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진(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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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제1공화국 시기에 제주도 지역에서 활동한 인물로, 초대 남제주군수와 제2대 북제주군수를 역임했다.
2. 생애[편집]
김영진의 생애에 관한 제주일보 기사
1907년 제주목의 주서(主書)였던 김남련의 큰아들로 태어났다.[1] 광주농업학교를 다녀 1930년 5년 과정을 졸업했고 이후 일제 치하에서 관직 생활을 하였다.
광복 이후 미군정의 눈에 들어 1946년 8월 1일 박경훈 초대 제주도지사, 박명효 초대 북제주군수처럼 초대 남제주군수로 임명됐다. 남제주군수로 있는 동안 행정체제 정비에 힘썼다. # 그는 동년 11월 4일에 퇴임하나 11월 15일 제2대 북제주군수로 다시 군수 생활을 하게 되었다. 1947년 제주 4.3 사건의 발단이 되는 3.1절 발포 사건 이후 도내의 모든 공공기관이 총파업에 들어갔는데, 그가 군수로 있는 북제주군청이 스스로 파업을 중지하여 미군정이 그를 신임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으로 제2대 국회의원 선거 북제주군 을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3,604표(14.99%)의 득표를 기록해 무소속 강창용, 대한국민당 양병직에 이어 3위에 머물렀다. 이후 1952년 지방선거에 다시 출마해 제주도의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초대~제3대 제주도의회의 기록물이 유실됐기 때문에 이 시기 의정활동에 대해 알 수는 없다. 1960년 지방선거에서 제주도지사에 출마하나 22.2%의 득표를 받아 5명 중 4위로 낙선했다. 몰년은 알려져 있지 않다.
3. 여담[편집]
제주 4.3 사건 당시 서북청년단이 자행한 폭력 활동의 피해자이다. 서청에서 가장 악명높던 제주도위원장 김재능(金在能)에게 폭행을 당해 팔이 부러진 것으로 전해진다. 제주도 행정 총무국장 김두현이 서청의 요구를 거절한 뒤 고문 살해당한 사건도 있는 등 당시 서북청년단의 만행은 힘없는 일반 도민들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4.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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