하는 마지막 바위를 부순지 여러 달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난쟁이들은 출입을 금하는 노란띠를 구멍에 친 채, 함부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당신은 곰팡내 가득한 어두운 구멍으로 머리를 내밀어 봅니다.
"안돼요. 토니." 단장이 당신의 목덜미를 잡아챕니다.
"이봐요 필리파. 저 안에 대체 뭐가 있는지 난 확인하고 싶다고요." 당신이 투덜댑니다.
"그대의 능력은 잘 알아요. 하지만 여긴 전문가에게 맡기세요. 당신은 폭발 전문이지 탐험가가 아니잖아요. 참, 지상의 '왕관 오름'에 굴을 뚫어줄 난쟁이가 필요하다는 소식이 들어왔어요. 제가 볼 땐, 토니 당신이 딱 맞네요." 단장이 말아쥔 도안으로 당신의 가슴을 쿡쿡 찌릅니다.
"좋아!" 당신은 단장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대부분 난쟁이는 지상을 무서워하지만 당신은 다릅니다. 탐험심이 넘치거든요! 당신은 단장이 건넨 도안을 옆구리에 끼고 지상으로 나가, 기나긴 산길을 따라 왕관 오름으로 향합니다.
왕관 오름까지의 여정은 온종일 걸립니다. 당신은 다리가 너무 아파 잠시 '성역'에서 휴식합니다. 저 멀리 폭풍 여왕의 궁전과 수도의 모습이 보입니다.
좋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일할 시간입니다. 당신의 눈앞에 왕관 오름으로 가는 길이 세 갈래로 나뉘어 있습니다.
왼쪽으로 갑니다.
오른쪽으로 갑니다. 중간으로 갑니다.}}} |
여담으로 처음으로 선택지가 있는 유저가 만들어가는 스토리이다.
23. 켄세이[편집]
켄세이 영웅 이야기 |
1편 '검성 켄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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삡...
삡...
삡...
~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타이젠 관문 부두는 비릿한 바다내음이 가득했다. 켄세이는 하역 작업을 서두르는 인부들의 고함을 헤치며 화려한 도시의 중심부로 향했다.
그의 손엔 만물상에서 산 지도 칩이 들려있었다. 타이젠 관문은 중계 무역과 교역으로 번창한 곳. 무분별하게 개발된 도심 뒷골목은 지도 없이 들어가기엔 너무 벅찬 곳이었다. 켄세이가 지도 칩을 홀로그램 기계에 꽂으니 허공에 오밀조밀한 타이젠 관문의 지도가 나타났다. 그의 손가락이 홀로그램을 스치듯 지나가자 평화의 신전과 그곳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이 반짝였다.
가만, 분명 켄세이는 과거에 이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후 무엇이 일어날지도...데자뷰...
번쩍!
순간 도시의 모든 물체가 정지했다. 반짝이는 눈으로 아름다운 정원을 둘러보던 관광객도, 거드름을 피우며 가마 위에서 고개를 끄덕이던 아우레리엄 귀족도, 모두 석상이 된 듯 그 자리에 멈췄다.
~
삡...
삡...
대체 무슨 일이?
경계심을 거두세요. 그대는 심하게 다쳤답니다. 꽤 오랜 시간 정신을 차리지 못했어요.
~
켄세이가 놀라서 돌아보자 호리호리한 체구의 여인이 당당하게 서 있었다.
~
그대는 누구요?
키네틱. 제 이름은 키네틱입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당신은 지금 실타래를 풀고 있습니다. 기억의 실타래를...
~
켄세이가 홀로그램 장치를 끄자 목석같았던 거리의 사람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켄세이는 자신의 장검이 행인들의 눈에 띄지 않게 주의하며, 음침한 하수구와 쓰레기 더미 가득한 뒷거리를 뚫고 평화의 신전으로 향했다. 그리고 신전에 방문해 봉헌함에 동전을 넣으며 기도를 외었다.
저의 정신과 육신을 단련할 시련을 내리소서...
타이젠 관문의 학교 지구는 비행선을 타고 들어가야 했다. 속속들이 들어오는 비행선을 타고 내리는 어린 학생들은, 배낭에 각자 좋아하는 타이젠 두목의 캐리커처를 새겨두었다.
비행선 탑승장 뒷골목에는 기모노를 입은 아름다운 마담들이, 저마다의 도박장에서 즐기고 가라며 켄세이를 유혹했다. 얼핏 설핏 보이는 도박장 내부에는 왁자지껄한 소음과 매캐한 담배 연기가 가득했다. 어른들은 바쁘게 손을 놀리며 마작 패를 쌓는 데 여념이 없었고, 아이들은 그사이를 오가며 각종 심부름과 허드렛일을 도왔다.
켄세이는 온갖 인간군상의 욕망이 뒤엉킨 그곳을 지나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행여나 실수로 불타는 만으로 이어지는 매캐한 골목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조심하며...
~
삡...
삡...
내 눈 앞에 펼쳐지는 이것들은 대체 뭔가?
전자기 최면이라는 치료법입니다. 현실에서 돌이킬 수 없는 큰일을 겪었을 때 발생하는 충격을 완화해주죠.
으윽... 맞아... 그때 분명 폭발이 있었고...
서두르지 마세요 검의 달인이여. 천천히. 천천히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세요.
~
타이젠 관문 밖, 매캐한 도시의 공해가 잦아들고 맑은 공기가 심신을 쓰다듬는 곳. 평화로운 오솔길이 과수원 사이로 이어지고, 고즈넉한 저택 사이의 논에 황금빛 물결이 일렁이는 곳.
켄세이는 그곳에 있는 세 번째 두목의 도장(道場)을 방문했다. 그가 정문에서 검을 휘두르자 도장의 결계가 찢어졌다.
'삐잉삐잉'
즉시 요란한 경보음이 울려 퍼지고 각종 날붙이와 총기류를 꼬나쥔 도장 생도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생도들 뒤에서, 무예복을 입은 단단한 체구의 사내 하나가 천천히 켄세이에게 다가왔다. 그의 상의엔 "배"라는 자수가 수놓아져 있었고 호랑이처럼 부리부리한 눈은 켄세이를 꿰뚫듯 노려보았다.
"무인의 대결을 원하는가?"
"그렇소."
켄세이가 정중히 두목에게 인사를 건넸다.
"후후. 명성이 자자한 검성과 칼을 섞을 수 있다니 영광이군. 그럼 차나 한잔하며 대결을 논해볼까?"
"좋소."
"경보 해제."
두목이 명령하자 경보음이 잦아들고 생도들도 켄세이에게 겨눴던 저마다의 무기를 내렸다.
~
"내 기억으로... 그때 분명 새하얀 눈이 내렸소."
"타이젠 관문에 눈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
고즈넉한 다방(茶房)의 고풍스러운 탁자를 앞에 두고 두 사내가 마주 앉았다. 도장 생도들은 신경을 곧추세운 채 둘의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집중했다.
"타이젠 관문은 본토와 분리된 지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났소. 대륙의 무사들이 떠받드는 무사도 따위 여기서는 한낱 공염불에 불과하지."
두목이 향기로운 차를 다기에 가득 따르며 켄세이를 바라보았다.
"안타깝군."
"그렇게 생각하는 그대도 마찬가지라오. 당신은 케케묵은 구시대의 유물. 이제 무사들의 세계는 힘이 지배하지. 뜬구름 잡는 명예 따위가 아니라."
"각설하고, 단 일격에 승부를 가리지."
켄세이는 인상을 찡그리며 두목의 말을 끊었다.
“아니. 승부는 어느 한쪽이 죽어야 나는 법이오.”
"죽음이라. 대체 나의 죽음으로 그대가 얻는 게 무엇인가?"
"구태의연한 명예에 눈이 먼 켄세이를 격파하고 진정한 검성이 되는 것이지."
두목이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어쩔 수 없군. 진정 어느 한쪽이 죽어야 승부가 나겠구려. 서로의 무기는 오로지 검으로만?"
"그렇지. 오직 검으로만!"
"알겠소. 그럼 연무장으로 가시겠소?"
"굳이 거기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켄세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때 두목의 단검이 날아들었다. 첫 번째 단검은 켄세이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고, 두 번째 단검은 그의 뺨에 옅은 상처를 냈다.
켄세이도 빛살처럼 장검을 뽑아 반격에 나섰다. 두목의 손에서 단검이 추가로 날았으나 켄세이의 검술에 막혔고, 튕겨 나간 단도는 주변의 애꿎은 생도의 목숨만 앗아갔다.
"내 생각보다 훨씬 민첩하구려."
"암습이라니. 이게 대체 뭐 하는 짓거린가!"
켄세이가 움직임에 방해되는 외투를 벗으며 꾸짖었다. "말했지 않소. 무사도? 명예? 모두 다 쓸데없는 것. 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적의 목숨을 취할 뿐이라오. 비열하다? 후후 죽은 자는 말이 없지."
"개소리. 모두 개소리다. 내 검이 너를 벌하리라!"
두목과 켄세이는 본격적으로 대결을 시작했다. 두목의 단검이 재차 허공을 가르며 켄세이를 노렸고 켄세이의 검은 미려한 궤적을 그리며 두목의 목을 찔렀다. 두 고수의 격렬한 대결에 한지로 세워놓은 다방의 벽면이 사정없이 찢어지며 흰 눈처럼 사방에 흩날렸다.
한바탕 폭풍이 휘몰아친 뒤, 켄세이는 한 발짝 물러나며 장검을 눞이며 중단세를 취했다. 두목의 눈이 커지고 방어하려는 순간, 엄청난 위력의 참격이 켄세이의 검에서 뻗어 나와 두목의 몸을 갈랐다. 누가 봐도 승부가 갈린 그 순간,
켄세이의 코에 알싸한 마법의 향기가 아렸고 두목의 손에서 새파란 빛이 퍼져 나왔다.
"쾅!"
엄청난 충격이 도장을 흔들었고 켄세이의 의식도 흐려졌다.
~
제가 하나까지 세면 당신은 눈을 뜹니다.
다섯
넷
셋
둘
하나
자 눈을 뜨세요.
~
시야에 흐릿한 방이 들어온다. 휘황찬란한 달빛이 고층건물과 높은 탑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지는 밤이다.
규칙적인 기계음. 현실과 과거를 오가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 계속 들렸던 소리다.
자신을 키네틱이라고 말한 여자가 내 머리맡에 있다.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을 본 그녀는, 검은 장갑을 낀 손을 들어 귀에 대고는 말했다.
"보고합니다. 최면 치료는 성공했습니다."
"그가 마법을 사용했소."
“세 번째 두목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부하는 것으로 유명해요. 우리들 사이에서 괜히 별명이 미친 개인 게 아니죠.”
“내 검은 어디 있소?”
“바로 옆에 놓아두었어요.”
침상 옆을 더듬어 보려 해도 팔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
"끙. 마치 내 몸이 아닌 것 같군."
"당분간은 그럴 거예요."
“내 부상이 심했소?”
"안타깝지만 그래요. 총체적 난국이었죠. 상태를 호전시키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어요. 치료를 위해서 전자기 최면도 동원했고요. 당신이 살아난 건 정말 천운이에요."
"아니. 난 운을 믿지 않소. 말해주시오. 대체 왜 신 아우레리엄이 내 목숨을 구한 것이오?"
키네틱은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배 두목이 이끄는 조직원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찾아왔어요. 그 수는 백 명이 넘고 날마다 불어나고 있어요. 아직 타이젠 관문에서 무사도는 중요해요. 그들 중 상당수는 비열한 방법을 쓴 배 두목 대신 당신을 세 번째 두목으로 인정하고 있어요."
어쭙잖은 소리.
"흥. 내가 모를 줄 아시오. 경고하겠소. 나를 구해서 꼭두각시 두목으로 만들고 뒤에서 이득을 취하려는 거라면, 번지수 잘못 짚었다 해두지."
나의 비아냥을 들은 키네틱은 꼈던 팔짱을 풀더니 자그마한 장치를 들어 단추를 눌렀다. 바로 기분 나쁜 기계음이 울려 퍼지고 온몸의 혈관을 잡아 뜯는듯한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으, 으윽...!"
삐삐삐삐삐삐삐삐...
"계속 설명드리죠. 부상이 심해 당신의 팔과 다리는 절개해야 했어요. 대신 기계 의수와 의족을 달았죠. 최신 기술이 집약된 훌륭한 녀석들이지만, 처음 당신의 신경계와 접속할 때 상당한 고통이 따를 거예요. 그래도 금방 잦아드니 조금만 참으세요."
삐.. 삐.. 삐.. 삐.. 삐.. 삐..
난 고통 속에 헐떡이며 주먹을 쥐고 다리를 펴 보았다. 원래의 팔다리보단 어색하지만 썩 훌륭한 움직임이다.
삐..... 삐..... 삐.....
기계 팔로 조심스레 검 자루를 쥐어보니 단단한 감촉이 느껴진다.
"전화위복이라 했나요. 그 지독한 부상 후 우리의 기술로 당신은 새롭게 태어났어요. 더 강하고, 빠른 육신을 가지고요. 이젠 누구도 당신을 막을 수..."
난 그녀를 노려보며 순식간에 검을 뽑았다.
'챙'
누구도 피할 수 없을 속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일도양단을 날렸다.
하지만 키네틱의 잘린 부위에서는 피가 흐르는 대신 디지털 허상이 되어 흩어지더니 다시 모였다.
“막을 수 없죠. 오직 한 사람, 나만 빼구요.”
키네틱의 홀로그램이 조롱하듯 생긋 미소를 지었다.
무리한 움직임으로 휘두른 검이 병실 바닥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나는 분노해서 외쳤다.
"난 그대들의 정치놀음 따위엔 어울리지 않는다! 차라리 날 타이젠 관문의 경찰에 넘겨다오!"
"진정하세요 켄세이. 우린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타이젠 관문과 신 아우레리엄의 힘을 합쳐 저 악의 제국을 무너뜨릴 거라구요."
"대체 너희들은... 그러고 보니 키네틱이란 이름. 그것도 본명이 아닌 것 같군."
“피차일반이죠. 검.성.님.”
키네틱이 다시 손에 든 장치를 조작하자 의수와 의족을 통해 강렬한 전기 충격이 들어왔고 난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또 몸부림쳤다. 흐릿해지는 의식 사이로 키네틱의 홀로그램이 서서히 사라졌다.}}} |
24. 키네틱[편집]
키네틱 영웅 이야기 |
'혁명의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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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는 기디아의 보급로를 따라, 어둠녘공업의 맥워리어들이 힘차게 행진했다. 보급로 옆으로는 맥워리어들에게 막혀 더 나아가지 못하는 행상들이 넘쳐났다. 집채만 한 팡고무스가 끄는 무거운 짐마차 안에는 시들어버린 곡물과 채소가 가득했고, 불안해하는 상인들 사이로 오토바이를 탄 타이젠 조직원들이 골드와 수정, 무기 따위를 압수했다.
이를 본 키네틱이 켄세이에게 다가서며 지적했다.
“계약 위반이에요. 난 기디아의 보급로를 끊으라고 했지, 약탈하라고 하진 않았어요.”
무표정한 켄세이가 말을 받았다.
“내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 않았나. 난 도움을 줄 뿐이다.”
“백성의 재산을 훔치는 거라고요.”
“정확히는 너의 백성이지.”
켄세이가 반박하자 키네틱이 차갑게 웃으며 주머니에서 원격 장치를 꺼냈다. 그녀가 장치에 검지를 올리며 사납게 외쳤다.
“당장 당신 부하들에게 중단하라 하세요.”
“그럴 순 없지.”
켄세이의 부하들이 키네틱과 그녀의 호위를 둘러싸고 총과 검을 겨눴다. 켄세이는 키네틱을 지긋이 바라보더니, 돌아서서 자신의 목 뒤에 새로 생긴 흉터를 보여주었다.
키네틱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녀는 당황하며 조종 장치를 누르고 또 눌러보았지만 어떤 반응도 없었다. 그 장면을 보며 켄세이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대의 대의에는 찬동하지. 하지만 꼭두각시가 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키네틱이 이를 갈아 부치며 손을 내리자 그녀의 호위들이 무기를 집어넣었다.
“후... 어쩔 수 없군요. 그래도 보급로는 계속 차단해 줄 거죠?”
“물론이다.” 키네틱은 상인들을 다그치는 켄세이의 부하를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고는, 맥워리어의 행렬을 따라 북으로 전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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