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3세(폭군 고종대왕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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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행적
3. 평가



1. 개요[편집]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의 등장인물로 이 소설상에서는 고려천자 2세로 불린다. 소설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지만 본인이 직접 나오는 비중은 에피소드 한두편에서 잠깐 나오는 수준으로, 대부분은 프랑스인들 입에서 간접적으로 언급된다.


2. 행적[편집]


원래 역사에서야 보불전쟁 당시 프랑스 국민들의 기대에 못 미치는 활약을 펼치는 바람에 코뮤니즘의 발단을 일으킨 황제에 지나지 않았으나, 바뀐 역사에서는 원 역사에서 인정 받은 내치 업적에 더해 극동의 지역 강국인 우호국 조선을 얻고, 중국에서의 이득과 위신점수 등을 챙기는 등 업적이 매우 늘어났다. 이에 기분이 좋아진 나머지 다른 열강들보다 적극적으로 대한민국의 근대화를 지원한다.[1]


2.1. 보불전쟁[편집]


하지만 조러전쟁에서 조선이 승리하게 된 직후, 황색언론들이 멋대로 이형을 나폴레옹 대제의 추종자라는 이야기를 덧씌우는 등 극동의 나폴레옹으로 이형을 포장하면서 프랑스 국민들이 나폴레옹 3세에게 거는 기대가 더욱 더 커져버리는 바람에[2] 프랑스 국민들이 그에게 삼촌과 같은 위대한 장군으로서의 모습까지 기대하게 돼버려 자신의 한계를 아는 그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사실 나폴레옹 1세는 군공 못지 않게 내치 또한 뛰어났던, 완전체에 가까운 문무겸비형 군주였다. 물론, 그의 싸움실력이 뛰어난 건 아니었지만, 최고 사령관으로서 그의 전공이 워낙 화려했고 최후 또한 워털루 전투로 마무리된 탓에 대중들에게는 군인으로서만 유명하지만 내정에서의 업적도 매우 뛰어다. 그가 통령이 된 이래로 파리 시가지와 상하수도망을 정비하고 대륙법의 근간이 된 나폴레옹 법전을 편찬케 했으며, 현재까지 프랑스의 인재풀을 지탱하는 그랑제꼴의 원형인 각종 제국대학들을 설립[3]한 데다, 중앙은행을 세워 화폐 유통을 조절하거나 국채를 발행하는 등의 조치로 물가를 안정시키고, 데파르트망과 아롱디스망 등 각급 지방자치단체 단위를 규정하여 지방행정체계를 정비하는 등 현재 프랑스의 입법-행정-사법 체계의 근간이 그의 치세에서 정비되었다. 특히 나폴레옹 법전은 그가 몰락한 뒤 복고주의자들이 뜯어고치려고 했으나 너무 완벽했기에 자잘한 부분만 손보는 것에서 그쳤을 정도다.

결국, 엠스 전보 사건으로 보불전쟁이 터지자 프랑스인들의 기대에 떠밀려 출진하고[4] 거듭 패배한 끝에 스당 요새에서 프로이센군에게 포위돼버린다. 장군들이 노골적으로 실망감을 드러내고 상당수 병사들이 체념한 채 항복 명령만을 기다리는 와중에도 몇몇 병사들은 황제가 천재적인 계책으로 난관을 돌파해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결국 과중한 기대를 못 이겨 모든 걸 포기하고...

"끼-야하핫! 휘리릭, 휘릭, 휘릭! 끼-요호홋!"


항복해버린 원 역사와 다르게 포위망을 뜷겠다고 이형처럼 근위대인 흉갑기병대와 함께 샴페인과 모르핀을 빨고 정면돌격하여 프로이센 군의 손에 의해 전사하였다. 작중 언급에 따르면 왼쪽 다리와 오른쪽 어깨에 총 맞고 낙마하고서 최후의 항전을 펼친 끝에 고간에 총탄을 맞고 결국 과다출혈로 절명했다고. 61세의 고령답지 않은 굉장한 투혼이었다. 그리고 황제가 당당하게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명예롭게 돌격하다 전사했다고 생각한 프랑스군은 그야말로 눈이 돌아가면서 결사항전을 시작. 스당 요새의 프랑스군은 병사들은 물론이고 그들을 지휘해야 할 장군들까지 눈이 뒤집혀 너나 할 것 없이 황제의 복수와 프랑스 제국 만세를 외치며 전원 총검돌격을 개시, 결국 스당 요새에 있던 프랑스군 13만 명 중 12만 명이 전사하는 등 거의 전멸 상태에 이르나, 북독일 연방 역시 20만 명 중 1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여 전력이 반 토막 나서 전술종료는 커녕 작전을 완전히 뜯어고쳐야 할 지경으로 몰고가서 북독일 연방에서도 이제는 뒤로 물러설 수 없는 극단적인 상황에 빠지게 되었고, 프랑스 전역에서 공화파, 코뮌, 부르봉 왕당파를 가리지 않고 프랑스 제국의 국가와 "황제 폐하 만세!""프랑스 제국 만세!"를 외치며 30년만에 완벽한 국론일치를 달성하여 너도 나도 복수를 위해서 의용군에 입대하려고 발악한다.[5] 뒤를 이은 황제로는 아들인 루이 외젠 보나파르트가 나폴레옹 4세로 등극했으며, 섭정의회 앞에서의 즉위식 연설에서 원 역사와는 완전 다른 결사항전을 맹세하게 된다. 그 자리에서 선언한 전쟁 구호가 '유럽에서 프로이센이라는 이름을 지우기 전에 종전은 없다!'일 정도.

참고로 이게 얼마나 대단한 활약이냐면, 양쪽의 병력의 질이 같고, 또한 양쪽 모두 동등하게 전력을 운영할 수 있다고 가정했을 때라 할지라도, 20만 VS 13만이면 전력전을 펼쳤다고 가정시 란체스터 법칙의 제2법칙에서 북독일연방의 추정상 생존전력은 15만이다. 그런데 황제가 죽어서 이성을 잃은 데다가 지휘체계조차 엉망진창이 된 상태에서 그 두 배 이상의 손해를 입힌 것. 이게 가능했던 건 분노의 극한에 치달아 광분 상태가 된 프랑스군의 정신력과 그로 인해 나왔을 괴성과 진동, 황제를 죽임으로써 조기종전은 물건너가고 꼼짝없이 한쪽이 멸망해야 끝날 처지에 처하게된 북독일 연방군의 사기 저하도 거들었겠지만, 실제 역사에서 프랑스군이 머스킷총과 총검이 도입된 이래로 총검술 & 돌격 훈련을 빡세게 시키기로 유명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샤스포 소총이나 드라이제 소총의 연사속도가 좋더라도 기관총이 아닌 이상 한계가 있었고, 결정적으로 독일군에는 기관총이 없었기 때문에 백병전 훈련에 이골이 난 데다 광분 상태에서 자기 목숨까지 던져가며 덤빈 프랑스군이 분전한 건 당연한 결과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이형은 왜 황제가 모르핀과 술을 들이키고 앞장서다가 전사했냐고 황당해하면서[6]. 자기가 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주제에 혹시 자신과 나폴레옹 3세가 계속 비교되는 거에 스트레스 받아서 "전쟁 이전부터 약쟁이가 된 건 아니야?" 라며 의심한다. 물론 이는 완벽한 누명.

여담으로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형 흉내를 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전략은 프로이센에게 있어서 굉장히 위협적인 공격이 되었다. 원 역사에서도 포위망 탈출을 위한 자살에 가까운 기병돌격은 빌헬름 1세도 진정 용감한 사람들이라 경의를 표할 정도였는데 거기에 추가된 샴페인과 모르핀으로 고통도 죽음의 공포도 모르는 광신적인 돌격은 프로이센군을 크게 위축시켰고 황제가 직접 이끈다는 소식을 들은 프로이센 참모본부는 완전히 경악하고 황제의 죽음에 분노한 프랑스군의 총검돌격에 공황에 빠졌다. 그나마 헬무트 폰 몰트케의 지도력으로 간신히 승리한 정도. 스당의 프랑스군이 어찌나 지독하게 싸웠는지, 북독일 연방군은 포위한 채로 병력도 더 많고 부대 간 연계, 화력 지원 등이 제대로 되고 있었고 프랑스군은 죄다 눈이 뒤집혀 뛰쳐나온지라 포위당한 상태에서 병력도 열세에 화력지원이나 부대 간 연계도 안 돼서 제각기 다른 곳을 향해 돌격했는데도 프랑스군 13만 중 12만이 죽어나갈 때 북독일 연합군도 20만 중 10만이 부상과 사망으로 전력이 반감됐다.[7]

게다가 여기서 북독일 연합군의 전력을 반토막 낸 게 후에 신의 한 수가 되었는데 파리 공방전에서 북독일 연합군의 전력이 격감된 탓에 파리의 3중 참호선을 뚫지 못하게 되었다. 몰트케는 40만으로 어떻게든 3차 방호선을 뚫기 직전까지 갔지만 뚫지 못하고 포로가 되자, 그 직전에 '"그 10만만 더 있었다면!"이라고 한탄했다.[8]


3. 평가[편집]


비록 원 역사보다 3년 일찍 사망했지만 항복 & 폐위 & 망명지에서 객사 등 비참한 최후를 맞은 원 역사와는 반대로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될 듯 싶다. 원래 내치 쪽에는 업적이 상당했고[9] 대중들에게 폭넓은 인기와 지지가 있었는데, 거기다가 주인공의 환생으로 인한 극동에서의 외치 업적이 추가되었으며[10] 마지막에는 영웅적 최후로 그간 분열되어 있던 프랑스의 국론을 하나로 만들었다. 이 정도면 우상화는 아니어도 국가적 영웅화 확정. 게다가 아들인 루이 외젠 보나파르트도 나폴레옹 4세가 되는 등 이형의 나비효과로 인해 굉장히 대우가 좋아진 인물 중 하나다.

물론, 후대의 평가는 훨씬 나아졌지만 본인은 즉위 기간 내내 극동의 나폴레옹이라는 이형의 이미지에 비교당하며 전전긍긍하며 고통 받다가 결국 중압감에 못이겨 기병돌격이란 형태로 자살한 셈이니, 본인 자체는 이형 때문에 실제 역사보다 불행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그 반작용으로 자국에서는 나름대로 좋게 평가받을 수 있겠지만.


[1] 자신의 예상보다 후한 지원에 기분이 좋아진 주인공이 '프랑스에선 배불리 욕만 잡수시겠지만 우리 땅에서나마 제삿밥 배불리 먹여드리리다!'라며 속으로 낄낄거린다.[2] 원 역사에서도 나폴레옹 3세의 인기는 매우 좋았다. 선전과 정치에 재능이 있어서 삼촌의 후광을 적절히 이용해 가면서 무역증진, 물가안정, 파리 재정비 등 내치에서는 잘했고, 외치 쪽에서는 동남아시아에 손을 뻗은 것을 제외하면 다른 열강의 방해가 심해 딱히 이득을 보진 못했다.[3] 프랑스 이공계열 최고의 그랑제콜인 에콜 폴리테크니크도 원래는 우수한 포병 장교들을 육성하기 위해 세운 제국대학이었다. 때문에 에콜 폴리테크니크는 지금도 그 시대 군인들의 복식과 유사한 디자인의 교복을 모든 학생들이 입고 다니며 군사훈련까지 받는데, 전 세계 공과대학들 중 유일한 사례라고 한다.[4] 실제 나폴레옹 3세도 진짜로 전쟁까지 가고 싶지는 않았다. 허나 비스마르크에게 이미 낚일대로 낚인 프랑스였던지라 할 수 없이 전쟁을 할 수 밖에 없었다.[5] 심지어 나이든 크림전쟁 참전 용사 근위대 출신이 황제 폐하께서 조국 프랑스를 위해 싸우다가 전사했는데, 근위대 출신인 자신이 침대 위에서 죽을 수는 없다고 전쟁터로 보내달라고 애원하는 지경이었다.[6] 소식을 듣고 한 첫마디가 ''그 빙신은 왜 또 죽어?''였다(...)[7] 실제 역사에서도 프랑스군은 머스킷이 보편화된 이래로 총검돌격을 중시하여 모든 보병들에게 강도 높은 총검술 훈련을 시켰다. 게다가, 총검돌격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햇빛을 받아서 번쩍거리는 날카롭고 서슬 퍼런 총검이 자아내는 심리적 위축감은 쉽게 무시할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원 역사보다 국민들의 사랑을 더 많이 받던 황제가 장렬히 전사한 바람에 병사들을 지휘-통제해야 할 장군들조차 눈이 뒤집힐 정도로 분노한 13만 프랑스군이 전원 총검돌격을 감행했는데, 그 과정에서 나왔을 괴성과 지축을 울리는 진동 때문에 프로이센군이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던 건 당연한 결과였을 듯.[8] 그나마 뚫기 직전까지 간 것도 대 몰트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16만이 지키고 있던 참호 도시를 겨우 3배 차이인 40만으로는 함락 직전은 커녕 1차 방어선도 뚫지 못하고 전멸했을 것이다. 많은 독자들도 프로이센이 망했다고 하면서도 처음 보는 참호진을 불리한 상황에서도 뚫기 직전까지 간 몰트케의 능력은 인정했을 정도다.[9] 우리가 아는 예술 도시 파리에 대한 인식은 나폴레옹 3세 때 만들어졌다.[10] 현실에서는 내치에서와의 업적은 별개로 나폴레옹 3세는 외치는 영 시원치 않았다. 이유는 타국에 자꾸 어그로를 끌었고 그 어그로를 끌어놓고 아무 성과를 못 거두자 이를 만회하려고 새 어그로를 끌었는데 그게 또 실패하고... 이하 반복이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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