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손대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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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昔有佳人公孫氏 옛날에 미인 공손씨가 있었으니
一舞劍器動四方 한 번 검무를 추면 세상을 뒤흔들었고
觀者如山色沮喪 산처럼 많던 관중들은 놀라서 얼굴빛이 변하였으며
天地為之久低昂 천지는 그녀의 자태에 오래도록 출렁였다.
두보(杜甫), 「觀公孫大娘弟子舞劍器行並序」 공손대랑 제자의 검무를 보고 노래하며
公孫大娘
당 현종 시대의 유명한 무희. 검무(劍舞)와 기예(技藝)가 정점에 달해 한번 칼춤을 추면 만인이 요동쳤다고 전해진다.
공손대랑의 이야기는 동시대의 시인 두보를 통해 후대에 널리 알려졌으며 《당시삼백수(唐詩三百首)》[1] 의 64수에 공손대랑에 관한 시가 나온다.
2. 생애[편집]
時有公孫大娘者 善劍舞 能爲鄰里曲及裵將軍滿堂勢 西河劍器渾脫 舞藝姸妙 皆冠絶於時
그 시절 공손대랑은 칼춤 실력이 뛰어나 향리곡(鄕里曲), 배장군만당세(裵將軍滿堂勢), 서하검기혼탈(西河劍器渾脫)을 잘 추었는데 춤추는 기예가 아름답고 묘해 모두 이 시대의 으뜸이었다.
《명황잡록(明皇雜錄)》
두보 이외에도 같은 시대의 여러 인물들이 공손대랑의 검무를 증언했기에 실존했던 인물임은 확실하나 따로 열전이 남거나 후손들에 의해 기록이 남은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정확한 생몰년과 삶의 모습들은 현대에 이르러선 거의 알 수가 없게 됐다.
두보가 개원 3년(715) 어린 시절에 공손대랑의 춤을 실제로 보았으므로 최소한 700년 이전에 태어났을 것이다. 또한 늦게나마 제자를 두어 가르침을 전했다는 일화로 보아 740~750년까지는 살았을 가능성이 크다.
공손대랑은 두보가 어렸을 적부터 가희(佳姬)로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절세의 미모뿐만 아니라 칼춤 실력도 무척 뛰어났기 때문에 춤을 추면 관중들이 길을 막고 거리가 크게 붐볐다고. 한번은 거리에서 검무를 추자 중앙에서 관리가 내려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는지 살펴본 적이 있는데, 이때 공손대랑의 유려한 검무에 깊이 매료된 관리가 춤이 끝나자 공손씨를 궁궐로 초청하여 공연해주길 부탁했다.
공손대랑은 관리의 요청에 응했다. 그리하여 궁에서 황제를 위해 공연을 펼치니 황제는 당궁 최고의 무희라며 끝없이 칭찬했고, 아무도 공손대랑을 업신여기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후 전통 검무를 계승해서 《서하검기(西河剑器)》, 《검기혼탈(剑器浑脱)》 등 다양하고 새로운 춤을 만들었고 후대의 검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공손대랑은 손안에 주어진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강과 호숫가에 숨어 평범하게 살다가 평온하게 최후를 맞이했다고 한다.
죽기 전에 제자를 얻어 자신이 평생에 걸쳐 갈고닦은 기예(技藝)를 물려주니, 그 제자의 이름이 바로 두보의 시에도 등장하는 이십이랑(李十二娘)이다.
3. 공손대랑 제자의 검무를 보고 노래하며[편집]
3.1. 두보의 시[편집]
동서고금 최고의 시인 두보가 말년에 공손대랑의 제자를 만나 영감을 얻어 남긴 이 시는 대력(大曆) 2년(767년) 두보의 나이 55세 때 지은 작품이다.[7] 작시된 767년은 개원지치의 태평성대를 지나 안사의 난이 일어난 이후 당나라 황실이 쇠락해가던 시기로 두보가 관직을 내려놓고 오랜 기간 지방을 떠돌아 다닐 때였다.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한 채 힘든 나날을 보내던 두보는 공손대랑의 제자로서 스승의 검법과 아름다움을 이어받은 이십이랑(李十二娘)의 검무를 보았다. 두보가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회상하다 공손대랑의 춤추는 자태를 떠올리고 당 현종 때의 성세와 늙고 병든 자신의 노년을 생각하며 지은 것이 바로 위의 시다.[8]
전체적인 시의 내용은 언뜻 보기엔 활기차 보이면서도 우울하며 다소 비극적인 내용으로 마무리된다. 공손대랑의 아름다움과 찬란했던 당현종의 시대가 손바닥 뒤집듯 빠르게 지나갔으니 이제 황량한 세상을 늙은 몸으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내용이 시를 꿰뚫는 주제로 이는 시인 두보의 파란만장했던 인생과도 연결되는 부분이다.
4. 공손대랑에 대한 평가[편집]
昔有佳人公孫氏 옛날에 미인 공손씨가 있었으니
一舞劍器動四方 한 번 검무를 추면 세상을 뒤흔들었고
觀者如山色沮喪 산처럼 많던 구경꾼들은 놀라서 얼굴빛이 변하였으며
天地為之久低昂 천지는 그녀의 자태에 오래도록 출렁였다.
두보 《관공손대랑제자무검기행병서(觀公孫大娘弟子舞劍器行並序)》
公孫劍伎方神奇 공손대랑의 검술은 실로 대단하니 귀신의 경지로다.
정우 《진양문시(津陽門詩)》
有公孫大娘舞劍 검무를 잘 추는 공손씨란 인물이 있었는데
當時號為雄妙 당시 그녀는 말할 수 없을 만치 빼어나고 훌륭했다.
《명황잡록(明皇雜錄)》
5. 제자 이십이랑(李十二娘)[편집]
李十二娘舞劍器(이십이랑무검기) 壯其蔚跂(장기울기)
이십이랑(李十二娘)의 검기무를 보고 그 빛나고 호탕한 모습이 훌륭하다고 생각해
問其所師(문기소사) 曰(왈)余公孫大娘弟子也(여공손대랑제자야)
그 스승을 물으니 "저는 공손대랑의 제자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손대랑 제자의 검무를 보고 노래하며(觀公孫大娘弟子舞劍器行並序)》
두보가 공손대랑에 대한 시를 남기게 해준 일등공신으로, 이십이랑이 백제성에서 춤추는 모습을 보고 감명받은 두보가 이십이랑에게 스승의 이름을 물으니 스스로 공손대랑의 제자라고 밝혀 「觀公孫大娘弟子舞劍器行並序」의 제목을 장식했다.
공손대랑을 연상시킬 정도로 뛰어난 재주를 지닌 인물로 스승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그 기술과 재주를 물려받아 후세에 스승을 널리 알렸으니 뛰어난 예인(藝人)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두보가 이십이랑과 만난 일화를 병서로 남기며 적은 묘사를 보면 767년에 만났을 때 한창 아리따울 시기의 얼굴이 아니라고 평했으므로, 두보보단 어리지만 그 시기에도 제법 나이가 들었던 모양.
6. 이야깃거리[편집]
- 과거부터 검무의 정점에 다다른 가희로서 명성이 자자했기에 《구운몽》 등 고전소설에선 검무가 뛰어나거나 무예가 보통이 아닌 여인을 묘사할 때 곧잘 "그 옛날 공손대랑을 떠올리게 한다."라는 대목이 자주 등장한다.
- 당나라의 서예가 장욱(張旭)은 공손대랑의 《서하검기(西河劍器)》를 보고 큰 깨달음을 얻어 독특한 초서 서체를 터득했다고 한다.
7. 미디어 믹스[편집]
- 한국의 웹소설 전생검신에서 대랑시대를 수놓은 인물이자 무신백좌(武神百座)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자세한 내용은 공손대랑(전생검신) 문서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