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를레앙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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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를레앙 공방전
영어: Siege of Orléans
프랑스어: Siège d'Orléans
파일:오를레앙 공방전.jpg
시기
1428년 10월 12일 ~ 1429년 5월 8일
장소
프랑스 왕국 중부 오를레앙
원인
잉글랜드군의 루아르 전역
교전국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왕국
파일:프랑스 왕국 국기(12세기-13세기).svg.png 프랑스 왕국
지휘관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솔즈베리 백작 토머스 몽터규†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존 탈보트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윌리엄 글라스데일†
파일:프랑스 왕국 국기(12세기-13세기).svg.png 장 드 뒤누아
파일:프랑스 왕국 국기(12세기-13세기).svg.png 잔 다르크
파일:프랑스 왕국 국기(12세기-13세기).svg.png 라울 드 고쿠르
파일:프랑스 왕국 국기(12세기-13세기).svg.png 니콜라 드 지레슴
파일:프랑스 왕국 국기(12세기-13세기).svg.png 장 포통 드 캥트라이유
파일:프랑스 왕국 국기(12세기-13세기).svg.png 질 드 레
파일:프랑스 왕국 국기(12세기-13세기).svg.png 알랑송 공작 장 2세
파일:프랑스 왕국 국기(12세기-13세기).svg.png 에티엔 드 비뇰
병력
5,000여 명
부르고뉴군 1,500명
초기: 수비대 200명, 도시 민병대 3,000명
증원군 3,000여 명
피해
기록되지 않음
기록되지 않음.
결과
프랑스군의 승리.
영향
프랑스군의 대반격
1. 개요
2. 사료
3. 배경
4. 전투 경과
4.1. 솔즈베리 백작의 속공전
4.2. 장기화된 공방전
4.3. 잔 다르크의 등장
4.4. 잔 다르크의 활약
5. 평가



1. 개요[편집]



백년전쟁 시기인 1428년 10월 12일 ~ 1429년 5월 8일, 잉글랜드군이 프랑스 중부 루아르 강변의 오를레앙을 포위하면서 벌어진 공방전. 잔 다르크가 역사의 무대에 처음 등장한 공방전이다.


2. 사료[편집]


오를레앙 공방전을 다룬 당대의 주요 사료는 익명의 프랑스인 저자가 저술한 <오를레앙 공방전 일기>이다. 이 저서는 잔 다르크의 무죄가 선고된 후인 1460년대에 오를레앙 시 당국에 의해 복사되어 프랑스 전역에 퍼졌고, 프랑스 연대기 저자 장 샤르티에에게 광범위하게 인용되었다. 현대 학자들은 일기의 저자가 오를레앙 공방전에 관해 귀중한 정보를 제공했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전투 과정에 대해 다룰 때 어색한 부분이 많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가 군인이 아니라 성직자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

반면 잉글랜드 측에서 이 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룬 당대 연대기나 사료는 현존하지 않으며, 단지 영국 장성들이 동료에게 전하거나 국왕에게 보고하기 위해 보낸 서신 일부에 간략하게 언급될 뿐이다. 오를레앙 공방전 중에 벌어진 후브헤 전투(일병 '청어 전투')는 잉글랜드군이 승리했는데도 불구하고 역시 잉글랜드 측 사료에 언급되지 않았고, 프랑스인들이 기술한 '처녀 연대기', '파리 시민의 일기', '매우 중요한 책'에 포함되었다. 19세기 프랑스 사학자 레미 부쉐 데 모랑동(Rémi Boucher de Molandon, 1805 ~ 1893)은 저서 <잔 다르크의 첫번째 군사적 승리(1874)>에서 이 점을 지적하며, 오를레앙 전투에 관해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을 거라고 추정했다.


3. 배경[편집]


프랑스 중부 루아르 강변에 자리잡은 오를레앙은 파리와 함께 일드프랑스의 주요 도시다. 본래 프랑스 왕실의 직할지였다가 1345년 필리프 6세가 아들 필리프에게 이곳을 양도하면서 오를레앙 공국의 수도가 되었다. 1375년 필리프가 죽은 후 다시 왕실 직할지가 되었다가 샤를 6세의 형제인 루이에게 양도되었다. 오를레앙은 백년전쟁 기간 동안 잉글랜드군의 위협을 종종 받았다. 1358년 로버트 놀스가 이끄는 잉글랜드 기병 선봉대가 도시 주변 지역에서 약탈을 벌였고, 1359년 흑태자 에드워드가 오를레앙을 기습 공격했지만 수비대에게 격퇴되었다. 1380년 버킹엄 공작 헨리 스태퍼드가 슈보시(Chevauchée: 약탈 행진)를 벌일 때 오를레앙 인근까지 이르렀지만 수비가 강고한 것을 보고 돌아갔다.

1407년 루이가 암살된 후 그의 아들 샤를이 오를레앙을 맡았고,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가 최고 권력을 놓고 격렬하게 대립했을 때 아르마냑 파의 주요 근거지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부르고뉴파가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가 북부 프랑스를 대거 석권했을 때, 오를레앙은 아르마냑 파가 북부 프랑스로 진출할 수 있는 최후의 거점이자 아르마냑파가 프랑스 국왕으로 추종하는 도팽 샤를이 본거지로 삼은 부르주에 잉글랜드군이 쳐들어오는 것을 저지하는 요충지가 되었다. 그러니 잉글랜드의 위협이 더욱 거세질 수밖에 없었다.

오를레앙 시 당국은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방어력을 꾸준히 강화했다. 성벽과 탑, 방벽과 댐을 신설 또는 보강했고, 요새 다리를 수리하고. 화약을 제조하고. 납을 구입하고, 석궁을 대량 구매했다. 또한 수비대와 도시 주민들을 위해 곡물을 비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15세기 초 오를레앙 시가지는 북규칙한 사각형 형태로 건설된 강력한 요새로 보호받았다. 도시는 총길이 2,590m의 성벽으로 둘러싸였으며, 다섯 개의 성문이 있었다. 모든 성문에는 하강하는 강철 막대가 장착되었으다. 성벽 꼭대기에는 높이가 6~10m에 달하는 37개의 탑이 있었으며, 18개의 대포가 성벽 위에 세워졌다. 또한 성벽에서 근무하는 수비대를 보호하기 위해 흉벽 사이에 130개의 나무 방패가 설치되었디.

한편 서로 다른 길이의 19개 경간으로 구성된 400m 길이의 다리가 루아르 강을 가로질러 연결되었으며, 첫번째 경간은 사슬로 세워졌다. 이중 다섯번째 경간은 루아르 상류 위에 떠있는 2개의 섬에 설치되었다. 위쪽 섬은 생 앙투안 섬으로 불렸고,아래쪽 섬은 '어부의 섬'으로 불렸다. 각 섬에는 바스티드(Bastide: 소규모 요새)가 있었다. 생 앙투안 섬의 바스티드는 예배당에 거의 인접했고, 다른 하나는 어부의 섬에 있는 한센병 환자 수용소와 인접했다. 또한 11번째와 12번째 경간 사이에는 철제 십자가가 세워졌으며, 여기에도 바스티드가 세워졌다.

다리의 18번째 경간에는 '투렐(Turel)' 요새가 있었다. 이 요새는 원형과 직사각형으로 이뤄진 두 개의 작은 탑으로 구성된 이중 요새였다. 아치형 다리로 연결되었으며, 바닥은 부분적으로 물에 잠겼다. 이 요새는 적 포병이 도시 성채를 공격하기 위해 배치되는 것을 막기 위한 외부 요새 시스템인 토성의 보호를 받았다. 다리의 19번재이자 마지막 경관은 체인을 사용해 끌어올릴 수 있었다.

1428년, 잉글랜드와 프랑스 국왕 헨리 6세의 섭정을 맡은 베드퍼드 공작 존은 전쟁을 끈질기게 이어가는 도팽 샤를을 끝장내기 위한 오를레앙 원정을 단행하기로 했다. 사실 베드퍼드 공작 본인은 처음엔 오를레앙보다는 앙주의 중심지인 앙제 요새를 공략하는 것을 선호했다. 하지만 솔즈베리 백작 토머스 몽터규는 앙제를 공략한들 도팽 샤를의 저항은 계속 이어질 거라며, 루아르 강변의 핵심 거점인 오를레앙을 공략한 뒤 루아르 강을 도하한 후 샤를의 본거지인 부르주를 포위해 굴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드퍼드 공작은 당시 잉글랜드의 포로였던 오를레앙 공작 샤를의 소유인 곳을 압수하는 것은 기사로서 가치가 없는 일로 여겼기에 망설였지만, 다른 장성들이 솔즈베리 백작의 주장에 동조하자 마음을 달리 먹고 오를레앙 공략을 지시했다. 1427년 7월 17일 오를레앙 백작과 서퍽 백작, 부르고뉴 대표가 런던에서 오를레앙 공국이 침략당하지 않을 것을 보장하는 조약에 서명했지만, 베드퍼드 공작은 이를 비준하지 않았다.[1]

1428년 8월 파리에서 출발한 솔즈베리 백작의 군대는 도중에 부르고뉴군과 피카르디 방면 잉글랜드 분견대와 합세했다. 총 병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기록마다 판이한데, 현대 학계에서는 대체로 부르고뉴군 1,500명을 합쳐 5,000명이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이들은 처음엔 앙주로 향하여 이전에 도팽 샤를의 지지자들이 점령한 4개의 도시를 탈환하고 8월 하반기에 샤르트르를 공략한 후 남동쪽의 진빌로 진군해 역시 함락한 후 후방의 식량 창고로 삼았다. 이후 자르조, 보장시, 멘 일대를 공략해 오를레앙으로 접근하는 루아르 강 경로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했다. 이후 10월 12일에 오를레앙을 포위하면서 장장 반년간 이어진 오를레앙 공방전의 막이 올랐다.


4. 전투 경과[편집]



4.1. 솔즈베리 백작의 속공전[편집]


잉글랜드군이 오를레앙을 갓 포위했을 때, 오를레앙 수비군은 정규군 200명, 도시 민병대 3,000명이었다. 솔즈베리 백작은 구원군이 오기 전에 속전속결로 끝내야 한다고 여기고 공세를 개시해 오를레앙 인근의 올리베 마을을 장악하고 프랑스군을 루아르 강의 오른쪽 강둑에서 밀어냈다. 그 후 오를레앙 인근의 루아르 강 동쪽 강변에 있는 134m 높이의 몽생로방 언덕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오를레앙 시민들은 이에 맞서 오를레앙 교외의 모든 준택과 주택을 파괴해 적의 피난처 역할을 하지 못하게 했고, 주변의 농지와 숲을 황폐화시켜서 적이 오래 머무르기 어렵게 만들었다.

10월 21일, 잉글랜드군은 투렐 요새를 공격했지만 치열한 백병전 끝에 격퇴되었다. 이후 정면 공격을 포기하고 투렐 요새 앞의 토성을 곡괭이로 파헤치기로 했다. 이 시도는 성공했고, 토성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투렐 요새로 도주했다. 솔즈베리 백작은 토성이 있던 곳에 대포를 배치한 뒤 투렐 요새를 향해 포격을 퍼부었다. 결국 투렐 요새 성벽이 허물어질 기미가 보이자, 프랑스군은 10월 23~24일 밤 투렐 요새를 버리고 다리의 마지막 경간을 파괴한 뒤 본성으로 후퇴했다.

10월 24일, 솔즈베리 백작은 투넬 요새의 2개 탑 중 하나에 올라가서 창문을 통해 도시를 바라봤다. 그런데 노트르담 탑에 설치된 대포가 그 쪽으로 쏜 포탄이 그의 머리에 명중했고, 그는 한쪽 눈이 찢어지고 얼굴이 짓이겨진 채 쓰러졌다. 이후 멍 슈흐 루와흐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지만 11월 3일에 사망했다. <오를레앙 공방전 일기>의 저자는 이 일에 대해 다음과같이 논평했다.

잉글랜드인에게는 매우 큰 불행이었지만 왕국에 큰 축복이었다. 그는 잉글랜드 군대와 나라의 사령관으로서 가장 유명하고 두려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4.2. 장기화된 공방전[편집]


오를레앙을 빠른 시기에 공략하려던 솔즈베리 백작이 허망하게 죽어버린 후,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이 새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그는 공성전을 감행했다가는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게 자명하니 포격을 도시로 끊임없이 퍼붓고 철저하게 봉쇄해서 적을 굶겨 죽이기로 하고, 수비대가 파괴한 수녀원 폐허 위에 요새를 건설했다. 이후 수많은 목조 요새가 도시 주변에 세워졌지만, 도시를 완전 포위하기에는 병력이 매우 부족했기에 장 드 뒤누아, 에티엔 드 비뇰, 생 세베르, 롬바르드인 용병 테오돌트 드 발페르그 등이 구원군을 이끌고 영국군이 미처 봉쇄하지 못한 지점을 통과해 요새로 진입했고 보급품도 꾸준히 전달되었다.

12월 1일 존 탈보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포위군을 돕기 위해 현장에 도착했다. 12월 7일 수비대가 투렐 요새를 탈환하기 위해 출격했지만 격퇴되었다. 이후 오를레앙 수비대는 12월 29일까지 도시 외곽에 남아있는 여러 교회를 불태웠다. 이듬해인 1249년 1월, 탈보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오를레앙의 서쪽 요새 주변에 울타리와 도랑으로 연결된 일련의 요새를 세우고 여러 차례 공격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이후 잉글랜드군은 1429년 4월까지 오를레앙 동쪽 강둑의 생 루에 추가 요새를 세웠다. 그 동안 보급품이 도시의 북쪽과 북동쪽 도로를 통해 오를레앙으로 들어왔다. 잉글랜드군은 이를 막기 위해 요새화된 기지를 그쪽에 세우려 했지만, 그러기엔 병력이 부족해서 차일피일 미뤄졌다. 이렇듯 잉글랜드군의 공세가 지지부진하던 1429년 2월 8일, 한 처녀가 오를레앙에 곧 나타날 것이며 프랑스가 그녀에게 구원받을 거라는 소문이 퍼졌다.

2월 11일, 존 파스톨프가 지휘하는 1,000명의 기마 궁수 및 기사들이 300대의 마차에 식량, 화살, 화약, 대포, 그리고 사순절 기간에 병사들에게 먹일 청어를 가득 싣고 오를레앙으로 향했다. 그러던 중 후브헤 마을 인근 평원에서 오를레앙을 구원하러 가던 클레르몽 백작 샤를 1세와 에브뢰 백작이자 스코틀랜드 장군인 존 스튜어트 드 단리가 이끄는 프랑스 기병대 4,000명과 마주쳤다. 하지만 이어진 후브헤 전투(일명 '청어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참패했고, 잉글랜드 수송부대는 유유히 아군 진영으로 가서 보급품을 전달했다. 오를레앙 수비대를 지휘하던 장 드 뒤누아는 이 전투에 참여했다가 부상을 입은 뒤 오를레앙으로 가까스로 돌아왔다.

뒤누아는 구원군이 격파된 것에 낙담해 적 진영에 저명한 시민 대표단을 보내 오를레앙을 부르고뉴에 넘기고, 잉글랜드인과 부르고뉴인들이 루아르 강 남쪽으로 이동할 수 있게 하겠다고 제안했다. 여기에 도시의 세금 중 절반을 잉글랜드에 바치고, 나머지 절반은 오를레앙 공작의 몸값으로 보내겠다고 덧붙였다.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는 이 제안에 혹해 파리로 달려가서 베드포드 공작 존에게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오를레앙이 곧 함락될 거라 확신했던 베드퍼드 공작은 오를레앙을 부르고뉴에게 넘기기 싫었기에 거부했다. 이에 실망한 필리프는 오를레앙 공방전에 참여한 부르고뉴군에 철수를 명령했고, 부르고뉴군은 1429년 4월 17일에 전장을 떠났다. 이로 인해 가뜩이나 부족했던 포위 병력은 더욱 부족해졌고, 오를레앙 북쪽 도로를 막기 위해 설치될 예정이었던 북쪽 초소는 취소되었다.


4.3. 잔 다르크의 등장[편집]


후브헤 전투가 벌어지던 그 날, 17세의 프랑스 농민 소녀 잔 다르크가 보쿨뢰르 지방의 영주 로베르 드 보드라쿠르에게 찾아와서 프랑스를 구하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며 자신을 도팽 샤를이 있는 시농 성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로베르는 그녀가 미쳤거나 마귀가 씌었다고 여기고 제안을 여러 차례 거부했고 수도사를 보내 퇴마 의식을 거행해보기도 했지만, 잔 다르크는 끝까지 뜻을 꺾지 않았다. 그러다가 후브헤 전투 소식을 접한 로베르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를 시농으로 보내기로 했다.[2]

잔은 얼마 안 되는 호위대와 함께 435km에 달하는 거리를 주파하여 시농에 도착했다. 3월 9일 샤를을 알현한 잔은 자신을 오를레앙 구원군에 가담시켜달라고 청원했다. 샤를은 며칠동안 그녀가 과연 승리를 가져올 것인지를 놓고 측근들과 비공개 회의를 한 뒤, 잔에게 푸아티에로 가서 교회 당국의 조사를 받으라고 지시했다. 잔은 순순히 푸아티에로 향했고, 성직자들의 강도높은 심문을 거뜬히 통과했다. 결국 샤를은 3월 22일 그녀를 믿기로 하고, 판금 갑옷, 배너, 검, 종자를 하사했다.

1429년 4월 17일, 잔 다르크는 알랑송 공작 장 2세가 이끄는 3,000명의 맨앳암즈와 함께 블루아에서 출발했다. 그녀는 병사들에게 욕설을 하지 말고, 수용소에 여성을 풀어놓지 않으며, 모두 미사에 참석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한다는 지침을 내렸고, 모두가 이에 복종했다. 여기에 여러 성직자가 오를레앙을 구원하기 위해 진격하는 프랑스군과 동행했다.

이들의 첫번째 임무는 오를레앙 수비대와 시민들에게 물자를 보급하는 것이었다. 뒤누아와 장 2세는 전령을 통해 정기적으로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구원군이 남쪽 제방을 따라 상류 마을인 셰지에 도착하면, 오를레앙에 있는 바지선들이 그쪽으로 가서 보급품을 접수한 뒤 오를레앙 동쪽의 부르고뉴 성문으로 가져오기로 했다. 또한 뒤누아는 적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 부르고뉴 성문 주변에 있는 잉글랜드 수비대에 대한 우회 공격을 벌이기로 했다.

파일:오를레앙에 입성하는 잔 다르크.jpg
장 자크 쉐럴(Jean-Jacques Scherrer), <오를레앙에 입성하는 잔 다르크>, 1887년.

4월 28일, 장 2세의 구원군은 오를레앙 남쪽 외곽에 도착했다. 잔 다르크는 4월 29일 오후 8시쯤 200명의 군인을 이끌고 도시에 입성했다. 적이 눈치채지 않도록 일부러 늦은 시각에 들어간 것이었지만, 이러한 예방 조치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를레앙 공방전 일기>의 저자는 공방전 과정을 건조하게 전달하던 어조에서 벗어나 거의 시적인 스타일로 그녀의 입성 과정을 다루었다.

오를레앙에 들어서자 매우 화려한 옷을 입고 무장한 오를레앙의 서자(장 드 뒤누아)가 그녀의 왼쪽으로 이동했다. 그 뒤에는 도시 수비대의 병사들과 행렬을 이룬 민병대는 말할 것도 없고, 더 많은 귀족과 용감한 영주, 종자, 대장, 무장병들이 타고 있었다. 수많은 군인과 마을 사람들, 마을 아낙네들이 그들을 맞으러 나왔고, 횃불을 들고 마치 주님께서 친히 그들에게 내려오신 것처럼 기쁨을 표현했다. 그들은 많은 고난, 걱정, 박탈감, 그리고 그보다 훨씬 나쁘게도 운명의 자비에 버림받고 생명과 재산을 잃을 것이라는 끊임없는 두려움을 품어왔다. 이제 그들은 모든 근심이 사라졌고, 하느님의 은혜로 포위가 이미 풀렸다는 것을 믿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하느님의 은혜가 이 단순한 소녀의 형태로 나타났다고 확신했다.

여자와 아이들은 사랑과 존경심으로 바라봤다. 그들은 단지 그녀가 앉아 있는 말을 만지기 위해 몰려들었다. 군중이 너무 세게 몰아붙여서 성화를 이끌던 종자 한 명이 그녀의 깃발에 너무 가까이 밀려나서 불꼿이 캔버스에 닿았다. 바로 그 순간, 그녀는 박차를 가해 말을 치고 그를 깃발 쪽으로 돌렸고, 마치 그녀에게 전쟁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수년간 치렀던 것처럼 자신있게 불을 끌 수 있었다. 군인들과 마을 사람들은 이것을 큰 기적이라 여겼다.


잔은 며칠 동안 오를레앙 거리를 순회하며 사람들에게 음식을 분배하고 수비대에 급여를 분배했다. 그러던 중 포위를 뚫기에는 수비대가 너무 적다고 생각한 뒤누아가 5월 1일 지원군을 모집하기 위해 요새를 에티엔 드 비뇰에게 맡기고 자리를 비웠을 때, 잔은 도시 밖으로 나가서 모든 잉글랜드 요새를 개인적으로 조사한 뒤 루아르 강의 파괴된 다리로 가서 투렐 요새 사령관 윌리엄 글라스데일에게 물러나달라고 설득했다. 훗날 그녀의 행적에 대해 법정에서 증언한 성직자 장 파스쿠렐은 잉글랜드 병사들이 이렇게 외쳤다고 회상했다.

"아르마냑 창녀가 여기에 왔다!"


이후 글라스데일이 온갖 조롱과 저주를 퍼부었지만, 잔 다르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계속 설득했다. 그녀의 종자였던 장 돌론은 글라스데일이 끝내 물러나지 않자, 잔이 오를레앙으로 돌아가면서 자신에게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이제 소중한 프랑스인의 피를 얼마나 흘려야 할까요?"



4.4. 잔 다르크의 활약[편집]


5월 4일 이른 아침, 뒤누아가 확보한 지원군이 오를레앙으로 돌아왔다. 이후 뒤누아는 잔에게 출격한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고 에티엔과 함께 생 루 요새를 공격했다. 이를 뒤늦게 알게 된 잔은 급히 달려가서 공격 부대에 합류했다. 당시 생루 요새 공략에 투이된 프랑스군 병력은 1,500명이었다. 존 탈보트는 생 루 요새에 대한 적의 공세를 약화시키기 위해 파리 성문을 공격했지만 수비대에게 저지되었다. 그 사이에 생 루 요새는 함락되어 140명의 잉글랜드 병사가 전사하고 40명이 생포되었다.

이때 생루 수비대 잔당들이 근처 수도원에 숨어서 성직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옷으로 갈아입어서 탈출하려 했지만, 프랑스군이 제때에 돌입해서 이를 저지했다. 잔은 수도원 안으로 들어와서 병사들에게 포로들을 죽이지 말고 오를레앙으로 이송하게 했다. 그 후 뒤누아는 더 큰 전과를 노리기 위해 공세를 이어갔다가 패배하면 수비대의 사기가 급락할 것이라 여기고 생 루 요새를 파괴한 뒤 오를레앙으로 돌아갔다.

5월 5일, 잔 다르크의 메시지를 담은 서신이 화살을 통해 잉글랜드 진영에 전달되었다. 그녀는 이 서신에서 생 루에서 사로잡힌 잉글랜드 포로들과 잉글랜드 진영에 붙들린 포로들을 교환하자고 제안했으며, 잉글랜드군의 조속한 철군을 호소했다. 이에 잉글랜드군은 그녀를 성적으로 모욕하고 마녀로 매도하는 답신을 보냈다. 다음날, 잔은 뒤누아를 비롯한 장군들에게 포위를 풀기 위한 결정적인 공격을 시작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특히 생 앙투안 섬의 바스티드를 군인과 민병대의 합동 공격으로 공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뒤누아는 그녀의 주장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일단 잉글랜드군이 수비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철수한 오를레앙 남쪽 제방의 작은 요새인 생장르블랑을 접수했다.

얼마 후, 오를레앙에 존 파스톨프가 포위군을 돕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파리에서 출발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는 헛소문이었지만, 수비대 지휘관 내부에서 그들이 오기 전에 포위망을 풀어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장 드 뒤누아와 오를레앙 시장 라울 드 고쿠르는 신중론을 제기했지만, 잔 다르크는 대다수 군인 및 민간인들의 호응을 받으며 적극적인 공세를 벌이자고 주장했다.

그러던 5월 6일 아침, 군인과 민병대가 잉글랜드군과 싸우기로 결심하고 동쪽 성문에 집결했다. 라울이 이들이 무단 출격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잔 다르크가 "내가 앞장서겠다"라고 외치고 모두가 열띤 호응을 보이자 어쩔 수 없이 성문을 열었다. 뒤누아는 자신의 허락 없이 출격한 잔 다르크에게 화를 냈지만, 군대를 통제하기 위해 다른 장교들과 함께 공격에 가담했다. 프랑스군은 루아르 강을 건너 생 앙투안 섬의 바스티드를 공격했다. 잔 다르크는 최전선에 나아가 병사들을 독려했고, 프랑스군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맹렬히 공격한 끝에 요새를 점령하고 그곳에 갇혀 있던 동포들을 석방했다. 잔은 약탈을 벌이려는 병사들을 막으려고 노력하다가 요새 주변에 흩어져 있는 철 스파이크 중 하나에 찔러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살아남은 잉글랜드군은 투렐 요새로 도주했다.

파일:Lenepveu,_Jeanne_d'Arc_au_siège_d'Orléans.jpg
잔 다르크의 오를레앙 해방 장면을 그린 그림인 오를레앙의 갑옷을 입은 잔
(Joan in Armor at Orléans, 쥘 외젠 르네프뵈(Jules-Eugène Lenepveu) 작, 1886년과 1890년 사이, 캔버스에 유화).


5월 7일, 아침 일찍 일어난 잔은 아침 미사를 드린 뒤 병사들을 깨웠다. 주민들은 다가올 전투에 열광했고 군대에 큰 지원을 제공했다. 뒤부아 등은 병사들을 좀더 쉬게 한 뒤 투렐 요새를 공격하려 했는데 잔이 투렐 요새 공격을 단독으로 결정하고 밀어붙이자 불만을 터트렸지만, 그녀에게 이미 매료된 장군들이 잔을 옹호하자 어쩔 수 없이 투렐 요새 공격을 승인했다. 프랑스군은 바비칸과 투렐 요새를 연결하는 다리를 파괴하기 위해 불타는 바지선을 보낸 후 투렐 요새를 향해 맹공격을 퍼부었다. 전투는 매우 격렬했고 양측 모두 큰 손실을 입었다.

그러던 중 성문을 부수려는 장병들을 독려하던 잔이 어깨에 화살을 맞고 중상을 입었다. 하지만 그녀는 간단한 치료를 받은 후 곧바로 전장에 복귀해 병사들을 독려했고, 프랑스군은 그 모습에 그녀가 정말로 하느님의 은혜를 입은 성녀가 분명하다고 확신하고 요새를 맹렬히 공격했다. 결국 영국군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패주하다가 불타는 바지선에 의해 손상을 입은 다리가 병사들의 무게 때문에 무너지면서 물속에 떨어져 대거 익사했다. 그 중에는 투렐 요새 수비대장이며 지난날 잔 다르크에게 조롱을 퍼부었던 윌리엄 글라스데일도 있었다.

투렐 요새가 함락되면서 오를레앙을 공략할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자, 서퍽 공작과 존 탈보트는 5월 8일에 잔여 병력을 집결시키고 오를레앙 요새 앞에 집결했다. 그 모습을 본 프랑스군도 전투를 준비했고, 일부 사령관들은 아예 성밖으로 나가서 저들을 쓸어버리자고 외쳤다. 하지만 잔은 이 날이 일요일이기 때문에 전투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 출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잉글랜드군은 적이 출격하지 않자 파리로 철수했고, 프랑스군은 추격하지 않았다. 적이 물러나는 것을 본 주민들은 텅 빈 잉글랜드 요새들을 약탈하고 파괴했으며, 성벽 인근에서 추수감사절 미사가 거행되었다. 이리하여 오를레앙 공방전은 프랑스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5. 평가[편집]


일부 현대 학자들은 잔 다르크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도 잉글랜드군은 오를레앙을 공략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식량과 자금을 불규칙적으로 공급받았고, 동맹 세력인 부르고뉴군이 도중에 철수해버렸으며, 포위망은 완전하지 못해서 구원군과 보급물자가 순조롭게 오를레앙에 전달되는 등, 여러 상황을 고려할 때 오를레앙 공략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솔즈베리 백작 토머스 몽터규가 우연히 포탄에 맞아 죽지 않았더라면 초전의 패배로 사기가 떨어진 오를레앙의 얼마 안 되는 수비대를 압도하고 오를레앙을 공략할 가능성이 높았을 테지만, 그 뒤를 이은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은 우유부단하게 행동해 일을 그르쳤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하지만 잔 다르크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오를레앙이 함락되지는 않았더라도 공방전은 훨씬 뒤에야 결판났을 것이고, 잉글랜드가 그 사이에 오를레앙 주변의 요충지들을 확고히 지배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그녀가 최전선에서 병사들을 독려하고,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었는데도 또다시 나서는 모습을 보이는 등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 프랑스 장병과 민간인들에게 깊은 감동과 용기를 불어넣은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그녀는 오를레앙 공방전을 통해 입지를 확고히 다졌고, 이를 발판 삼아 프랑스의 대대적인 반격의 선봉장으로서 맹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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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점이 마음에 걸렸는지, 베드퍼드 공작은 훗날 오를레앙 공략에 실패한 뒤 헨리 6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포위 결정을 내리도록 조언한 자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라고 주장했다.[2]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잔 다르크가 오를레앙 근처에서 도팽을 따르는 군대가 큰 패배를 겪을 것이며, 자신이 보내지지 않으면 오를레앙을 잃을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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