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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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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92년부터 1832년까지 무려 1600여년 동안 지금의 베트남 중남부 지역에 존재했던 참족의 나라.
베트남에 흡수되어 존재하지 않는데다 한국인들이 동남아시아 역사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지역 내 강자인 미얀마, 태국, 베트남이 대두되기 전부터 동남아 지역의 강자였다. 현 캄보디아의 전신인 크메르 제국의 전성기 시절에도 일진일퇴를 주고 받던 국가이다. 앙코르와트에 부조된 바나나잎 모자를 쓴 적들이 바로 이들이다.[2] 사실상 베트남 역사상 최대의 숙적이라고 할 수 있다. 베트남은 참파 말고도 프랑스, 미국, 몽골, 일본, 캄보디아 등등 적수였던 여러 국가들이 수도 없이 많지만 투쟁기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반면 참파는 베트남과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대립과 전쟁을 반복해왔다. 베트남의 역사 자체가 참파를 정복해가며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참파와 비교할 만한 베트남의 숙적은 수천 년간 통치와 침공을 반복한 중국 정도이다.
참파를 세운 참족들은 베트남인과 인종적으로 다른 말레이계 민족이다. 이들은 오늘날의 보르네오 섬 일대에서 거주하다가, 2천 년 전에 현 베트남 중남부로 이동해왔으며, 동아시아의 한자 문화권이었던 베트남과 달리 힌두교를 받아들인 전형적인 인도 동남아 문화권 민족이었기 때문에 베트남과 참파 사이의 차이가 매우 컸다. 이후에 두 나라 모두 대승불교를 주로 믿게 되었던 적도 있었지만 베트남은 유교, 도교 vs 참파는 힌두교, 이슬람[3] 으로 달랐다. 14세기 초에 자야신하바르만 3세는 대월국 영종 황제의 여동생인 현진공주(玄珍公主)를 왕비로 맞았으나 그가 1년 만에 죽자 현진공주는 사티(순장)을 피해 대월국으로 망명한 일도 있었다.
베트남의 역사는 북부에 있던 베트남이 남부의 참파를 밀어붙이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종 참파가 베트남을 관광시키고 수도까지 턴 적도 있었지만[4] 전체적으로는 베트남이 참파보다 우세를 점했다. 참파는 14세기 말부터 서서히 베트남에게 밀리더니 18세기에는 베트남이 참파의 근거지인 현 베트남 남부까지 들어오면서 베트남의 종속국이 되어 버렸으며, 결국 베트남에 정복당하고 베트남의 소수민족이 되었다. 현 남베트남인들의 경우 참족들의 피가 많이섞여있어 흔히 아는 베트남인들이랑 외양이 다르다.[5]
참파는 베트남인들과는 다른 민족인 말레이계 참인들의 나라였다. 이 말레이인들은 2세기 초반부터 후한령 베트남 남부로 쳐들어와 한나라 관리들을 죽이곤 했다. 그러다가 192년에 중국 관리 출신인 구련[6] 이통수를 치고 한나라령 베트남 남단인 교주 일남군[7] 에 '임읍(林邑)'을 세웠으며, 이후 '환왕(環王)', '점성(占城)'. '참파(占波:점파)'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초창기에는 건국자 구련이 중국화된 참파인이고, 제2왕조 초대 국왕인 범문(范文)이 중국 양주 출신 상인이여서, 그의 후손들이 범씨(范氏) 성을 사용하면서 중국 문화권에 속했지만, 캄보디아로부터 불교, 힌두교, 인도 문화를 도입하면서, 중국식 이름을 버리고 산스크리트 이름을 본격적으로 사용하는 등 동남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처럼 인도 문화권이 되었다.
베트남은 화교가 주민의 대부분인 싱가포르를 제외하면[8] , 한자를 사용하고 유교, 불교, 도교를 받아들이는 등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중국 문화권에 속한다. 그래서 베트남과 참파는 인종적, 문화적으로 매우 달랐다. 그렇기에 북부에 자리잡은 베트남과 대립했으며, 자주 전쟁을 벌였다.
잘 나갈 때는 옆에 있는 캄보디아를 수시로 털었으며, 중국 해남도 일대까지 원정 나가기도 했다. 일시적으로 베트남을 몰아붙이던 때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밀렸으며, 몽골의 쿠빌라이 칸이 베트남 원정에 나설 때 남북 양쪽으로 진공하면서 참파를 점령하였기 때문에 비록 베트남이 몽골을 격퇴시켰어도 참파의 피해가 막심했다. 그 후 참파는 몇 세기에 걸쳐서 서서히 남쪽으로 밀려났다.
참파의 마지막 부흥기는 포 비나수오르, 베트남어로는 일명 쩨봉응아(制蓬峨, 제봉아)가 참파의 국왕으로 있었던 때였다. 그는 1360년 즉위하자마자 베트남에 사절을 파견하여 베트남이 빼앗아간 옛 영토의 반환을 요구했고, 1361년~1390년에 걸쳐서 30여 년 동안 끊임없이 당시 베트남의 쩐 왕조를 공격하여 베트남을 크게 몰아붙였다. 특히 1371년에는 당시 왕도였던 탕롱 성(지금의 하노이에 위치함)을 불태워 버리는 등 엄청난 패기를 발산한다. 1377년에는 당시 친정에 나서 참파를 공격하였던 쩐 왕조의 황제 예종(睿宗)을 전사시킨 뒤, 또 다시 탕롱을 털었고, 그 이듬 해에도 또 탕롱을 털었다. 포 비나수오르 왕의 재위기간 중에 베트남의 수도 탕롱은 세 번에 걸쳐 약탈당했고, 현재의 베트남 중부 지역까지 내려왔던 베트남의 영토는 베트남이 중국의 지배에서 갓 벗어났을 무렵 정도까지 북쪽으로 밀려나 수축될 정도였다. 그리고 포 비나수르 재위기 이슬람이 본격적으로 유입되어 왕 자신도 무슬림으로 개종하였으니 포 비나수오르 왕은 그야말로 참파 왕국의 마지막 불꽃을 태운 명군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1390년 베트남과의 전투에서 포 비나수오르가 전사한 뒤, 카리스마적인 인물을 잃어버린 참파의 기세는 급속도로 수그러들게 된다.
물론, 베트남 역시 큰 피해를 받았기에 참파가 곧장 망한다던가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1407년부터 20여년간 명나라가 베트남을 지배하기도 했던지라 20여년간 구도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명나라의 지배에서 다시 독립한 베트남 후 레 왕조의 태조는 당시 참파의 왕이었던 자야 인드라바르만 6세와 공식적으로 관계를 회복한다.
1441년 자야 인드라바르만 6세가 사망하자, 참파에서는 후계자와 관련해 내전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참파의 힘이 약화되었으며, 베트남은 이를 기회로 보아 1446년 참파의 중심지인 비자야를 급습하였다.
결정적으로 참파는 1471년 마하 사잔 왕이 당시 베트남 남부 국경을 기습적으로 공격했으나 그 역풍은 대단했다. 화가 난 베트남 후 레 왕조의 성종(聖宗)이 친히 군사 25만을 이끌고 수도 비자야 성으로 쳐들어가 당시 참파의 왕이었던 마하사잔(베트남어로는 '반 라쩨트안(반라차전)')을 생포하면서 영토를 대부분 빼앗겨 베트남의 속국이 되었고, 다시는 옛 영광을 되찾을 수 없었다.
이후 참파의 영토는 베트남에 의해 갈가리 찢겨져 분열된다. 이때 참파는 판두랑가[9] 지역으로 완전히 밀려 버리면서, 그 이후로는 베트남 치하의 종속국으로 형식상으로만 유지되었다. 베트남은 외왕내제 체제였는데, 내부적으로 황제를 자칭하려면 지배하는 번국(藩國)이 필요했기 때문. 베트남의 황제들은 역사적으로 주변 라오스나 캄보디아, 참파를 정벌하고 그 지역에 친베트남계 왕을 옹립시켜 형식상 나라(번국藩國)로 인정하고 베트남 국왕 자신은 황제 노릇을 했다.
겨우 명맥만 유지하던 판두랑가 지역의 참파는 마침내 1832년 응우옌 왕조가 합병을 선언하면서 완전히 소멸되었다.
사실 참파가 베트남에 인구는 밀릴 지 몰라도 풍부한 쌀 생산량과 비옥한 중부지대를 점유하고 있었고 무역으로 인한 재화도 풍부했기에 베트남과 전쟁하는 데 있어서 동등한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베트남은 수 천년 동안 중국 왕조들을 상대로 전쟁을 해오던 터라 군인들의 전투 경험이 풍부했다. 또한 베트남은 중국의 유학[10] 과 중앙집권체제[11] 를 도입하면서 참파보다 빠르게 국력을 집중시킬 수 있었고, 그래서 빠른 시간 내에 대규모 군대를 소집하여 참파의 공격에 대응하고 오히려 반격을 가할 수 있었다.
반면 참파는 16세기 중엽까지 다른 동남아 각국이나 말레이 반도의 이슬람 국가들처럼 도시국가들의 연맹체제를 유지하였던지라 도시국가들 중에 가장 영향력이 큰 도시의 왕이 참파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고 있었다.[12] 이러한 연맹체제의 특성상 군사소집 속도가 중앙집권화된 나라에 비해 느릴 수밖에 없다. 각 도시들에서 군사들을 징발해야 했고 또 소집에 응하지 않는 도시들도 있었으니 전쟁수행이 여러모로 불편했다. 결국 참파는 베트남의 대규모 침공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국사로 치면 중앙집권에 도달하지 못한 가야가 중앙집권에 성공한 신라에 밀려 결국 멸망하고 흡수당한 과정과 비슷하다. 만약 참파가 어느 영웅에 의해 통일되어 베트남과 같은 철저한 중앙집권국가가 되거나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일본의 에도 막부 내지는 독일 제국의 프로이센 왕국[13] 과 비슷한 수준의 강력한 중앙 정권이 탄생했다면 베트남과의 싸움에서 그렇게까지 허무하게 패망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이 또한 상상의 영역일 뿐이다.
참인들은 베트남에게 서서히 밀려 버리자 캄보디아나 말레이 반도, 태국으로 가서 이슬람이나 불교로 개종하거나 베트남에 남거나 했다. 물론 한때 참파의 왕이 무슬림이었으니 베트남에도 이슬람을 믿는 참인들이 꽤 있다. 그래서 베트남에서 얼마 되지 않는 무슬림들은 참인들이 대부분이라고 보면 된다. 그 후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의 도움으로 독립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지금은 베트남의 소수민족으로 전락했다.
15세기부터는 이슬람을 받아들였고 현재 참인들의 다수가 이슬람을 믿는다. 정확히 말하면 캄보디아와 말레이시아의 참족은 이슬람을 주로 믿고 베트남의 참족들은 힌두교를 주로 믿는다. 참인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인 경위는 이렇다. 참인들은 계속되는 베트남의 침략을 막기 위해 동맹을 맺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바다건너 말레이반도에 위치한 조호르 술탄국과 동맹을 맺었다. 그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왕도 있었고 자위 문자도 가져오기도 했다. 허나 이 동맹이 도움은 안 됐다. 왜냐하면 참파와 말레이는 넘 멀었고 게다가 이때 조호르 술탄국은 말레이 해협 건너편에 위치한 수마트라 섬에 있는 아체 술탄국하고 전쟁중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베트남 내에서 참파의 후예인 참 족의 인구는 베트남인들에게 동화되거나, 쫓겨나서 현재 약 40만 명 정도만 남아있다. 이외에 캄보디아-베트남 국경지대에도 많이 거주 중. 참족은 베트남보다 캄보디아에 더 많이 산다.
말레이시아에는 1970년대 월남전으로 인해 베트남에서 보트피플들이 왔다는데 소수의 참족도 있었다. 소수의 참족들은 같은 이슬람을 신봉하는 말레이시아에 남아 귀화하기도 했다고 한다.[14]
현 남베트남인들의 혈통에 참족들의 피가 진하게 섞여 있으니 참족은 남베트남인들의 조상으로 볼 수 있다.
순서는 북쪽부터 남쪽이다. 인도 문화의 영향이 커서 산스크리트식 이름이다.
참파 왕국은 대체적으로 13세기 말 분열되기 전까지 총 15개의 왕조가 나뉘어졌다고 프랑스의 역사학자 조르주 마스페로(Georges Maspero)가 주장했다. 이하 계보는 참파의 역사에 대한 선구적 연구자로 유명한 조르주 마스페로의 주장을 근거로 씀.[15]
참고로 참파의 초기 국왕들은 제1왕조의 초대 국왕인 구련이 현지인 출신의 중국 관리였고, 제2왕조의 초대 국왕인 범문은 중국인이었기에 중국 문화권의 영향을 받아 중국식 성씨와 이름을 사용했으나, 중후기에는 인도 문화권의 영향을 받아 산스크리트식, 이슬람식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참파의 중후기 국왕의 중국식 이름은 주로 베트남 조정 측에서 한자를 이용하여 베트남어로 음차한 이름으로 남아있다.
1. 개요[편집]
서기 192년부터 1832년까지 무려 1600여년 동안 지금의 베트남 중남부 지역에 존재했던 참족의 나라.
베트남에 흡수되어 존재하지 않는데다 한국인들이 동남아시아 역사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지역 내 강자인 미얀마, 태국, 베트남이 대두되기 전부터 동남아 지역의 강자였다. 현 캄보디아의 전신인 크메르 제국의 전성기 시절에도 일진일퇴를 주고 받던 국가이다. 앙코르와트에 부조된 바나나잎 모자를 쓴 적들이 바로 이들이다.[2] 사실상 베트남 역사상 최대의 숙적이라고 할 수 있다. 베트남은 참파 말고도 프랑스, 미국, 몽골, 일본, 캄보디아 등등 적수였던 여러 국가들이 수도 없이 많지만 투쟁기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반면 참파는 베트남과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대립과 전쟁을 반복해왔다. 베트남의 역사 자체가 참파를 정복해가며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참파와 비교할 만한 베트남의 숙적은 수천 년간 통치와 침공을 반복한 중국 정도이다.
참파를 세운 참족들은 베트남인과 인종적으로 다른 말레이계 민족이다. 이들은 오늘날의 보르네오 섬 일대에서 거주하다가, 2천 년 전에 현 베트남 중남부로 이동해왔으며, 동아시아의 한자 문화권이었던 베트남과 달리 힌두교를 받아들인 전형적인 인도 동남아 문화권 민족이었기 때문에 베트남과 참파 사이의 차이가 매우 컸다. 이후에 두 나라 모두 대승불교를 주로 믿게 되었던 적도 있었지만 베트남은 유교, 도교 vs 참파는 힌두교, 이슬람[3] 으로 달랐다. 14세기 초에 자야신하바르만 3세는 대월국 영종 황제의 여동생인 현진공주(玄珍公主)를 왕비로 맞았으나 그가 1년 만에 죽자 현진공주는 사티(순장)을 피해 대월국으로 망명한 일도 있었다.
베트남의 역사는 북부에 있던 베트남이 남부의 참파를 밀어붙이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종 참파가 베트남을 관광시키고 수도까지 턴 적도 있었지만[4] 전체적으로는 베트남이 참파보다 우세를 점했다. 참파는 14세기 말부터 서서히 베트남에게 밀리더니 18세기에는 베트남이 참파의 근거지인 현 베트남 남부까지 들어오면서 베트남의 종속국이 되어 버렸으며, 결국 베트남에 정복당하고 베트남의 소수민족이 되었다. 현 남베트남인들의 경우 참족들의 피가 많이섞여있어 흔히 아는 베트남인들이랑 외양이 다르다.[5]
2. 역사[편집]
2.1. 시작[편집]
참파는 베트남인들과는 다른 민족인 말레이계 참인들의 나라였다. 이 말레이인들은 2세기 초반부터 후한령 베트남 남부로 쳐들어와 한나라 관리들을 죽이곤 했다. 그러다가 192년에 중국 관리 출신인 구련[6] 이
베트남은 화교가 주민의 대부분인 싱가포르를 제외하면[8] , 한자를 사용하고 유교, 불교, 도교를 받아들이는 등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중국 문화권에 속한다. 그래서 베트남과 참파는 인종적, 문화적으로 매우 달랐다. 그렇기에 북부에 자리잡은 베트남과 대립했으며, 자주 전쟁을 벌였다.
잘 나갈 때는 옆에 있는 캄보디아를 수시로 털었으며, 중국 해남도 일대까지 원정 나가기도 했다. 일시적으로 베트남을 몰아붙이던 때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밀렸으며, 몽골의 쿠빌라이 칸이 베트남 원정에 나설 때 남북 양쪽으로 진공하면서 참파를 점령하였기 때문에 비록 베트남이 몽골을 격퇴시켰어도 참파의 피해가 막심했다. 그 후 참파는 몇 세기에 걸쳐서 서서히 남쪽으로 밀려났다.
2.2. 마지막 부흥기[편집]
참파의 마지막 부흥기는 포 비나수오르, 베트남어로는 일명 쩨봉응아(制蓬峨, 제봉아)가 참파의 국왕으로 있었던 때였다. 그는 1360년 즉위하자마자 베트남에 사절을 파견하여 베트남이 빼앗아간 옛 영토의 반환을 요구했고, 1361년~1390년에 걸쳐서 30여 년 동안 끊임없이 당시 베트남의 쩐 왕조를 공격하여 베트남을 크게 몰아붙였다. 특히 1371년에는 당시 왕도였던 탕롱 성(지금의 하노이에 위치함)을 불태워 버리는 등 엄청난 패기를 발산한다. 1377년에는 당시 친정에 나서 참파를 공격하였던 쩐 왕조의 황제 예종(睿宗)을 전사시킨 뒤, 또 다시 탕롱을 털었고, 그 이듬 해에도 또 탕롱을 털었다. 포 비나수오르 왕의 재위기간 중에 베트남의 수도 탕롱은 세 번에 걸쳐 약탈당했고, 현재의 베트남 중부 지역까지 내려왔던 베트남의 영토는 베트남이 중국의 지배에서 갓 벗어났을 무렵 정도까지 북쪽으로 밀려나 수축될 정도였다. 그리고 포 비나수르 재위기 이슬람이 본격적으로 유입되어 왕 자신도 무슬림으로 개종하였으니 포 비나수오르 왕은 그야말로 참파 왕국의 마지막 불꽃을 태운 명군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1390년 베트남과의 전투에서 포 비나수오르가 전사한 뒤, 카리스마적인 인물을 잃어버린 참파의 기세는 급속도로 수그러들게 된다.
물론, 베트남 역시 큰 피해를 받았기에 참파가 곧장 망한다던가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1407년부터 20여년간 명나라가 베트남을 지배하기도 했던지라 20여년간 구도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명나라의 지배에서 다시 독립한 베트남 후 레 왕조의 태조는 당시 참파의 왕이었던 자야 인드라바르만 6세와 공식적으로 관계를 회복한다.
2.3. 몰락[편집]
1441년 자야 인드라바르만 6세가 사망하자, 참파에서는 후계자와 관련해 내전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참파의 힘이 약화되었으며, 베트남은 이를 기회로 보아 1446년 참파의 중심지인 비자야를 급습하였다.
결정적으로 참파는 1471년 마하 사잔 왕이 당시 베트남 남부 국경을 기습적으로 공격했으나 그 역풍은 대단했다. 화가 난 베트남 후 레 왕조의 성종(聖宗)이 친히 군사 25만을 이끌고 수도 비자야 성으로 쳐들어가 당시 참파의 왕이었던 마하사잔(베트남어로는 '반 라쩨트안(반라차전)')을 생포하면서 영토를 대부분 빼앗겨 베트남의 속국이 되었고, 다시는 옛 영광을 되찾을 수 없었다.
이후 참파의 영토는 베트남에 의해 갈가리 찢겨져 분열된다. 이때 참파는 판두랑가[9] 지역으로 완전히 밀려 버리면서, 그 이후로는 베트남 치하의 종속국으로 형식상으로만 유지되었다. 베트남은 외왕내제 체제였는데, 내부적으로 황제를 자칭하려면 지배하는 번국(藩國)이 필요했기 때문. 베트남의 황제들은 역사적으로 주변 라오스나 캄보디아, 참파를 정벌하고 그 지역에 친베트남계 왕을 옹립시켜 형식상 나라(번국藩國)로 인정하고 베트남 국왕 자신은 황제 노릇을 했다.
겨우 명맥만 유지하던 판두랑가 지역의 참파는 마침내 1832년 응우옌 왕조가 합병을 선언하면서 완전히 소멸되었다.
2.4. 몰락한 이유[편집]
사실 참파가 베트남에 인구는 밀릴 지 몰라도 풍부한 쌀 생산량과 비옥한 중부지대를 점유하고 있었고 무역으로 인한 재화도 풍부했기에 베트남과 전쟁하는 데 있어서 동등한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베트남은 수 천년 동안 중국 왕조들을 상대로 전쟁을 해오던 터라 군인들의 전투 경험이 풍부했다. 또한 베트남은 중국의 유학[10] 과 중앙집권체제[11] 를 도입하면서 참파보다 빠르게 국력을 집중시킬 수 있었고, 그래서 빠른 시간 내에 대규모 군대를 소집하여 참파의 공격에 대응하고 오히려 반격을 가할 수 있었다.
반면 참파는 16세기 중엽까지 다른 동남아 각국이나 말레이 반도의 이슬람 국가들처럼 도시국가들의 연맹체제를 유지하였던지라 도시국가들 중에 가장 영향력이 큰 도시의 왕이 참파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고 있었다.[12] 이러한 연맹체제의 특성상 군사소집 속도가 중앙집권화된 나라에 비해 느릴 수밖에 없다. 각 도시들에서 군사들을 징발해야 했고 또 소집에 응하지 않는 도시들도 있었으니 전쟁수행이 여러모로 불편했다. 결국 참파는 베트남의 대규모 침공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국사로 치면 중앙집권에 도달하지 못한 가야가 중앙집권에 성공한 신라에 밀려 결국 멸망하고 흡수당한 과정과 비슷하다. 만약 참파가 어느 영웅에 의해 통일되어 베트남과 같은 철저한 중앙집권국가가 되거나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일본의 에도 막부 내지는 독일 제국의 프로이센 왕국[13] 과 비슷한 수준의 강력한 중앙 정권이 탄생했다면 베트남과의 싸움에서 그렇게까지 허무하게 패망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이 또한 상상의 영역일 뿐이다.
2.5. 멸망 이후[편집]
참인들은 베트남에게 서서히 밀려 버리자 캄보디아나 말레이 반도, 태국으로 가서 이슬람이나 불교로 개종하거나 베트남에 남거나 했다. 물론 한때 참파의 왕이 무슬림이었으니 베트남에도 이슬람을 믿는 참인들이 꽤 있다. 그래서 베트남에서 얼마 되지 않는 무슬림들은 참인들이 대부분이라고 보면 된다. 그 후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의 도움으로 독립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지금은 베트남의 소수민족으로 전락했다.
15세기부터는 이슬람을 받아들였고 현재 참인들의 다수가 이슬람을 믿는다. 정확히 말하면 캄보디아와 말레이시아의 참족은 이슬람을 주로 믿고 베트남의 참족들은 힌두교를 주로 믿는다. 참인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인 경위는 이렇다. 참인들은 계속되는 베트남의 침략을 막기 위해 동맹을 맺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바다건너 말레이반도에 위치한 조호르 술탄국과 동맹을 맺었다. 그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왕도 있었고 자위 문자도 가져오기도 했다. 허나 이 동맹이 도움은 안 됐다. 왜냐하면 참파와 말레이는 넘 멀었고 게다가 이때 조호르 술탄국은 말레이 해협 건너편에 위치한 수마트라 섬에 있는 아체 술탄국하고 전쟁중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베트남 내에서 참파의 후예인 참 족의 인구는 베트남인들에게 동화되거나, 쫓겨나서 현재 약 40만 명 정도만 남아있다. 이외에 캄보디아-베트남 국경지대에도 많이 거주 중. 참족은 베트남보다 캄보디아에 더 많이 산다.
말레이시아에는 1970년대 월남전으로 인해 베트남에서 보트피플들이 왔다는데 소수의 참족도 있었다. 소수의 참족들은 같은 이슬람을 신봉하는 말레이시아에 남아 귀화하기도 했다고 한다.[14]
현 남베트남인들의 혈통에 참족들의 피가 진하게 섞여 있으니 참족은 남베트남인들의 조상으로 볼 수 있다.
3. 참파의 도시 국가[편집]
순서는 북쪽부터 남쪽이다. 인도 문화의 영향이 커서 산스크리트식 이름이다.
- 인드라푸라: 인드라의 도시라는 뜻으로 오늘날 다낭에 위치해 있었다. 초기에는 맹주격 도시 국가였으나 제일 북쪽에 있어서 베트남의 압박으로 비자야로 주도권이 넘어가고 가장 먼저 베트남에 정복되었다.
- 아마라바티: 불멸의 장소라는 뜻으로 인도 신화에서 인드라의 도시인 아마라바티에서 따왔으며 오늘날 꽝응아이 성에 위치해 있었다. 인도에서 동명의 도시가 사타바하나 왕조의 수도이자 안드라프라데시의 주도이기도 하다.
- 비자야: 승리라는 뜻으로 오늘날 꾸이년에 위치해 있었다. 1000년 경부터 참파의 맹주였으나 1471년에 대월이 정복하였다.
- 카우타라: 오늘날 냐짱에 위치해 있었던 도시국가였다. 포 나가르 사원이 유명하다.
- 판두랑가: 크리슈나의 다른 이름에서 따왔으며 오늘날 판랑탑짬에 위치해 있었으며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참파 도시국가였다.
4. 역대 참파 국왕[편집]
참파 왕국은 대체적으로 13세기 말 분열되기 전까지 총 15개의 왕조가 나뉘어졌다고 프랑스의 역사학자 조르주 마스페로(Georges Maspero)가 주장했다. 이하 계보는 참파의 역사에 대한 선구적 연구자로 유명한 조르주 마스페로의 주장을 근거로 씀.[15]
참고로 참파의 초기 국왕들은 제1왕조의 초대 국왕인 구련이 현지인 출신의 중국 관리였고, 제2왕조의 초대 국왕인 범문은 중국인이었기에 중국 문화권의 영향을 받아 중국식 성씨와 이름을 사용했으나, 중후기에는 인도 문화권의 영향을 받아 산스크리트식, 이슬람식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참파의 중후기 국왕의 중국식 이름은 주로 베트남 조정 측에서 한자를 이용하여 베트남어로 음차한 이름으로 남아있다.
4.1. 주요 국왕[편집]
4.2. 전체 계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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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각각 산스크리트어로 왕들의 왕, 전 국토의 군주라는 뜻이다.[2] 갑옷 입은 자들은 크메르 측에 고용된 중국인 용병이다.[3] 참파는 상좌부 불교가 들어온 적이 없었으며 오히려 대승불교권에 가까웠다. 사실 스리랑카와의 교류 증가나 타이족의 도래 이전에는 다른 동남아 지역도 미얀마를 제외하면 베트남처럼 대승불교가 강세였다.[4] 포 비나수오르 왕 당시 참파는 참파의 중흥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꽤나 넓은 영토를 보유했다.[5] 그러나 베트남 전쟁을 겪으면서 북부·남부 인들이 서로 섞이기도 하고 특히 호찌민 시가 경제도시로 부상하면서 지역이동이 잦아져서 현재는 북부와 남부의 차이가 많이 줄었다. [6] 물론 베트남 사람이 아니고 참파인이다.[7] 오늘날의 베트남 꽝찌 성 동하.[8] 그 싱가포르조차도 말레이시아령 시절의 영향으로 말레이어가 국어이고 말레이인이 최대 소수민족이며 이슬람교가 최대 소수종교다.[9] 지금의 냐짱.[10] 유교는 충효를 강조하기 때문에 유교가 사회를 지배하면 임금에 대한 백성들의 충성심이 강해진다.[11] 즉, 군현제를 받아들였기에 국토 전체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강했다. 그러므로 국가의 모든 힘을 제대로 동원할 수 있었다.[12] 대부분 지금의 다낭과 꽝응아이 지역에 속하는 인드라푸라와 비자야의 왕들이 돌아가면서 참파의 대표 왕 노릇을 했다.[13] 에도 막부는 명목상 다이묘들의 자치권을 인정했으며, 독일 제국은 명목상 독일 제국의 일부이면서도 프로이센 왕국에 합병되지는 않은 나라들(바이에른 왕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등)이 존재했다. 하지만 양쪽 모두 참파 수준의 매우 느슨한 연맹체제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중앙집권적 성격이 강한 편이었다.[14] 이때 같은 배에 탔던 베트남인들은 다 서방으로 갔다고 한다.[15] 조르주 마스페로가 왕조를 나눈 기준이 아마도 중국과 베트남 역사서에 참파의 전임과 후임국왕이 혈연관계가 불명이거나, 남남인 경우에 근거로 삼아서 정한 것 같다.[16] 제1왕조는 대체적으로 중국에서 쓴 기록들이 많다.[17] 베트남 기록에는 구련(區憐).[18] 혹은 范當根純.[19] 양서(梁書)에 기록된 이름.[20] 남사(南史)에 기록된 이름.[21] 여왕.[22] 아버지가 죄를 지어 이에 연좌될까봐 진랍에 도망가 있었고, 참파에 돌아와 여왕 이사나바르만과 결혼하여 참파의 왕이 되었다.[23] 베트남의 역사서 대월사기전서에 기록된 이름.[24] 유계종도 베트남인인데 아유타야왕조처럼 참파에서도 베트남인이 정변을 일으켜 왕이 된 것 같다.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참파에서 유계종이 이끄는 세력이 강해서 왕이 되었다는 말도 있다.[25] 베트남의 역사서에 기록된 이름.[26] 베트남의 역사서인 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에서 기록된 이름인데, 한자 음차를 다르게하여 기록되어 있다.[27] 베트남의 역사서인 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에 기록된 이름.[28] 베트남의 역사서인 월사략(越史略)에 기록된 이름.[29] 베트남의 역사서인 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에 기록된 이름.[30] 베트남의 역사서인 대월사기전서에 기록된 이름.[31] 복위.[32] 송사(宋史)에 기록된 이름.[33] 베트남의 역사서 대월사기전서에 기록된 이름.[34] 제12왕조의 왕인 제민, 제지, 제능은 베트남에서 기록한 이름이다.[35] 베트남의 역사서인 대월사기전서에 기록된 이름.[36] 베트남의 역사서에 기록된 이름.[37] 베트남의 역사서에 기록된 이름.[38] 베트남의 역사서에 기록된 이름.[39] 베트남의 역사서에 기록된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