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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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itai
? ~ 1232년
몽골 제국의 장수. 여몽전쟁의 지휘관.
그의 원래 이름은 중세 몽골어 독음으로 사리그타이(ᠰᠠᠷᠢᠳᠠᠭ)로 읽히며, 눈이 쌓인 산봉우리를 뜻한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행적이 한문으로 작성된 사료밖에 없어서, 사료상에서 그의 이름 표기가 매우 제각각이다. 화아적 혹은 화이적은 살리타이의 별명인데, 중세 몽골어 독음으로 코르치(Qorči)로 읽히며 명궁(활을 잘 쏘는 자) 혹은 화살통지기를 뜻한다.
살리타이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점이 많으나 '코르치'(Qorči)라는 칭호로 미루어 볼 때, 본래 케식(친위대)의 일원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
사료상에선 명시되어 있지 않기에 최초로 요동·고려 방면의 탐마치가 언제 파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원사》 권 149 <왕순전>(王珣傳)에는 1229년 이전에 탐마치가 요동에 출현한 것이 암시되고 있으며, 다른 지역에 탐마치가 파견된 시기와 같은 시기인 1228년경에 몽골 고원에서 파견된 것이 아닐까 추측되고 있다. 탕구트 방면의 탐마치가 서방 왕가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었던 것과 달리, 요동·고려 방면의 탐마치는 동방 왕가와의 긴밀한 연계 아래 활동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 요동·고려 방면 탐마치의 초대 사령관이 바로 살리타이로,[2] 그는 '원수'(元帥) 혹은 '권황제'(権皇帝)라고 불리었다. 이 칭호는 칭기즈 칸 시대에 동아시아 방면의 사령관으로 활약했던 잘라이르 무칼리의 칭호로, 살리타이는 무칼리의 권한을 일부 계승한 형태로 요동군을 지휘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살리타이가 이끄는 탐마치의 주력은 과거 무칼리의 지휘 아래 요동을 누볐던 거란군과 여진군이었다.[3] 또한 요동·고려 방면의 탐마치는 살리타이와 디주(迪巨), 탕우타이(唐古), 푸타우(蒲桃)라는 4명의 장수가 이끌었는데 이는 호라즘 왕조 방면으로 파견된 초르마칸이 이끄는 탐마치가 4개의 투멘(Tumen, 만호)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과 대응하는 것으로 보인다.[4]
1218년에 후요(거란족)가 몽골군의 공격으로 패배해 동남쪽으로 달아나면서 고려를 공격하자 살리타이는 12월 1일(12월 20일)[5] 에 부원수로 종군하여 원수인 카치운[6] 과 함께 10,000명을 이끌고, 동하의 완안자연(완안쥬안)의 군사 20,000명과 합세한 후 화주, 맹주, 순주, 덕주 등을 공격하고 후요가 점령한 강동성으로 진군했다. 1219년에 고려의 조충과 김취려 등이 합세하자 함께 강동성 전투에 참가하여 거란 유민들을 항복시켰다.
1231년 8월에 몽골의 사신인 저고여가 살해된 사건을 구실로 고려를 침공했다. 29일(9월 26일)에 함신진 전투를 벌여 조충의 아들인 방수장군 조숙창을 항복시켰으며[7] , 인주 도령인 홍복원이 항복하자 그와 함께 귀부하지 않은 주군을 공격하여 철주를 함락시켰다. 그러나 푸타오(포도), 디주(적거), 탕우타이(당을태)가 이끄는 1군이 동선역에서 패배하자 이들을 철수시키면서 3군과 합류하도록 했다.
11월 11일(12월 6일)에 고려의 대장군 채송년이 분대어사 민희와 병마판관 최계년 등을 보내 몽골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면서 허실을 엿보도록 할 때 민희가 하급 관리인 것을 듣고 높은 관리가 직접 와서 항복하라고 했다. 12월 2일(12월 26일)에 고려의 수도인 개경을 포위하면서 안북도호부에 진을 치고, 사자를 보내 강화를 시도했으며, 5일(12월 29일)에 사신으로 파견된 회안공 왕정이 토산물을 주면서 절을 하자 이에 답하지 않다가 왕정이 술과 안주를 대접하자 젖술로 답례했다. 이때, 왕정을 수행한 송국첨이 엄숙하면서 기상이 씩씩하고 컸기 때문에 살리타이가 탄복했으나, 저고여 암살 사건과 공물 문제 때문에 강화 협상이 잘 되지는 않았다.
17일에 왕영조, 우예르(오야이), 일라(이라)가 이끄는 2군이 귀주성을 공격했다가 박서와 김경손의 격렬한 저항을 받자 고려의 통사 지의심과 학록 강우창 등을 통해 회안공 왕정의 편지를 주면서 항복을 권했으며, 귀주성이 이를 듣지 않자 또다시 사람을 보냈지만 무시당하자 다시 2군에게 귀주를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박서와 김경손의 항전으로 귀주를 함락시키지 못했다.(귀주성 전투) 23일(1월 16일)에 마침내 강화 협상을 성사시키면서 몽골의 사신과 함께 조숙창을 보내어 저고여를 죽인 일을 묻게 했는데 고려 조정에서 선물을 주는 것으로 사신을 돌려보냈으며, 29일(1월 22일)에 장군인 조시저를 사신으로 보내자 고려의 선물을 받았다.
강화 협상이 성사된 이후에 군대를 철수하면서도 2군이 끝내 귀주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항복하지 않는 귀주성을 직접 5차례나 공격했지만 1232년 정월까지 고려군의 거센 항전으로 귀주성을 함락시키지 못하면서 2군을 철수하도록 한 다음, 세 방면의 군사를 합류시키고 청천강 북쪽의 다른 성들을 함락하여 귀주성을 고립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의주 함신진의 부사 전한의 배신으로 의주성의 몽골군이 전멸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8]
또한 고려의 삼군이 안북성 전투에서 대패한 뒤 항복하자 회안공 왕정에게 편지를 보내게 하여 자주산성을 항복시키려고 했지만 항복하지 않자 고려 조정을 힐책했으며, 대집성을 보냈다가 항복하지 않자 격노해서 최춘명을 죽이려고 했다. 3월에 철수를 완료하면서 고려 조정에서 온 통사 지의심, 녹사 홍거원, 녹사 김겸 등이 가지고 온 노자와 요구한 공물에 대한 내용이 담긴 편지를 받았다. 4월 12일(5월 3일)에 고려 조정으로부터 다시 요구한 공물에 대한 내용이 담긴 편지를 받았다. 그러나 두 차례 보내온 내용이 요구한 양만큼의 공물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통사 지의심을 오고타이 칸에게 보내고, 나머지는 구금했다.
그러나 8월에 다루가치를 욕보였다는 것과 강화로 수도를 천도한 것 때문에 고려를 또다시 침공했으며, 홍복원의 도움을 받아 남하했다. 이후 11월에 고려 조정으로부터 아량을 호소하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남하할 때 어사잡단 설신이
? ~ 1232년
1. 개요[편집]
몽골 제국의 장수. 여몽전쟁의 지휘관.
2. 이름 표기[편집]
그의 원래 이름은 중세 몽골어 독음으로 사리그타이(ᠰᠠᠷᠢᠳᠠᠭ)로 읽히며, 눈이 쌓인 산봉우리를 뜻한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행적이 한문으로 작성된 사료밖에 없어서, 사료상에서 그의 이름 표기가 매우 제각각이다. 화아적 혹은 화이적은 살리타이의 별명인데, 중세 몽골어 독음으로 코르치(Qorči)로 읽히며 명궁(활을 잘 쏘는 자) 혹은 화살통지기를 뜻한다.
- 사리타(沙里打) : 《동국이상국집》
- 사타(沙打) : 《동국이상국집》
- 사타리(沙打里) : 《동국이상국집》
- 살대(撒歹) : 《동국여지승람》
- 살례탑(撒禮塔) : 《고려사》 <세가>, 《원사》, 《신원사》 <홍복원전>, 《고려사절요》
- 살리답(撤里答) : 《원고려기사》, 《원사》 <홍복원전>
- 살리답화아적(撒里荅火兒赤) : 《원사》 <우에르(五也而)전>
- 살리타(撒里打) : 《동국이상국집》
- 살리탑(撒里塔) : 《원사》 <홍복원전>, 《신원사》 <본기>, 《신원사》 <찰라역아태활아적전>, 《해동역사》
- 살리타화아적(撒里打火兒赤) : 《성무친정록》
- 살리타화이적(撒里打火里赤) : 《고려사》 <세가>
- 살리탑화리(撤里塔火里) : 《원고려기사》
- 살리탑화이적(撒里塔火里赤) : 《원고려기사》
- 살리태(薩里台) : 《원사》 <본기>, 《원사》 <고려전>
- 살리태(撒里台) : 《원사》 <왕준전>
- 살아태(撒兒台) : 《원사》 <야율유가전>
- 살탑(撒塔) : 《역옹패설》
- 융리태(隆里台) : 《원사》
- 찰라(札剌) : 《동국통감》, 《고려사》 <세가>, 《고려사절요》
- 찰라역아태(札剌亦兒台) : 《원조비사》, 《신원사》 <고려전>
- 찰라역아태활아적(札剌亦兒台豁兒赤) : 《신원사》 <우에르전>, 《신원사》 <찰라역아태활아적전>
- 찰라태(札剌台) : 《원사》 <씨족전>, 《원사》 <탑출전>
- 철리태(撤里台) : 《원사》 <우에르전>
- 철아태(撤兒台) : 《원사》 <벽도(薜闍)전>
3. 생애[편집]
살리타이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점이 많으나 '코르치'(Qorči)라는 칭호로 미루어 볼 때, 본래 케식(친위대)의 일원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
사료상에선 명시되어 있지 않기에 최초로 요동·고려 방면의 탐마치가 언제 파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원사》 권 149 <왕순전>(王珣傳)에는 1229년 이전에 탐마치가 요동에 출현한 것이 암시되고 있으며, 다른 지역에 탐마치가 파견된 시기와 같은 시기인 1228년경에 몽골 고원에서 파견된 것이 아닐까 추측되고 있다. 탕구트 방면의 탐마치가 서방 왕가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었던 것과 달리, 요동·고려 방면의 탐마치는 동방 왕가와의 긴밀한 연계 아래 활동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 요동·고려 방면 탐마치의 초대 사령관이 바로 살리타이로,[2] 그는 '원수'(元帥) 혹은 '권황제'(権皇帝)라고 불리었다. 이 칭호는 칭기즈 칸 시대에 동아시아 방면의 사령관으로 활약했던 잘라이르 무칼리의 칭호로, 살리타이는 무칼리의 권한을 일부 계승한 형태로 요동군을 지휘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살리타이가 이끄는 탐마치의 주력은 과거 무칼리의 지휘 아래 요동을 누볐던 거란군과 여진군이었다.[3] 또한 요동·고려 방면의 탐마치는 살리타이와 디주(迪巨), 탕우타이(唐古), 푸타우(蒲桃)라는 4명의 장수가 이끌었는데 이는 호라즘 왕조 방면으로 파견된 초르마칸이 이끄는 탐마치가 4개의 투멘(Tumen, 만호)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과 대응하는 것으로 보인다.[4]
1218년에 후요(거란족)가 몽골군의 공격으로 패배해 동남쪽으로 달아나면서 고려를 공격하자 살리타이는 12월 1일(12월 20일)[5] 에 부원수로 종군하여 원수인 카치운[6] 과 함께 10,000명을 이끌고, 동하의 완안자연(완안쥬안)의 군사 20,000명과 합세한 후 화주, 맹주, 순주, 덕주 등을 공격하고 후요가 점령한 강동성으로 진군했다. 1219년에 고려의 조충과 김취려 등이 합세하자 함께 강동성 전투에 참가하여 거란 유민들을 항복시켰다.
1231년 8월에 몽골의 사신인 저고여가 살해된 사건을 구실로 고려를 침공했다. 29일(9월 26일)에 함신진 전투를 벌여 조충의 아들인 방수장군 조숙창을 항복시켰으며[7] , 인주 도령인 홍복원이 항복하자 그와 함께 귀부하지 않은 주군을 공격하여 철주를 함락시켰다. 그러나 푸타오(포도), 디주(적거), 탕우타이(당을태)가 이끄는 1군이 동선역에서 패배하자 이들을 철수시키면서 3군과 합류하도록 했다.
11월 11일(12월 6일)에 고려의 대장군 채송년이 분대어사 민희와 병마판관 최계년 등을 보내 몽골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면서 허실을 엿보도록 할 때 민희가 하급 관리인 것을 듣고 높은 관리가 직접 와서 항복하라고 했다. 12월 2일(12월 26일)에 고려의 수도인 개경을 포위하면서 안북도호부에 진을 치고, 사자를 보내 강화를 시도했으며, 5일(12월 29일)에 사신으로 파견된 회안공 왕정이 토산물을 주면서 절을 하자 이에 답하지 않다가 왕정이 술과 안주를 대접하자 젖술로 답례했다. 이때, 왕정을 수행한 송국첨이 엄숙하면서 기상이 씩씩하고 컸기 때문에 살리타이가 탄복했으나, 저고여 암살 사건과 공물 문제 때문에 강화 협상이 잘 되지는 않았다.
17일에 왕영조, 우예르(오야이), 일라(이라)가 이끄는 2군이 귀주성을 공격했다가 박서와 김경손의 격렬한 저항을 받자 고려의 통사 지의심과 학록 강우창 등을 통해 회안공 왕정의 편지를 주면서 항복을 권했으며, 귀주성이 이를 듣지 않자 또다시 사람을 보냈지만 무시당하자 다시 2군에게 귀주를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박서와 김경손의 항전으로 귀주를 함락시키지 못했다.(귀주성 전투) 23일(1월 16일)에 마침내 강화 협상을 성사시키면서 몽골의 사신과 함께 조숙창을 보내어 저고여를 죽인 일을 묻게 했는데 고려 조정에서 선물을 주는 것으로 사신을 돌려보냈으며, 29일(1월 22일)에 장군인 조시저를 사신으로 보내자 고려의 선물을 받았다.
금, 은, 의복을 적게는 말 10,000필, 많게는 말 20,000필에 실어보낼 양, 군사 100만 명에 해당하는 의복, 대마 10,000필, 소마 10,000필, 국왕, 제왕자, 공주, 군주, 고관들의 자제 1,000명을 보낼 것.
강화 협상이 성사된 이후에 군대를 철수하면서도 2군이 끝내 귀주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항복하지 않는 귀주성을 직접 5차례나 공격했지만 1232년 정월까지 고려군의 거센 항전으로 귀주성을 함락시키지 못하면서 2군을 철수하도록 한 다음, 세 방면의 군사를 합류시키고 청천강 북쪽의 다른 성들을 함락하여 귀주성을 고립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의주 함신진의 부사 전한의 배신으로 의주성의 몽골군이 전멸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8]
또한 고려의 삼군이 안북성 전투에서 대패한 뒤 항복하자 회안공 왕정에게 편지를 보내게 하여 자주산성을 항복시키려고 했지만 항복하지 않자 고려 조정을 힐책했으며, 대집성을 보냈다가 항복하지 않자 격노해서 최춘명을 죽이려고 했다. 3월에 철수를 완료하면서 고려 조정에서 온 통사 지의심, 녹사 홍거원, 녹사 김겸 등이 가지고 온 노자와 요구한 공물에 대한 내용이 담긴 편지를 받았다. 4월 12일(5월 3일)에 고려 조정으로부터 다시 요구한 공물에 대한 내용이 담긴 편지를 받았다. 그러나 두 차례 보내온 내용이 요구한 양만큼의 공물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통사 지의심을 오고타이 칸에게 보내고, 나머지는 구금했다.
그러나 8월에 다루가치를 욕보였다는 것과 강화로 수도를 천도한 것 때문에 고려를 또다시 침공했으며, 홍복원의 도움을 받아 남하했다. 이후 11월에 고려 조정으로부터 아량을 호소하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남하할 때 어사잡단 설신이
는 조언을 했지만 이를 무시했다. 12월에 처인성을 공격했지만 성 안에서 승려 김윤후의 화살에 맞아 허무하게 전사했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 노미영의 만화 <살례탑>에서는 사실상의 주인공으로 나오며, 어린이 학습 만화 같은 곳에서는 처인성 전투와 김윤후를 부각시키기 위해 살리타이의 악랄함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경우도 있다.
[1] 松田孝一, <モンゴル帝国東部国境の探馬赤軍団>, 《内陸アジア史研究》第7/8合併号、1992年[2] 앞서 살리타이가 파견된 1228~1229년경에 다른 탐마치도 파견되고 있었던 점과 《집사》에서 살리타이의 지위를 계승한 탕우타이가 탐마치를 이끌고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기에 고려를 침공한 살리타이의 몽골군 역시 탐마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松田孝一, <モンゴル帝国東部国境の探馬赤軍団>, 《内陸アジア史研究》第7/8合併号、1992年[3] 松田孝一, <宋元軍制史上の探馬赤(タンマチ)問題 >, 《宋元時代史の基本問題》汲古書院、1996年[4] 松田孝一, <モンゴル帝国東部国境の探馬赤軍団>, 《内陸アジア史研究》第7/8合併号、1992年[5] 이하 괄호는 모두 양력.[6] 칭기즈 칸의 둘째 동생인 카치운과는 동명이인으로 고려측 사서에는 합진(哈眞) 혹은 합적온(合赤溫) 등으로 표기된다.[7] 조숙창은 자신이 거란 유민에 대한 공격에 참전했던 조충의 아들이라고 밝힌 뒤 창고를 열어 몽골군 군마들의 배를 채웠다. 이후 삭주의 선덕진에도 투항을 권해 투항하도록 했다.[8] 이후 전한은 함신진의 백성들을 개경으로 보냈지만 자신은 가족들과 함께 배를 타고 따라가다가 태풍을 만나 익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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