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즈버그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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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Gettysburg Address
1863년 11월 19일, 게티즈버그 전투의 격전지였던 펜실베이니아 주 게티즈버그에서 열린 국립묘지 봉헌식에서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대통령이 한 연설. 272단어에 3분여의 짧은 연설이지만,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설이자 가장 많이 인용된 연설문이 되었다.
2. 상세[편집]
이 연설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선 약간의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북부에선 '대체 왜 우리가 흑인 때문에 싸워야 하나' 하고 반발하는 사람이 많았다. 특히 게티즈버그 전투 이전만 하더라도 북부는 시종일관 상당히 압도적인 물량적 우세를 지녔음에도 전황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북부 미국인들은 지지부진해서 이길 기미도 안 보이는 전쟁이라 더더욱 불만이 많았다. 이런 상태에서 링컨은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북부가 크게 승리한 것을 계기로 이 여론을 뒤집고 명분을 가져오고자 했고, 그러한 과정에서 나온 게 게티즈버그 연설이다.
앤티텀 전투 이후의 노예해방선언과 비교하면, 둘 다 명분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국내외의 여론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같지만 세부적인 성격은 차이가 있다. 노예해방선언은 노예제를 지키는 남부를 질타해서 남부에게 명분이 없다는 것을 외국에게 상기시켜 외국의 물자 지원이나 개입을 막기 위한 외교적 목적이 강했다. 게티즈버그 연설은 격전지에 왔으니 죽은 병사들을 추모하는 당연한 내용에다 죽은 병사들이 왜 죽어가면서까지 싸워야 했는지를 연설하며 정당성을 이야기하면서 북부 내 여론을 바꾸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통치는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2]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라는 문구가 유명하다. 사실 이 문장을 링컨이 제일 먼저 쓴 건 아니다. 1830년 1월 26일, 미국 3대 명연설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 대니얼 웹스터의 <헤인에게 답한다>라는 상원 연설에서도 나온다. "정부의 기원은 헌법이며, 정부의 성격은 인민을 위해, 인민에 의해 만들어졌고, 인민에게 책임을 지는 인민의 정부라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정치와 법 교과서에서는 시민으로, 위키백과와 네이버 지식백과에서는 국민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 명연설을 기록한 원고는 총 다섯 부가 남아 있다. 미국 의회도서관이 그 중 두 부를 보유하고 있다. 과거에는 오늘날처럼 공적 기록물을 관리하는 체계가 완비되어 있지 않았고, 연설문 원본을 컴퓨터로 인쇄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기록 과정에서 원고마다 조금씩 차이가 생기곤 한다. 현전하는 게티즈버그 필사본들 역시 그런 이유 때문에 문장 부호 등에 아주 조금씩 차이가 있다. 그러나 내용에는 사실상 차이가 없으며 모두 링컨 본인의 손을 거쳐서 쓰인 필사본들이기에, 게티즈버그 연설의 원문을 파악할 수 없다는 말에는 다소 과장이 섞여 있다.
3. 과소평가되었던 연설[편집]
현대에는 이 연설이 간결하고 명료하며 우수한 구조 때문에 매우 선구적인, 명연설의 대명사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링컨이 살던 당시에는 최대한 말을 어렵고, 길고, 복잡하고, 화려하게 말하는 것이 지적 패션의 하나로 추앙받는 시대였다. 당장 명료하고 직관적이어야 할 신문 보도조차 만연체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자존심 있는 19세기의 기자들은 집 한 채가 불타서 내려앉았다고는 절대 쓰지 않고 대신 "큰 화재가 구조물을 전소했다"고 말했을 것이다. 또한 "사람들이 떼를 지어 구경을 나왔다"처럼 인상적이지 않은 글에 만족하지 않고 "대규모 인파가 군집해서 목격을 했다"라는 식으로 썼을 것이다.
케네스 크밀, <민주적인 웅변(Democratic Eloquence)>
따라서 당대의 명연설, 명문장이랄 것들은 중문에 복문은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 온갖 수식어로 범벅되어 질질 끌면서 2시간은 넘기는 것이 기본이었다. 빌 브라이슨의 표현을 빌리자면, 당시는 "여덟 마디를 할 수 있는데 두 마디만 하거나, 일주일에 같은 말을 두 번 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던" 시대였다. 가장 극명한 예로 봉헌식 행사 때 링컨보다 앞선 차례에 연설했던 당시 연설 대표자 에드워드 에버렛의 게티즈버그 연설문을 보자.
베이컨 경은 "명예로운 통치의 수준을 정확하게 정렬"하면서 "국가와 연합의 창시자"를 최고로 쳤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본성, 열정, 개인의 의견, 가족, 혈통, 부족 사이의 경쟁, 기후와 지리적 위치의 영향,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평화와 전쟁의 사건들에 담긴 부조화의 요소들, 그처럼 양립하지 않는 요소들을 바탕으로 잘 정비되고 번영하는 강력한 국가를 성립하려면, 그것도 한 번의 노력이나 한 세대 안에서 그것을 달성하려면 사람으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능력을 필요로 한다고 할 것입니다.
Lord Bacon, in "the true marshalling of the sovereign degrees of honor," assigns the first place to "the Conditores Imperiorum, founders of States and Commonwealths"; and, truly, to build up from the discordant elements of our nature the passions, the interests, and the opinions of the individual man, the rivalries of family, clan, and tribe, the influences of climate and geographical position, the accidents of peace and war accumulated for ages, to build up from these oftentimes warring elements a well-compacted, prosperous, and powerful State, if it were to be accomplished by one effort or in one generation would require a more than mortal skill.
<게티즈버그 연설>, 에드워드 에버렛, 1863.11.19
저 한 문장[3] 에서 등장하는 연이은 종속절, 복잡한 구조, 옆길로 샌 보충설명, 문학적 암시, 인용, 애매한 역사적 사실, 필요 없는 화려한 수식어들은 당시 연설들이 어떠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저 정도면 수능 영어 지문 하나(못해도 반 이상) 정도는 거뜬히 채울 정도다.[4][5]
에버렛은 당대의 명연설가로, 메사추세츠 주지사와 주영 미국대사, 국무장관, 미 의회 하원 및 상원의원 등 다수의 정계 요직을 역임했던 대단한 인물이었다. 남북전쟁 시기에는 70대의 은퇴한 원로 인사였고, 특별히 자리에 나와 노익장을 과시하며 링컨 연설 바로 전에 나와 저런 문장들이 무려 1,500개나 이어진 연설문을 추위에도 불구하고 장장 두 시간 동안 읽었다. 전문의 단어 수는 약 13,500개, 문자 수는 대략 66,000자다. 한 번 전문을 확인해 보자. 더욱 기가 찬 것은, 이 정도 길이의 연설문이 당시에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청중들도 대단했다. 두 시간 동안 추위를 견디면서까지 듣고서 박수까지 보냈으니까. 오히려 이 당시 청중은 유명인 연설 한 번 듣겠다고 수시간 동안 걷고 말 타고 왔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연설이 짧으면 되려 화를 냈다.[6] 그리고 링컨이 네 시간 동안 이어진 행사[7] 에 지치고 춥고 배고픈 15,000명의 사람들 앞에 등장했다.
링컨은 다들 알다시피 켄터키 출신인 서부 사람으로, 보수적이고 딱딱한 동부식 말투 대신 직설적이고 다채롭고 독립적인 서부적 말투를 대통령 시절까지 버리지 못했다. 예를 들어 그는 절대로 헬로(Hello)라고 인사하지 않고 하우디(Howdy)라고 인사했으며, out yonder, stay a spell처럼 일상어, 즉 당시 정치권에서는 비속어 수준인 표현들을 대화에 거리낌없이 집어 넣었다. 소위 '세련된' 워싱턴 정치인들은 그런 링컨의 말투를 매우 싫어했고, 오죽하면 링컨의 정적들은 그의 투박한 외모에, 통속적 이야기를 좋아하고 종종 예법을 지키지 못한 사실까지 덤으로 집어넣어 링컨을 '고릴라'라고 비하했다.
당시 목격한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망원경이라도 끄집어내는 것처럼 어색한 동작으로 일어나 안경을 고쳐 쓴 뒤 원고에서 거의 눈을 떼지 않고 높은 음성으로 불안하게' 시작된 그의 연설은 짧아도 너무 짧았다. 연설을 분석하면 ⅔는 단음절 단어이며, 짧고 축약되고 직접적인 10개의 문장이 전부다. 당시 연설하는 사진이 남아있지 않은 이유도 사진사가 '으휴 이제 대통령 연설이네. 연습 삼아 한번 찍자. 어라 저 양반 벌써 끝난 건가?' 라는 이유. 이건 진짜다. 그래서 남아있는 사진은 연설 직후의 사진(위)이 전부. 증언에 따르면 당시 공식 사진사들은 연설이 끝나고 자리에 앉을 때까지 카메라 점검만 하고 있었다고 한다.[8] 이런 그의 짧은 연설에 대한 당시 반응을 보자.
외국의 지성인들에게 미합중국의 대통령이라고 소개할 사람의 어리석고 밋밋하고 싱거운 연설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미국인들의 뺨이 수치로 물들었다.[9]
시카고 타임즈(Chicago Times)
"나는 실패했습니다. 정말입니다. 내가 그 연설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은 그뿐입니다."
에이브러헴 링컨 본인, 연설 후 에버렛에게 한 말
재밌게도 에버렛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Permit me also to express my great admiration of the thoughts expressed by you, with such eloquent sensibility & appropriateness, at the consecration of the Cemetery. I should be glad, if I could flatter myself, that I came as near to the central idea of the occasion in two hours, as you did in two minutes.
"각하께서 어제 봉헌식에서 정말 간결하고 적절하게 각하의 생각을 표현하신 것에 대하여 진심으로 찬사와 존경을 보냅니다. 어제 장장 2시간에 걸쳐 한 제 연설이, 각하께서 2분 간에 정확하게 표현하신 봉헌식의 의미에, 조금이라도 근처에 갔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이 없겠습니다."
사실 링컨은 헌사만 부탁받았고, 그것도 연설 15일 전에 부탁 받았던지라 작성할 시간도 없었다. 사실 이 정도면 나쁜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이 날의 주요 연설자는 에버렛이었지 링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0]
물론, 현대에는 모범적 연설의 대표적 사례로 인식된다. 짧고, 주제가 분명하고, 감동적이라는 말조차도 부연인 것 같다. 반면 대표 연사였던 에버렛의 연설을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에버렛이 링컨의 연설에 올린 찬사는 그대로 들어맞은 셈이다.[11]
게리 윌스의 말에 따르면 링컨의 연설은 "명료한 단음절을 따라가는 첫 소용돌이"가 특징이다. 그의 연설은 특별한 리듬(율동감)이 있으며[12] , 짧지만 굵고 인상적이다. 이 점은 링컨의 취임식 연설문의 일부에서도 잘 나타난다. 위의 것은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윌리엄 H. 수어드가 작성한 시대의 걸작인 작품이며, 아래의 것은 링컨이 다듬은 시대를 초월한 작품이다.
우리는 이방인[13]
이나 적이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되며 어디까지나 같은 국민이고 형제이다. (수어드)우리는 적이 아니라 친구이며, 결코 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링컨)
그런데 그런 링컨조차도 한 문장 당 평균 30단어는 썼다고 한다. 뭐 워싱턴의 어지간한 정치인은 한 문장당 평균 50개에서 60개의 단어를 썼다고 하니까. 아마 쿨리지[14] 가 봤으면 쓸데없는 짓 한다고 뭐라고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4. 연설 전문[편집]
이 연설 전문은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링컨 기념관에서도 볼 수 있다. 바로 링컨의 좌상 좌측에 있는 기념관 건물 내벽에 새겨져 있다.
4.1. "the people"의 번역어에 대해서[편집]
원래 한자문화권과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번역은 "인민"이었다[21] . 일본은 물론 해방 직후인 1947년 경향신문에서도 사용된 번역이다.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이라는 표현 자체가 옛날식 한자식 직역 경구에 나온 것이다.[22] 그런데 반공주의, 매카시즘의 여파로 인민이란 단어가 터부시되면서 1960년을 전후로 '국민'으로 대체되기 시작했고 한 세대 가량 사실상 절대다수를 점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2000년대 이후로 반공 컴플렉스가 사라지면서 다시 인민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렇듯 인민이란 용어를 쓸 것인지 국민이란 용어를 쓸 것인지를 두고 여러 번역이 있었으나, 게티즈버그 연설문의 의의를 고려할 때 여기에서는 국민보다는 인민으로 번역하는 것이 훨씬 적절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인민 문서를 참조. 국민과 인민 간의 주된 차이란, 국민이란 용어가 국가의 존재를 전제하여 그 영향력 하에 있는 사람들을 골라 지칭하는 뉘앙스가 강한 반면 인민은 국가의 유무와 관계없이 결속력 있는 사람들의 집단을 두루 가리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게티즈버그 연설의 논리적 흐름은 '미국 건국의 숭고한 대의인 자유와 평등 → 그러한 대의를 지키려다 전사한 군인들을 향한 추모 → 건국의 뜻을 재차 강조하며 마무리'이다. 그만큼 이 연설에서는 미국 건국의 대의가 핵심이 되는데, 그 사상적 배경은 존 로크의 사회계약설이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모여서 국가를 이루기 전에 이미 자연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국가는 개인의 자연권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세워진다. 즉 처음부터 미국이라는 국가가 있고 국민이 그 뒤에 탄생한 것이 아니라, 인민이 먼저 존재하고 그들이 영국에 맞서 독립을 쟁취한 결과 미국이 탄생한 것이다. 따라서 연설문 말미의 '통치'란 단순히 국가의 구성원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과 관계 있다고 해석하는 쪽이 바람직하며 용어 역시 국민보다는 인민이 더욱 정확하다.
한편 이미 미국이라는 나라가 링컨 이전에 세워졌고 링컨이 전후 남북의 차별 없는 통합을 추진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미합중국이라는 단일한 국가의 정체성에 보다 주목한 것이기에 국민으로 번역되는 것이 맞다는 의견도 있다. 완전히 틀린 말이라고 하기는 어려우나 주류 해석은 아니다. 그리하여 고등학교 법과 정치 교과서에서는 시민으로,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인민으로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