닛세이가쿠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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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엄격한 규율
2.1. 현재의 상황
3. 가혹행위, 인권유린
4. 출신 인물
5. 여담


1. 개요[편집]





영상의 학교는 닛세이가쿠엔 제2고등학교(日生学園第二高等学校)다.

일본 미에현 츠시 하쿠산쵸에 위치한 사립 학교법인이며 설립자는 아오타 츠요시(青田 強, 1907-1986)다. 소속 학교 네 곳과 유치원 한 곳은 21세기에는 지극히 평범한 교육기관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아오타 이사장 생전에는 스파르타식 교육을 빙자한 아동, 청소년 학대 및 인권유린으로 악명이 높았다.

1965년 법인이 설립되었고 이듬해 닛세이가쿠엔 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1980년에는 닛세이가쿠엔 제2고등학교가 설립되며 기존의 고등학교는 닛세이가쿠엔 제1고등학교로 명칭을 바꾸었다. 1982년에는 중학교와 유치원도 설립되었고 1983년에는 닛세이가쿠엔 제3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아오타 이사장은 그 외에도 소학교(초등학교)와 대학(대학교)까지 세워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19년간 닛세이가쿠엔에서만 배우는 인재를 양성할 원대한 야망까지 품었다.

그러나 닛세이가쿠엔 소속 학교들은 대학 진학이 목적이 아니라 히키코모리와 등교 거부아, 학교폭력을 상습적으로 저지르는 문제아 등을 갱생시키는 데 더 주안점을 두었던 학교로, 현재의 대안학교에 더 가까운 학교였다. 그러나 나름 과학적인 커리큘럼으로 돌아가는 현대의 대안학교 및 특수학교와 달리 닛세이가쿠엔은 설립자의 "땀을 흘려야 인간은 마음이 깨끗해진다."는 철학 하나만으로 운영되어 심각한 인권유린 행위가 일상화된 지옥의 학교였다. 요약하면 삼청교육대 학교판이다. 심지어는 닛세이가쿠엔 부속 유치원조차도 똑같은 교육 방식을 추구해 유치원생들에게 걸레질을 시켰다.

학교라고 하기도 뭐한 것이, 북한의 일반적인 사회에서도 저정도로 막장적인 행위가 벌어지진 않는다. 정치범수용소/굴라크 같은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면 사정은 180도 달라지지만 그 인권유린이 가혹하다는 70~80년대 중국,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북한, 미얀마, 아프가니스탄 같은 독재 국가들조차도 건국된 이래 일반 사회에서 매일 이런 생활방식을 요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만큼 이 학교를 사칭한 범죄집단의 똥군기가 막장이었다는 뜻이며 닛세이가쿠엔에선 ‘교육’이란 미명을 뒤집어쓴 인권유린 행태가 이처럼 매우 심각했다.

1986년 설립자 아오타 이사장이 사망한 뒤 닛세이가쿠엔 소속 학교들은 평범한 사립 기숙학교로 전환되었고 2015년 재단 구조를 개편하면서 학교 명칭들을 다음과 같이 바꾸었다.

  • 닛세이가쿠엔 제1고등학교 → 사쿠라가오카 고등학교 (桜丘高等学校)
  • 닛세이가쿠엔 제2고등학교 → 아오야마 고등학교 (青山高等学校)
  • 닛세이가쿠엔 제3고등학교 → 지유가오카 고등학교 (自由ヶ丘高等学校) 계열 학교 중 유일하게 미에현이 아니라 효고현 히메지시에 있다.
  • 닛세이가쿠엔 중학교 → 사쿠라가오카 중학교 (桜丘中学校) 중고일관교로 졸업과 함께 사쿠라가오카 고등학교(구 닛세이가쿠엔 제1고등학교)에 입학한다.

2021년 4월 지유가오카 고등학교(구 닛세이가쿠엔 제3고등학교)가 학생 모집을 정지하고 휴교에 들어가면서 아오야마 고등학교(구 닛세이가쿠엔 제2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받아들였다.


2. 엄격한 규율[편집]


설립자 사후에는 학생들을 위한 평범한 기숙학교로 탈바꿈했지만 설립자가 생존했을 당시만 해도 규율이 업격하기로 유명한 학교였고 설립자가 죽은 뒤 어느정도 평정을 찾았지만 그래도 빡센 규율이 있었다고 한다. 당장 설립자가 살아 있었을 때는 일본 제국 시절의 일본군의 모습을 80년대에 재현했다고 봐도 될 정도였는데 그 실상은 아래와 같았다.

  • 밤 12시에서 새벽 4시까지 취침시간을 제외하면 하루 종일 주말을 포함하여 일절 자유시간이 없다.
  • 라디오텔레비전신문 등 모든 오락거리가 금지되었다.
  • 군것질거리라고는 오로지 하루에 한 번 나오는 우유와 빵뿐이고 여름이나 겨울이나 오로지 물 외에는 우유와 차 빼곤 어떠한 사제 음료수도 상상할 수 없었다고 한다.
  • '생활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교장의 교육철학에 철저히 의거하여 걸레질을 끊임없이 하면서 땀을 흘리면 마음이 평안해진다는 이유로 전교생이 매일같이 걸레질에 걸레질에 걸레질을 해야만 했다. 심지어 화장실의 변기는 맨손으로 닦아야 했다. 동영상에서도 언급했지만 실제로 저렇게 해야 했다.
  • 학생들이 세상 밖으로 나올 때라고는 2~3주 방학 또는 졸업 이후였다. 그 이외에는 3년 동안 절대로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일요일도 예외가 없이 저 일과가 쭉 이어졌다. 공휴일도 무시되었다.
  • 이를 어기면 혹독한 매질과 얼차려가 행해졌다.

월 1회 면회가 가능했는데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금지물품을 반입하지 못하게 하려고 신체검사를 받아야 했다. 게다가 교장의 훈시 때 한눈을 팔면 불려나와 따로 주의를 받았다. 1980년대 대한민국 부산광역시형제복지원이 있었다면 일본 미에현에는 바로 여기가 있었다.

본 문서 첫 번째 동영상의 1분 42초, 2분 시점에 복도 기둥에 걸린 한자 액자를 확대해서 보여주는데 각각 격할 격() 자와 엄할 엄() 자이다. 엄격한(嚴) 지도 아래 격렬하게(激) 생활하란 뜻으로 걸어 두었던 모양이다. 정상적인 교육기관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글자지만, 그렇기에 더욱 이 학교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2.1. 현재의 상황[편집]


하지만 설립자 사후에도 '닛세이가쿠엔'은 학교법인의 형태로 남아 있다. 상기한 학교들 역시 여전히 '학교법인 닛세이가쿠엔'에 속해 있으며 현재의 회장도 악명 높았던 아오타 츠요시의 가족이 이어나가고 있규 교육 이념 역시 츠요시의 이념을 어느 정도 승계하고 있다. 이 때문에 다른 평범한 학교에 비하면 학생지도가 엄격하기로 유명한데 아래는 극히 일부의 사소한 규정에 불과하다.

1. 기숙사 생활 시에 사적인 이유로 외출을 하는 행위는 일절 허가해 주지 않으며 오직 응급 상황이거나 방학일 경우에만 가능하다.

2. 스마트폰 등의 개인 전자기기는 취침 전 자습 및 자유시간 이외에는 원칙적으로 사용을 금지시킴과 더불어 특히 SNS에 학교와 관련된 내용을 투고한 것이 밝혀지면 중징계를 받게 된다.

3. 선후배 간 상하관계를 중요시 여겨 선배에게 반드시 인사를 시키는 등의 엄격한 규율이 있다. 특히 과거에 제2고등학교였던 아오야마 고등학교가 가장 악명 높으며 이런 현상이 생기면 당연히 따라오는 선후배 간의 갑질 문화가 있다.


얼핏 봐선 ‘평범한 학교들도 비슷하지 않나?’ 싶겠지만 위 사항을 어길 시 조금 혼나고 마는 게 아니라 징계 후 처벌이다. 그래도 설립자 사후에는 80년대에 비하면 교육 커리큘럼이 잘 짜여 있어서 갱생 목적의 이름만 공부가 아닌 ‘진짜 공부’가 가능하긴 한 상태다. 체벌도 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이지메로 인한 자살 사건이 증가하고 SNS의 보급으로 인해 문부과학성이 학교폭력에 대해선 눈에 불을 키고 모니터링 중이여서 학교폭력을 상당히 경계하기 때문에 학교폭력이 자행될 시 학생에게 강력한 중징계를 때려 철저하게 예방한다. 지금도 여타 일반적인 학교들에 비하면 악명 높지만 과거에 비하면 그나마 정상적인 학교가 되었다.


3. 가혹행위, 인권유린[편집]


물론 학교의 실상이 실상이니만큼 당연히 가혹행위도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위 영상 1분 28초 무렵에도 자세히 보면 주의를 주는 듯한 말투로 협박과 동시에 얼굴을 밀치며 가혹행위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취침시간에 선배들이 구타하여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오죽하면 학생들이 ‘1학년은 노예, 2학년은 평민, 3학년은 영주’라고 불렀을까… … . 그 때문에 탈주자도 많았는데 약 두 달마다 한 번씩 있었다고 한다. 물론 탈주를 해도 완벽한 도피는 힘들었다. 닛세이가쿠엔 제2고교의 경우 완전 첩첩산중에 있었으며 제일 가까운 철도역이 킨테츠 오사카선 히가시아오야마역이었다. 거기까지 가는 데만도 산 넘어서 5km 이상을 걸어가야 하고 역 자체도 각역정차 열차만 시간당 1~2대 정차할 만큼 이용객이 적어 도망치기 어려웠다. 제1고교와 중학교의 경우 아오야마초역이 그나마 가까이 있긴 했지만 그 가깝단 게 2km다. 그래도 아오야마초는 상대적으로 열차가 많이 서서 나은 편이다. 물론 닛세이가쿠엔 제3고교(현 지유가오카 고교)는 앞의 학교들을 다 씹어먹을 정도로 상당한 수준의 격오지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도보로 갈 만한 철도역이 주변에 아예 없는 곳이다! 그나마 가깝다고 할 만한 게 13km 떨어져 있는 반탄선 미조구치역이다. 대한민국으로 따지자면 서울특별시 중랑구 면목동에서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까지의 거리에 필적한다. 그래도 자전거를 소지하고 있다면 탈주 후 2시간 동안 자전거로 도주하면 어떤 역이든 도착은 할 수 있다. 맨몸일 경우 그저 묵념한다…… 이 경우 탈주자를 잡을 때까지 모든 활동을 중단시키고 학생들을 정좌시켰다고 한다. 물론 자살자나 의문사한 학생들도 상당히 많았다. 폭력 탓에 부상자나 자살자가 나오면 "학교가 24시간 감시할 수는 없습니다." 라는 면피성 발언을 했다.


4. 출신 인물[편집]


  • 하마다 마사토시 - 일본의 개그맨이다. 닛세이가쿠엔 제2고등학교 출신이다.
  • 이마다 코우지 - 일본의 개그맨이다. 닛세이가쿠엔 제1고등학교 출신이다. 1학년 가을에 탈주했다가 결국 퇴학당했다. 정작 이마다 코우지 본인은 이 학교에서 퇴학당한 걸 일생 최대의 행운이라며 엄청나게 기뻐했다.
  • 사메지마 히데키 -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소속의 전직 야구선수다. 1973년 7월 22일생이다. 다만 그는 자사고로 전환된 이후에 재학했다.

5. 여담[편집]


  • 위 항목의 3명 말고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물은 거의 없었고 오히려 야쿠자 등의 범죄조직에서 닛세이가쿠엔 출신을 눈여겨본다는 이야기가 있다. 엄격한 상하관계를 요구하는 조직 특성상 이 학교 출신이 매우 최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상술된 3명 외에도 닛세이가쿠엔 출신 프로 스포츠 선수들도 소수 있긴 했다. 당연히 도쿄대학은커녕 일반 대학 진학자도 얼마 없었다고 한다. 이 학교 출신이 입학한 대학 중 그나마 가장 좋은 학교가 도호쿠대학이다. 문제를 풀려면 최소한의 응용력이나 무언가를 효율적으로 생각하는 사고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 환경에선 그런 것들을 키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위에서 길게 설명했지만 간단히 요약하면 학교에서 군대놀이를 했다는 뜻인데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수업이 되기란 불가능하다. 차라리 홈스쿨링을 해서 대학에 간다는 것이 더 현실성 있게 들릴 지경이다.

  • 리사 몽고메리의 예시와 마찬가지로 구타가 사람을 멍청하게 만드는 수많은 예시 중 하나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학교와 같은 교육환경은 절대로 명문대를 보낼 수 없는 환경이며, 고등학교임에도 여기 출신 대졸자가 매우 희박한 이유다.

  • 닛세이가쿠엔 제2고등학교는 1989년 봄 고시엔에 미에현 대표로 출전하였다. 이때는 문제의 교장이 사망한 뒤라 악명이 높던 때에 비하면 학교 생활이 나아졌다. 나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상기했듯 동시기 일본의 일반적인 고등학교에 비하면 권위적이고 빡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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