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자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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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의 상징인 황색 깃발

1. 개요
2. 상세
3. 한국에의 영향


영문명: Cold War liberalism
한글명: 냉전자유주의


1. 개요[편집]


냉전자유주의란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이라는 세계적 정세 속에서 강력한 반공, 반소주의를 기반으로 한 현대자유주의 사상을 지칭한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이념이나 정책에서 큰 영향을 받았으며, 노동조합과 흑인 민권운동에 친화적이고 빈곤층을 위한 사회복지를 지지하는 등 진보적인 자유주의 성향을 띄면서도 강력한 냉전적 반공주의 성향을 띄었다는 것이 특이점이다


2. 상세[편집]


일반적으로 냉전자유주의는 해리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트루먼은 루즈벨트의 사회 정책을 계승하여 진보적인 성향을 띄었으나 동시에 강력한 반공주의자였고, 나날이 세력을 확장해가는 소련을 저지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렇듯 냉전자유주의는 20세기 초 진보주의 시대의 유산과 루즈벨트 대통령의 '네 가지 자유'[1] 노선을 계승하면서도 반공주의 성향을 띄었다.

이러한 냉전자유주의가 탄생한 것에는 당대 미국의 정치지형, 특히 민주당의 상황과도 연관되어 있다. 민주당은 원래 보수적인 남부 백인들의 지지를 받는 정당이었는데,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으로 북부와 동부의 진보적인 시민들과 흑인 등의 소수인종들의 지지를 추가로 얻으며 뉴딜연합이 결성되었다. 남부주의 경우 루즈벨트가 진보적인 정책을 펼치고 소수인종에 친화적인 것에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당시는 남부가 공화당을 더 싫어했던데다가, 뉴딜 정책의 덕을 어느정도 보기도 했고 루즈벨트가 남부의 지지를 유지하기 위해 적당히 절묘하게 조절에 성공했기에 뉴딜연합은 유지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이 대두하며 냉전이 시작되자 민주당은 흑인 민권 운동으로 조금씩 민주당에서 멀어질 기미를 보이는 남부 주들을 붙들어두고 동부의 리버럴들의 지지도 유지하기 위해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소련의 확장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함으로서 보수적인 남부 백인들의 지지를 얻는 한편 사회적으로는 적당히 진보적인 스탠스를 취해 북동부 리버럴들의 지지까지 확보했다.

경제적으로 냉전자유주의는 이전의 자유방임주의적 경제 자유주의에 반대했지만, 그렇다고 사민주의식 경제 정책에 찬성한 건 아니었다. 노동조합을 지지해 노사간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동시에 중소기업보다는 대기업에 친화적이었으며, 사민주의식 국유화 경제에는 비판적이었지만 국가의 주요 인프라 시설에 대해 케인즈주의적 지출 정책에는 호의적이었다. 즉 케인즈주의 수용, 친 노동조합, 친 대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소련 억제를 위해 국방비 지출을 지지하는 이들은 국방비 확대가 경기 부양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케인즈의 주장을 인용해 국방비 확대를 제안하기도 했다.

냉전자유주의자들은 사회복지의 확대가 국민들을 사회주의에 유혹되는 것을 막는 한편 최종적으로는 공산권의 붕괴까지도 가져올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린든 존슨 대통령의 위대한 계획과 같은 미국의 보편적 사회복지 프로그램은 이러한 시각의 연장선상이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냉전자유주의의 유산은, 바로 반공과 국가안보를 위해 시민의 자유를 어느정도 희생해야 한다는 이념이었다. 이는 강경한 반공주의자였던 트루먼 대통령의 성향이 반영된 것으로, 이때문에 메카시즘 광풍이 미국에 불때 민주당 의원들 다수가 이에 호응하거나 자신의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증명하고 나서는 등의 흑역사를 적립하기도 했다. 이후 냉전자유주의는 '자유주의'보다는 '냉전'과 반공이 강조되며 개인의 자유라는 가치가 퇴색되는 경향이 지속되었으나, 케네디가 아이젠하워 이후 시들해진 자유주의를 부활시키겠다며 내세워 당선시키자 다시 자유주의 이념에 부흥기가 찾아온다. 이는 이후 68혁명과 연개되며 신좌파현대자유주의의 탄생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냉전자유주의는 신보수주의의 탄생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신보수주의의 1세대를 이룬 이들 중 다수가 냉전자유주의자였기 때문이다. 특히 냉전자유주의자들 중에서도 반공, 반소 성향이 강하고 외교적으로 매파인 이들이 신보수주의를 탄생시켰다.


3. 한국에의 영향[편집]


냉전자유주의는 광복 이후의 한국의 보수세력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의 반공정책에 냉전자유주의 이념이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다만 한국에는 냉전자유주의의 사회복지 정책이나 민권운동 찬성과 같은 진보적인 면 보다는 반공, 반소에 외교적 매파 성질만이 집중적으로 부각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서의 경험에 의해 자유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매우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강력한 반공주의자였고 6.25 전쟁이라는 공산권의 침략을 겪은 입장에서 이는 잠시 미뤄질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즉 반공과 국가안보를 위해 개인의 자유를 일부 희생해야 한다는 냉전자유주의의 논리가 적용된 것으로, 이는 한국전쟁기의 여러 반인권적인 행위들이나 전쟁 중과 전쟁 이후의 각종 독재 행위의 근거로 활용되었다. 즉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지키기 위해 반공 권위주의 독재를 펼친다는 아이러니가 실현된 것이다.

한편 박정희 정권은 냉전자유주의의 논리를 빌려 '탈자유주의적 전환'을 시도했다. 이승만이 미국의 냉전자유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면, 박정희는 서독의 냉전자유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박정희가 주장한 '산업화를 통한 승공'은 서독의 경제모델로부터 빌려온 것이며, 이를 통해 근대화와 산업화를 반공과 국가안보와 연결시켜 정당화했다. 한편 자유주의적 가치들에 대한 긍정에서 시작해 반공과 애국을 위해 이를 잠시 유보해야 한다는 이승만의 냉전자유주의와 달리, 박정희의 냉전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나 '자유시장경제'와 같은 가치에 부정적이며, 이는 국가나 민족의 자유라는 더 큰 대의를 위해 유보'되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이로서 민족주의가 근대화와 반공의 논리로 정착하였으며, 공산주의로부터 민족의 자유를 위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해야 한다는 유신 헌법의 논리로도 연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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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 공포나 억압으로부터의 자유에 추가로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특히 마지막의 경우 경제적으로 사회 복지를 확대하는 정책을 펼치는 근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