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혁(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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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정당혁신추진위 혁신위원
한신대학교 평화교양대학 교수
김준혁
金俊爀 | Kim Jun-Hyuck


파일:김준혁교수.png

출생
1969년 3월 7일 (55세)[1]
본관
김해 김씨
학력
파장국민학교 (졸업)
수성중학교 (졸업)
수성고등학교 (졸업)
중앙대학교 문과대학 (사학 / 학사)
중앙대학교 대학원 (사학 / 석사·박사)
정당

파일:더불어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현직
더불어민주당 정당혁신추진위원
한신대학교 평화교양대학 교수
가족
배우자, 슬하 2남
병역
대한민국 육군 병장 만기전역
종교
천주교 (세례명: 요셉)
약력
한신대학교 평화교양대학 교수
대통령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자문위원
더불어민주당 정당혁신추진위원
더불어민주당 소통위원회 부위원장
더불어민주당 문화예술위원회 부위원장
더불어민주당 경기도당 대변인
더불어시민당 공천관리위원회 간사
수원시 학예연구사
수원환경운동센터 대표
수원시 기후환경네트워크 상임대표
수원좋은도시포럼 연구원장
3.1 운동 100주년 수원시민추진위원회 운영위원장
산수화 상생협력협의회 운영위원장
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한국위원회 위원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객원교수
화성연구회 이사
정조인문예술재단 기획이사
한국중앙사학회 총무이사
경기도문화의전당(現 경기아트센터) 이사
대한조정협회 고문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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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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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유년 시절
2.2. 학창 시절
2.3. 대학 시절
2.4. 수원시민활동가 시절
2.5. 대학원 시절
2.6. 수원시 학예연구사 시절
2.7. 현재
3. 저술 활동
4.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역사학자이다. 대중강연을 통해 알려져 있다.

정조수원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화성을 알리는데 인생을 갈아 넣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대표적인 저서로 문재인 대통령의 추천 도서인 「리더라면 정조처럼」이 있다.

현재 더불어민주당 정당혁신위원이며 한신대학교 평화교양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파일:리더라면정조처럼.jpg


2. 생애[편집]



2.1. 유년 시절[편집]


초등학교 교사인 아버지의 근무지[2]였던 평택에서 2남 1녀의 둘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년 시절 평택에 대한 기억은 미군부대 주변에 살아서 미군들에게 초콜렛을 달라고 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후 아버지의 전근으로 직장을 수원 파장초등학교로 옮기면서, 파장동정자동 일원에서 정착하여 지금까지 살고 있다.

수원으로 이사와서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은 현재 용광사 앞으로, 현재 파장동 행정복지센터 주변이다.


2.2. 학창 시절[편집]


집에서 가까운 파장초등학교에 입학하여다니다가 아버지의 백령도 전근에 따라 2년간 백령도 생활을 하였다.[3]

장촌이라는 마을의 남포초등학교에 다녔는데 여기서 장촌의 앞바다가 심청전으로 유명한 인당수이다.

이후 다시 수원으로 돌아와 파장초등학교를 졸업했다고 하니 아마도 초등학교 2~3학년 즈음에 백령도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전학간 백령도에서 외지인인 김준혁을 따돌려서 적응이 어려웠다고 하는데, 이에 따라서 학교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많이 읽게 되었다고 한다. 전화위복이 되어 이 당시 읽었던 많은 책들이 이후 삶에 인문학 적으로 큰 자양분이 되었다고 자평하고 있다.

자서전에서 밝힌 바로는 읽었던 책이 도스토예프스키죄와벌, 톨스토이부활이라고 한다.

다시 수원으로 돌아와 파장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수성중학교(경기)를 진학하였는데 당시 연무초등학교에 근무하는 아버지의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서 통학하였다.

여러 책을 통해서 알려졌는데 이 당시 아버지는 한 꼭지의 역사이야기를 매일 준비하여 뒷자리에 타고 있는 아들에게 들려 주었는데,

이 때 여러 역사 인물과 특히 수원의 도처에 흔적을 남긴 정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유래와 역사를 들으면서 컸다고 한다.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 수성고등학교(경기)에 진학하였다.

과거의 수성고등학교는 체벌이 심하기로 소문이 났던 학교였는데[4], 학창시절 김준혁은 2학년때 당한 부당한 체벌로 잠시 방황기를 겪었다고 한다.

다행히도 3학년때 만난 담임선생님의 영향으로 마음을 다잡고 수험생활에 임했다.

기자를 꿈꾸었고, 당시 주변에서 국문학과나 사학과 출신도 기자가 되는데 도움이 된다는 말을 듣고 중앙대학교 사학과에 진학하였다.


2.3. 대학 시절[편집]


중앙대학교 사학과에 진학한 후에 운명처럼 한 인물을 만났다고 회고하는데 바로 김영진이다.

수원의 유신고등학교 출신인 김영진은 동갑내기로 가치관이나 사고방식이 같고, 무엇보다 김영진이란 사람의 인간됨됨이에 끌려서 막역한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중간에 김준혁은 입대를 하게 되었고, 김영진은 남아서 중앙대학교 총학생회장을 하게 되었는데, 군대에서 제대한 이후 만난 김영진의 부탁으로 다시 학생운동을 지속하게 된다.

이후 김영진과는 인연이 계속 이어져 수원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데, 김영진은 당시 민주당계 정당에겐 험지였던 수원시 병[5]에 도전하였고, 그런 그를 도와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으며 20대 총선김영진이 민주당의 깃발을 꼽는데 1등 공신으로 활약하였다.


2.4. 수원시민활동가 시절[편집]


대학 졸업 후 고향인 수원으로 돌아오게 된다.

대학교 2학년 때 아버지를 불의의 사고로 잃고, 혼자 남은 어머니 때문이라고 밝혔다.

수원에 돌아와서 처음 시작한 것은 시민활동이다.

수원환경운동센터에 합류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또한 민언련에 합류하여 경기 민언련 운영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경기 민언련 운영위원 자격으로 OBS의 시청자 위원을 2년간 역임하였다.


2.5. 대학원 시절[편집]


이렇듯 수원에서 시민 운동과 기획사를 운영하고 있었던 와중 아내에게 "향후 시민운동은 전문가들을 필요로 할 것이다. 지금처럼 신념과 용기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더구나 당신은 공부를 하면 참 잘할 사람인데, 지금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거 같다.대학원에 진학해서 전문가가 되었으면 한다. 그 이후 다시 시민운동을 했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듣게 된다. 깊은 고민 끝에 대학원 진학을 결심하게 되었고, 아내는 구몬학습지 교사로 가계를 책임졌다.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는 당시 중앙대학교에서는 항일 독립운동사와 관련하여 수준높은 성과를 내고 있었기에 남들 처럼 해당 전공을 마음먹었던 와중에 학점교류로 방문한 서울대학교의 수업에서 본인의 표현으로 운명적인 만남을 경험하게 된다.

당시 수업에서는 서울대학교의 규장각에 있는 책 중에 하나를 선정하여 발표하는 수업이 있었는데 수업을 준비하면서 선정한 책이 바로 범우고이다.

해당 책의 서문은 정조가 직접 쓴 글이 있었는데, 숭유억불[6]로 표현되는 조선 사회에서 왕인 정조의 사려깊고 배려가 가득한 승려들에 대한 마음을 보면서 흥미를 갖게되었다고 한다.

또한 어려서 부터 아버지에게 들었던 정조가 만든 수원의 이야기, 화성과 대유평, 만석거 등 어려서 부터 익히 들었던 지명들이 모두 정조가 만들었던 사실을 다시 상기하면서 정조와의 관계가 운명적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또한 당시만 하더라도 학계에 정조라는 인물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이 3개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도전적 의식을 가지고 전공을 택했다고 밝혔다.

2.6. 수원시 학예연구사 시절[편집]


대학원에서 연구한 정조시대가 신의 한수가 되었다.

당시 수원시에서는 화성복원[7]과 관련하여 박차를 가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전문가가 필요하게 되었다.

대학원 수료 후 시간강사와 함께 여러가지 아르바이트를 하였다. 그 도중 수원시사 편찬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화성 복원을 위한 학예연구사를 뽑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응시하여 합격을 하게 된다.

이후 매우 정력적인 활동을 보였다. 본인의 전공[8]을 살려 장용영 수위의식(수문장 교대식)과 무예도보통지에 따른 <무예 24기> 상설 공연을 주도하였다.

또한 정조대왕 능행차를 체계화 한 공이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세계기록유산으로 남은 의궤 덕분이라고 밝혔다.

또한 행궁복원을 하면서 슬럼화 된 주변 지역에 활력을 불어 넣는 일도 추진하였다.

현재 이는 '도시재생'이라는 개념으로 발전 되어있다.

과거 프라이부르크, 뒤셀도르프, 베른 지역을 답사한 경험에 따라 문화와 예술을 통해 구 도심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을 보았던 기억을 통해 행궁동 일대의 간판을 바꾸고, 공실로 놀고 있는 상가들을 작가들의 레지던시[9]로 만들도록 유도했다.

이를 통해 거리가 활성화 되었고, 현재 화성 행궁 공방거리로 자리 잡게 된다.

경기도 문화재 전문위원, 경기도 박물관 미술관 진흥위원, ICOMOS[10](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 한국위원회 위원, 화성연구회 이사,

남한산성 세계문화유산 등재추진위원 등 문화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김용서 시정에서 학교선배[11]염태영을 조용히 도왔다는 논란이 있어 공직생활이 순탄하지 만은 않았지만 실력으로 인정 받았다는 소문이 있다.

오히려 염태영이 시장으로 당선 된 이후 꽃길을 걸을 것이라는 세간의 예상을 깨고, 보다 큰 일을 위해서, 그리고 수원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안락한 공직생활을 청산하고 광야와도 같은 사회로 나가야한다고 생각 했다고 한다.

2.7. 현재[편집]


공직생활을 청산하고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의 객원교수로 자리를 옮겼다고 자서전에서 밝혔다.

공직자라는 족쇄가 풀리자 보다 적극적인 시민활동과 수원시에서 진행하는 거버넌스 사업에 참여하여 염태영시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한신대학교 교수로 임용 되었으며, 수원에서 시민사회활동과 더불어민주당 정당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21년에는 더불어민주당 정당혁신추진위원으로서, 국회의원 3선 연임 초과 금지와 국회의원 국민소환제 및 위성정당 창당 방지, 청년의무공천 등의 혁신안을 주장하였다.#

2022년 3월 22일,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수원시장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 그러나 경선에서 이재준에게 밀려 탈락했다.


3. 저술 활동[편집]


출간목록

  • 『수원화성 : 정조의 꿈이 담긴 조선 최초의 신도시』, 스쿨김영사, 2007.
  • 『정조 : 이산, 새로운 조선을 디자인하다』, 웅진씽크하우스, 2007.
  •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 웅진씽크하우스, 2007.
  • 공저『행복한 인문학』, 이매진, 2008.
  • 공저『우리의 옛 문화와 소통하기』, 채륜, 2010.
  • 공저『역사에서 찾는 지도자의 자격』, 꿈결, 2012.
  • 공저『이곳에 가면 수원의 역사가 보인다』, 수원시사편찬위원회, 2014.
  • 『한반도의 운명을 바꾼 전투』, 한신대학교출판부, 2016.
  • 공저『수원학 : 지리,역사』, 수원시정연구원, 2016.
  • 『역사는 미래다』, 더봄, 2016.
  • 『화성 : 정조와 다산의 꿈이 어우러진 대동의 도시』, 더봄, 2017
  • 공저『경기도 수원 동학농민혁명』, 모시는사람들, 2017.
  • 『장용영 : 정조가 만든 조선의 최강 군대』, 더봄, 2018
  • 『리더라면 정조처럼』, 더봄, 2020
  • 『이재명에게 보내는 정조의 편지』, 더봄, 2021
  • 『변방의 역사 1,2』, 가갸날, 2022


4. 여담[편집]


- 정조(조선) 연구의 권위자이며 정조가 건설한 신도시인 수원화성을 알리기 위해 다수의 대중강의를 진행 하였다.

- JTBC 차이나는 클라스의 정조 강의[12]문재인 대통령 추천 도서 '리더라면 정조처럼'으로 유명하다.



- 주요 정당 활동으로 더불어시민당의 공천관리위원회 간사를 역임하였으며, 현재 더불어민주당 정당혁신위원이다.
-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에 이어 교육자 집안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경우 파장초등학교, 연무초등학교[13],한터초등학교, 기흥초등학교, 화서초등학교에서 근무했다.

- 유년시절 인상 깊었던 사건으론 초등학교 입학 전 당시 파장초등학교에는 큰 사고가 났었는데, 당시에는 학교 내부적인 공사에 상급생들이 동원되는 것이 흔한 시절이었다. 사건은 학교뒤뜰 확장공사 작업을 하는 중 3M높이의 흙 더미가 무너져 수명의 학생들이 깔려 죽거나 다친 사건인데, 최종적으로 9명이 죽고 12명이 중상을 입었다. 당시 사고현장 주변에서 목격했으며, 심지어 친한 형이 흙더미 속에 깔려있다가 구출되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고 한다.

- 신영복 선생과 깊은 인연이 있다. 대학 시절 친구인 김영진의 부탁으로 파견된 범민족대회에서 신영복선생의 글씨를 접하게 된 후 흥미를 느껴 그의 책을 찾아서 읽어 보았다고 한다. 이후 신영복선생이 만든 '더불어숲학교'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며 인연을 쌓게 되었다. 신영복선생이 직접 수원까지 내려와 선물을 해준 글씨가 있다고 하는데, 바로 '석과불식'[14]으로 앞으로 크게 자라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길 바란다는 응원의 의미가 담겨있다..

- 최근 행보를 보면 수원시장에 뜻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관련하여 최근 '수원을 앞으로 수원은 앞으로' 출판기념회를 열었으며 코로나 시국임에도 많은 인파 몰렸다고 한다.#1#2

- 3선 연임 제한으로 기존 수원시장인 염태영이 출마 제한을 받으면서, 제8회 지방선거의 더불어민주당 수원시장 경선은 수많은 후보들이 난립한 경선이었다. 전직 국회의원, 전직 행안부차관, 전직 수원시 부시장, 당시 현직 수원시의회 의장, 전직 수원시의회 의장에 당시 현직 경기도의회 의장까지 기성 정치인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쉽지 않은 경선이 될 것이라 예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예상을 깨고 5인 컷오프를 통과하여 최종 2인 결선까지 진출하는 등 선전하였으나, 이재준에 밀려 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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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로는 1967년생일 확률이 높다. 중앙대학시절 더불어민주당 김영진 의원 과 국민의힘 장제원 의원과 대학교 동기로 밝힌바 있는데 예전에는 흔한 호적과 실제나이가 다를 가능성이 있다.[2] 평택성동초등학교[3] 현재는 없어진 남포초등학교를 다녔다.[4] 2010대까지만 하더라도 체벌의 수위가 다른 어떤 지역의 학교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았다. 체벌 도구인 떡매가 정자동의 특산물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5] 경남여객을 운영하던 남평우-남경필 부자가 내리 7선을 하던 곳으로, 단 한번도 민주당계열의 진영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던 곳이다.[6]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함[7] 당시 수원이라는 도시는 1970년 인구가 약 16만 이었으나, 이후 80년에 31만, 90년에 65만, 2000년에 95만, 2010년엔 110만으로 폭발적인 인구 증가를 이루었다. 이렇듯 외지인들이 많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수원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는 '무엇'이 필요했다. 깊이 고민할 필요 없이 랜드마크인 수원화성과 수원이라는 도시를 만든 정조를 부각시키는 모습으로 이어진다.[8] 학위논문의 주제가 장용영이다.[9] 월세나 전세금을 지원받아 작업에만 집중하도록 하는 예술가들의 작업실[10] 기념물 및 유적에 대한 유네스코자문기관이다. 세계문화유산 선정에 있어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단체이다.[11] 수성고[12] 46회 '매력군주 정조, 그를 더 알고 싶다', 이와 더불어 146회 '조선의 민란, 실패한 혁명인가' 2번 출연 하였다.[13] 연무동에 있던 시절인 옛날 구교사[14] 碩果不食 씨과일은 절대 먹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