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토소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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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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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백년전쟁 시기인 1341년 10월 14일 ~ 10월 16일, 장 드 몽포르와 샤를 드 블루아가 브르타뉴 공작위를 놓고 맞붙은 전투.


2. 상세[편집]


1341년 4월 30일, 브르타뉴 공작 장 3세가 사망했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기에, 그의 여조카인 팡티에브르의 잔이 브르타뉴 여공작에 선임되었다. 장 3세는 오래전부터 잔을 후계자로 정하고 철저하게 교육시켰으며,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조카인 샤를 드 블루아와 결혼시킴으로써 프랑스 왕실과 친프랑스파 귀족 및 성직자들의 후원을 받게 했다. 그러나 장 3세의 배다른 형제인 장 드 몽포르가 반발했다. 그는 프랑스 왕실이 필리프 5세부터 도입한 살리카법에 근거해 여자는 공작위를 계승할 자격이 없다며 자신이 공작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드 몽포르는 잔과 샤를 부부가 필리프 6세를 알현하게 위해 파리로 간 틈을 타 프랑스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하는 귀족 및 평민들의 지지를 토대로 군대를 일으켜 낭트, 렌, 디낭, 브레스트 등 브르타뉴의 가장 중요한 도시 및 성들을 빠르게 공략했다. 이에 샤를 드 블루아는 아내의 권리를 지켜주겠다고 선언하고 그 해 9월까지 5,000명의 프랑스 군인과 2,000명의 제노바 용병을 모집한 뒤 장 드 몽포르가 근거지로 삼은 낭트로 진격했다.

1341년 10월 14일, 샤를 드 블루아의 군대가 샹토소에 도착한 뒤 공성전에 착수했다. 장 드 몽포르는 처음엔 잉글랜드의 지원이 올 때까지 낭트에서 버티려 했다. 그러나 샤를의 뒤에 필리프 6세가 파견한 또다른 프랑스군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점점 많은 추종자들이 그를 저버리고 적에게 투항하려 했다. 이에 장은 지금 당장 승부를 보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10월 16일 낭트에서 출진해 샹토소 구원에 착수했다.

당시 샤를 드 블루아는 장성들에게 공성전을 맡기고 자신은 샹토소에서 3마일 떨어진 로모(l'Humeau) 농장에 머물렀다. 몽포르의 부하들은 이곳을 급습해 샤를의 경호원들을 거의 압도했다. 그러나 샤를이 농가의 탑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항전하는 바람에 제때에 잡는 데 실패했고, 그 사이에 프랑스군이 샤를을 구하기 위해 달려오면서 로모 농장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결국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장은 낭트로 도주했고, 많은 부하들이 프랑스 기병의 추격을 뿌리치지 못하고 죽거나 사로잡혔다.

낭트에 도착한 장은 시민들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자 "한 달 안에 잉글랜드군이 도착하지 않으면 항복할 테니 그 때까지 항전하자"라고 설득해 겨우 자신을 받아들이게 했다. 그러나 샤를의 군대가 도시를 에워싸서 공세를 퍼붓자, 낭트 시내에서 장을 넘기자는 목소리가 갈수록 커졌다. 이에 장은 10월 말에 용병과 민병대를 이끌고 적진을 급습했지만, 용병들이 전투 도중에 적군에 귀순하는 바람에 민병대가 몰살당하는 와중에 홀로 성안으로 도주했다. 그 후 샤를이 시신의 머리를 베어서 투석기를 통해 성내로 발사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시 의회가 장에게 항복을 강요했다.

결국 장은 더 버티지 못하고 11월 2일 샤를에게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는 대가로 항복했다. 샤를은 그가 성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약속을 파기하고 체포한 뒤 루브르 감옥에 보내버렸다. 그 후 샤를은 1341년 겨울 동안 브르타뉴 동부 전체를 공략하고 1342년 봄에는 렌을 비롯한 브르타뉴 서부 대부분을 공략했다. 그러나 장 드 몽포르의 아내인 플란데런의 잔이 엔봉 공방전에서 샤를을 막아내고 잉글랜드군이 잔의 편을 들어 전쟁에 개입하면서, 금방 끝나는 듯했던 브르타뉴 내전은 장기전으로 치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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