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평의 입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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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2. 배경
2.1. 연몽멸금
2.2. 전쟁과 수비 사이의 싸움
3. 전쟁 과정
3.1. 중원에 처음 들어가다
3.2. 변경광복
3.3. 무곡입락
3.4. 용문 전투
3.5. 낙동전
4. 전쟁의 결과
5. 전쟁 영향
5.1. 몽골과 남송 관계 악화
5.2. 남송 국방 약화
5.3. 혼란 심화
5.4. 대외 태도 변화


1. 소개[편집]


남송 이종 10년 때 쓰던 연호 단평(端平) 원년인 1234년에 남송(南宋)이 몽골군과 연합해 금나라를 멸망시킨 후 하남에 있던 옛 북송(北宋) 동경개봉부(東京開封府, 지금의 하남 개봉), 서경하남부(西京河南府, 지금의 하남 낙양), 남경응천부(南京應天府, 지금의 하남 상구)의 삼경(三京)으로 출병하여 탈환한 군사행동을 말한다. 양초 부족과 기병 부족 등으로 몽골군에 밀려 방어선으로 후퇴했다.이 작전은 몽송전쟁이 본격적으로 발발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2. 배경[편집]



2.1. 연몽멸금[편집]


단평의 입락의 발단은 1206년 개희 2년에 일어난 개희북벌의 실패 이후, 가정 연간 말 금나라의 지속적인 침공에 있었다. 가정 연간 말, 금나라 황제 선종몽골 제국의 침입을 피해 송나라의 옛 수도였던 남경개봉부로 천도한 뒤, 실지 회복을 위하여 남송을 지속적으로 침공하였다. 이로 인해 남송의 불만이 쌓여가던 와중인 1233년, 세력을 급속도로 확장하고 있던 몽골 제국의 사신이 남송 측에 금나라를 협공할 것을 제안했다.

남송 조정은 금나라를 멸망시켜 원수를 갚자는 의견이 우세하여, 결국 몽골과 연합하여 금나라를 함락시키기 위한 군대를 일으켰고, 1234년에 금나라를 멸망시켰다. 남송의 이종은 애종의 머리 가죽과 두개골을 태묘에 바쳐 제사를 지냈고, 남송 전국이 기쁨으로 가득차 조중에서는 일련의 경축행사가 거행되었다. 금나라를 멸망시킨 것에 대한 논공행상이 이루어진 뒤, 남송 조정은 향후 몽골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흔히 이를 신중론자들과 적극론자들간의 당파싸움이라 하는데, 내외 대신들의 의견이 엇갈린 가운데, 이종은 고토 수복을 주장하는 이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하남 지역은 북송의 삼경이 있던 곳으로, 전통적으로 남송(南宋)에 중요시되었지만, 당시 남송과 몽골 사이에서도 하남(河南)의 귀속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었다. 몽골의 오고타이가 식량과 마초가 부족하고 날씨가 더워지는 것을 고려해 황하 이북으로 대군을 철수시키자 하남은 아무도 점령하지 못한 지역이 됐다. 황하 남쪽에 있는 것은 대장 수부타이와 타차르가 이끄는 두 기동부대뿐이고, 나머지 수비부대는 모두 원래의 금군이 몽골에 투항한 후 개편된 것이다. 한인 부대 사령관 유복이 하남도를 총괄하고 도원수 장유[1]는 서주에 주둔하고 있었다.

남송의 변강은 형양이었는데, 일대는 신양군(지금의 하남 신양)·당주(唐州)·등주(鄧州) 일선에 이르렀으며, 주정인은 경호제치사(京湖制置使) 사숭지(史崇之)였다. 천촉 지역에서는 조언납이 사천제치사로 재직하고 있었고, 양회 지역에서는 조규가 회동제치사로 재직하고 있었으며, 전자재는 회서제치사, 조범은 연강제치부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2.2. 전쟁과 수비 사이의 싸움[편집]


남송의 권력을 20여년 간 잡은 사미원(史彌遠)은 가장 신임이 두터웠던 정청지(鄭淸之)를 우상 겸 추밀사로 승진시키고 설극(薛極)을 추밀사(樞密使)로, 교행간(交行簡)과 진귀의(陳貴義)를 참지정사(參知政事)로 하여 후사를 주선하고 소정(昭定) 6년(1233년)에 죽으니 젊은 송이종이 친정을 맞게 되었다. 의도적으로 '단평경화(端平更化)'를 주도해 폐단을 일소하고 신인들을 대거 발탁하였는데, 조범·조규 형제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몽골군이 북으로 철수하는 것을 틈타 "중원을 무정하고 황하를 사수하며 동관을 점거하고 삼경[2]을 수복하라"며 북벌에 나설 것을 극구 주장했다.
동관-황하 방어선을 타고 몽골과 20년 넘게 싸워온 금나라는 몽골인들로 하여금 남송을 통해 후방을 공격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기 때문에 역사적 근거가 충분하다. 그러면서 조씨 형제의 뒤에는 이전의 난을 애써 평정했지만 큰 자리에서 형양에게 패한 사숭지(史崇之)는 자신의 속셈이 있었다. 사숭지는 사미원(史彌遠)의 조카로서 조정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전공을 세워야만 했다.

중원 수복은 큰 명성과 영광을 가져다 주지만 조중의 대다수 신료들, 특히 교행간과 진덕수[3]의 반대가 있었다.

다른 장수들도 거의 모두 출병을 반대했다. 조범의 참모관인 구악(丘岳)은 "방흥지적(方興之敵)으로 신맹(新盟)이 물러나고 기세가 맹렬하니 차라리 기부소를 내고 사람을 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회서 총영사 오잠은 "하남은 비록 취하기는 쉽지만, 지키기는 어렵다, 군융의 재원은 어디에 들겠는가!백성이 몹시 가난하여 격렬하게 변하니 오늘의 일을 어찌 가볍게 의논할 수 있겠는가!"멸금전쟁을 주관한 사숭지는 경호 지역이 연년 굶주려 이런 공격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하남은 연년병화로 현지에서 보급받는 것도 비현실적이라며 항지(抗旨)를 내세울지언정 군사를 내지 않겠다고 했다. 이외에도 송군은 기병이 부족하고 기동력이 제한되어 긴 황하 방어선을 방어할 수 없었으며, 원래 주전파가 세운 작전계획은 동관과 황하 이남을 탈환한 후 최소한 15만 백전 정예의 군대로 방어를 전담해야 황하 방어선을 지킬 수 있었다. 또한 몽골의 송 침공에도 빌미를 줄 수 있다.

송이종은 혈기왕성하고 회복책을 강구하던 중 하남지방, 특히 원래 정주 공의재(恭義在)의 원래 북송 황제의 능을 탈환하는 데 급급해 멸금된 지 넉 달 만에 세 차례나 사자를 하남으로 보내 조릉을 알현하는 한편 암암리에 군사정찰에 나섰고, '거관수하(居關守河)'의 건의를 지지하여 수상의 우승상 겸 추밀사 정청지가 이를 적극 주도하였다. 각지의 장수들이 발을 동동 구르는 바람에 결국 6만 보졸로 하남에 진출하였다.

3. 전쟁 과정[편집]



3.1. 중원에 처음 들어가다[편집]


단평 원년(1234년)5월, 송이종은 조규에게 삼경 수복의 사령관으로 임명해 송군의 주력 5만 명을 이끌고 사주(지금의 강소 쉬이 서북)에서 회하를 건너 북상하고, 조범에게 양회제치사, 군마절제 겸 연강제치부사를 주어 광주(지금의 하남 황천), 황주(지금의 후베이 황강) 일대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리고 사천안무제치사(四川安務制置使) 겸 지흥원부(知興元府) 조언납에게 진, 공 지역의 관내 몽골군을 견제하게 했다. 6월 12일, 전자재의 군대는 여주[4]에서 정식으로 출발하여 18일 수주[5]에서 화이허를 건너 적지로 들어가 21일 몽청 현[6]에 도착한다. 전자재군은 22일 성부(지금의 안후이 보저우 차오청 구 인근)에 도착했다. 24일 전자재군이 호주[7]에 도착하자 성에 주둔하던 600여 명의 몽골군에 항복한 금의 병사들이 송으로 옮겨와 이들의 안내를 받아 위진[8], 성읍[9], 태강[10] 등 3현을 거쳐 7월 초이틀 변경 외곽 20리에 진을 쳤다.

몽골군의 장수 타차르는 일찍이 송군이 북진했다는 소식을 듣고 소부의 몽골군을 이끌고 황하 이북으로 물러나 송군에게 일부러 약함을 호소하여 송군을 깊이 유인하였다. 철수하기 전에 몽골인들은 황하 남안의 금나라 강둑을 미리 파서 양회 일대의 넓은 황범지대를 만들었다.상황이 이렇게 되자, 수춘에서 변경까지 물이 목까지 차는 등 송군이 진군하는 과정은 험난했다. 송군의 후방 보급선이 심하게 파괴되어 식량 수송대는 두 개의 회황범구를 돌아야 하남 경내에 도착할 수 있었다.

3.2. 변경광복[편집]


7월 초이틀, 전자재군은 변경 교외 20리 자영에 도착하여 몽골의 카이펑 성을 방어하던 원래 금의 항장이었던 이백연이 최립을 죽이고 성을 바쳤다.

7월 5일, 전자재는 송군을 이끌고 변경성에 입성하여 악비 등 항금장수들이 평생 이루지 못했던 꿈을 이루었다.그러나 그들이 본 것은, 이미 《청명상하도》[11]의 번잡함이 아니었다.백만 명이 넘는 인구가 6백여 명, 주민이 천여 명 남았고, 대상국사와 원래 북송궁전만 큰 변화가 없었다.

개봉에 도착하자 연도의 시정이 파손되어 백골이 덮인 데다 보급선이 홍수로 파괴되어 전 자재군의 식량공급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많은 사병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그 자리에서 식량을 기다리며 정주(鄭州)·진주(陳州·지금의 하남 회양)·채주(蔡州·지금의 하남 여양) 등을 편사(偏師)로 공격했다. 송군이 갔던 곳, 몽골의 성을 지키던 금나라 항장들이 모두 망을 보고 복종했다.

7월 20일, 조규는 송군의 주력인 회동병 5만을 이끌고 변경에 있는 전자재의 군사를 만나러 왔다.

3.3. 무곡입락[편집]


전자재는 7월 5일 변경을 점령했지만 군사행동에 나서지 못했다. 몽골인들의 중원 파괴력은 그의 예상을 훨씬 웃돌았고, 양회의 식량 수송팀은 황하의 수렁에 빠져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조규는 변경에 이르자 전자재가 낙양을 정면으로 공격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공로가 절실한 조규는 사람을 보내 군량을 재촉하는 한편, 변경의 군량을 일부 병력에 우선 집중시켜 이 부분 병력으로 하여금 5일분의 식량을 분배하게 한 후 낙으로 진군하였다. 그리고 변경에 남아 있던 다른 부대는 군량이 변경에 도착하면 낙양으로 출발했다. 그러자 송군은 낙양으로 떠난 군대를 나누어 투입하는 것으로 바뀌었고, 이는 몽골군에게 각개격파의 기회가 되었다.

조규는 전자재가 군대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불만 때문에 부하 서민자를 공격수 부대의 감군으로 교체하고 전자를 변경에 남겨둔다. 공격 부대는 모두 1만3000명이다 .그 후, 양의가 원래 전자재가 이끄는 회서병과 기타를 지휘하였다. 부대는 제2제대로 군량을 공급받기 전에 낙양으로 들어갔다. 군대가 식량을 받아 군량이 적다고 아우성치는데도 조규는 각 군에게 출발 명령을 내렸다.

7월 21일, 조규가 변경에 도착한 다음날, 서민자는 마지못해 1만3000명의 송군(宋軍)에게 5일 군량미를 7일로 나누어 먹고 낙양(洛陽)으로 가라고 명령했다.

7월 26일 저녁 서민자가 송군을 이끌고 낙양에 도착하자 성안에는 아무런 지키는 병사도 없었고, 낙양 주민들은 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성벽에 올라 송군의 서경인 낙양 수복을 환영했다.

7월 28일 송군 제1부대 1만3000명이 모두 낙양성에 입성하자 조규는 낙양 수복의 승전보를 빠르게 임안(臨安)으로 전했다.

7월 29일 송군은 식량이 바닥났으나 낙양은 파손되어 보급이 불가능해 들풀과 밀가루를 따서 떡을 지어 먹었다. 송군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송나라 북벌을 들은 몽골인들은 낙양을 버리고 황하를 건넜으나 낙양, 맹진, 동관 등 넓은 곳에는 적지 않은 몽골 기병 초기를 남겨두고 송군의 움직임을 정찰하였다. 송군이 변경을 떠나 낙양으로 간 후, 타차르는 다시 황하를 건너 낙양 동쪽 용문지방으로 가서 매복한 뒤 송군의 제1제대를 놓아두고 낙양성으로 들어간 뒤에야 송군의 제2제대를 급습해 낙양과 변경의 송군을 차단한 뒤 각개격파하려 하였다.

3.4. 용문 전투[편집]


7월 29일 송나라 장수 양의가 이끄는 제2군 1만5000명은 5~6일간의 장거리 행군 끝에 낙양성 외곽의 용문에 도착하여 진영을 꾸렸다. 양의는 전군에 그 자리에서 쉬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송군 병사들이 밥을 먹기 위해 연기를 피워올리자 인근 정상에는 붉은색, 노란색 깃발이 순식간에 세워졌다. 이내 몽골 기병들이 순식간에 사방에서 달려와 주장 유형안의 뒤를 따라 송군을 기습하여 패퇴시켰다. 활과 쇠뇌를 주공으로 삼는 송군은 진형을 짜 방어에 나서기도 전에 닥친 급작스러운 공격에 우왕좌왕했고, 유형안은 기병으로 송나라 진영을 가로지르며 송군을 대파했다. 전투는 순식간에 끝났다. 남송의 제2군 병력 대부분이 이 전투의 끝에 낙수에 몰려 익사했고 주장 양의를 포함한 일부만 낙양성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남송의 제2군은 이 한 번의 전투로 괴멸해버렸고, 낙양성에 남은 제1제대는 고립무원의 처지로 전락하고 있었다.

3.5. 낙동전[편집]


용문 전투 후 몽골이 이 틈을 타서 낙양성에 진을 쳤다.송군은 원조가 없고 양식이 없는 반면 낙양성은 어른이 적어 성을 지키는 것도 불가능했다. 감군 서민자는 몽군의 주력이 도착하지 않은 틈을 타 포위하여 회군하기로 했다.낙양의 송군은 몽골군의 부대를 습격해 송군의 주력을 엄호하는 한편 8월 초 낙수를 건너 배수진을 쳤다.

8월 초하루 몽골군이 먼저 공세를 취하면서 송군 진영에 여러 차례 공격을 가했다. 송군은 전투가 완강하여 누차 몽골군을 물리쳤다. 쌍방의 승부가 대등하였다.

8월 2일 몽골군은 보병 방패막이로 전진해 송군의 전열을 세 부분으로 차단하고 기병으로 다시 돌진했다.송군은 보병 대진을 등에 업고 정오까지 싸워 400여 명을 살상하고 방패 300여 면을 빼앗아 다시 몽군의 공세를 물리쳤다.

송군은 정면 전투에서 밀리지 않았지만 나흘째 식량이 끊기는 등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서민자는 동쪽의 몽군을 주력으로 보고 송군을 이끌고 남쪽으로 포위를 돌진했다. 몽골군은 송군이 포위를 뚫은 것을 알고 기마사수로 뒤에서 추격하여 죽였다. 절대 다수가 보병인 송군은 도망가는 길에 죽임을 당했고 송군은 거의 전사한 상태였다.

서민자는 8월 11일 300명의 군대를 대동하고 남송 광주로 허겁지겁 탈출했다.

4. 전쟁의 결과[편집]


전선의 입락군은 무너졌지만 송이종은 여전히 삼경 수복의 기쁨에 젖어 있었다.

8월 9일, 그는 이들 지역의 지배에 대하여 인사 배치에 착수하였다. 조범은 지개봉부, 동경유수. 조규는 경하제치사, 지응천부, 남경유수. 전자재는 관산제치사, 지하남부, 서경유수였다.

조규와 전자는 비로소 낙양 및 개봉 수비에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각기 수만 명의 군사를 거느렸으나, 군량과 마초가 모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결국 결단을 내렸다. 낙양 송군을 응원하는 것을 포기하고 즉시 개봉에서 퇴병하기로 했다. 퇴각 직전까지 병사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병사들은 낙양을 증원하러 간 줄 알았는데, 성 밖으로 나와 보니 군사를 이끌고 퇴각하는 바람에 인심이 크게 뒤숭숭했다. 송군은 철군 도중에 규율이 극히 없어, 전멸을 초래하였다. 후군이 궤멸되어 모두 중원에 치중되었다.

사천의 경우 정청지가 조언납에게 출병을 거듭 촉구했지만 조언납은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 단평입락은 실패로 끝났다.

개전 직후 조범이 이를 번복하는 바람에 송군은 6만 명을 동원했고, 그 결과 병사의 절반 가까이를 잃었다. 한 치의 땅도 얻지 못하였다.

9월, 송이종은 먼저 이에 대해 관련자들에게 책임을 물었다. 양씨 등은 관직에서 물러났다.[12] 또 자신의 예측이 부족했음을 알고 사숭지를 형부상서(刑部尙書)로 바꾸었다.

둘째, 송이종은 죄의 조서를 내렸다.그는 자신을 "짐이 과덕하다"고 욕하였고, 조서를 내렸다.

"병사의 죽음으로 싸우고, 호구의 곤궁이 유랑하고, 마을을 방랑하고, 고기가 서로 바라볼 수 없는 것은 모두 명백하지 못하며, 덕이 미부하고, 위로는 하늘의 마음을 격하하지 못하며, 아래로는 백성의 뜻을 정함이 없다"고 한다. 소자에게 하느님의 이름을 대신하지 아니하고 소복의 공을 세우려 하니 어찌 가볍게 군사를 움직여 오히려 변화(邊禍)를 일으켜 강적(強敵)에 이르러 신주를 천식할 수 있으랴. 참상벌 대추는 집을 부수고 유랑하는 형상을 짐도 볼 수 없고, 어버이 어린 과부가 우는 소리를 짐도 들을 수 없다. 진륜대의 회개를 조처하고 변방에 일벌백계하라."


5. 전쟁 영향[편집]



5.1. 몽골과 남송 관계 악화[편집]


단평입락은 몽골이 비워둔 땅으로 남송군이 들어갔다는 단어 그대로의 의미에서 벗어나, 결과적으로 몽골을 선제공격한 셈이 되어 몽골이 남송을 대거 침공할 구실을 주게 되었다. 송-몽 관계는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최악으로 치달았고, 이는 연몽멸금으로 몽골과의 우호관계를 수립했던 과거를 무위로 돌리는 것에 불과했다.

애초 몽골군이 북쪽으로 회군한 것은 남송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한 것으로, 만일 남송이 몽골을 대등한 외교 파트너로 생각하고 있었다면 사전 조율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송 조정의 안일한 판단이 몽골과의 지리한 싸움을 조금 더 일찍 불러온 셈이다.

1234년 말, 몽골의 사자가 임안(臨安)에 와서 송 조정이 맹약을 깬 것을 규탄하였다.

1235년 봄, 오고타이는 황태자로 하여금 남송을 공격하게 하였고, 이후 수십 년간 이어질 처절한 송몽전쟁이 전면적으로 발발하였다.

5.2. 남송 국방 약화[편집]


입락군의 패배로, 송군은 부상을 입었다. 대량의 기갑, 배수레, 곡식을 모두 적의 경계에 배치하여, 강회 지역은 공허하였고, 방어할 사람이 없었다.

5.3. 혼란 심화[편집]


단평 입락에 실패한 후, 송 조정은 관리가 되지 않았다.경험의 교훈을 종합하여 정성을 다하여 일치단결하여 대적하는 대신에 다시 한번 서로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다. 전자는 비록 소극적이지만, 후자는 어떠한 좋은 방책도 제시하지 못하여 그로 인해 조정의 더 큰 혼란을 초래하였다.

5.4. 대외 태도 변화[편집]


송이종의 대외 태도가 크게 바뀌었다. 단평입락의 실패는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앞서 치솟았던 열기는 사그라지고 대신 수세로 돌아서 그의 뒤를 이어 조정에 관통했다. 송 효종은 비록 북벌에 실패하였지만, 여전히 우윤문과 함께 잊지 않고 중원을 수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송이종은 이번 좌절 이후 두 번 다시 북벌의 의지가 없었다.[13] 여개의 죽음, 유정의 반역 등 남송 멸망의 씨앗은 바로 송이종의 집권 후반기에 묻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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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에 남송을 멸망시키는 데 일조하는 장홍범의 아버지.[2] 삼경(三京)은 동경개봉부(東京開封府, 즉 하남 개봉), 서경하남부(西京河南府, 즉 하남 낙양), 남경응천부(南京應天府, 즉 하남 상구)의 세 도읍을 말한다.[3] 남송 영종 시기 금군이 변경으로 천도하자 세폐를 끊을 것을 주장하였다.[4] 지금의 안후이 성 허페이 시[5] 지금의 안휘 수 현[6] 지금의 안후이[7] 성부는 본래 대성(大城)으로 북송(北宋) 때 소동경(小東京)이라 하였는데, 이때는 민가가 10여 곳에 불과하였다.[8] 지금의 하남 녹읍 현 동[9] 지금의 하남 낙읍현 서[10] 지금의 하남[11] 오늘날 중국 허난 성 카이펑 시에서 열리는 대송동경몽화가 이 그림을 모티브로 하였다.[12] 조씨 형제와 전자재가 뒤늦게 송몽전선에 복귀해 단평입락 때보다 더 큰 실수를 저질렀다.[13] 물론 송이종의 판단이 틀린건 아니다. 금나라와는 달리 몽골은 남송을 멸망시킬 능력이 있었고 이 시기 몽골은 동유럽을 아작내는 등 여전히 그 힘이 강성하였기에 남송이 다시 북벌을 한다고 성과를 낼 수 있을리가 없다. 외려 괜히 다시 북벌한다고 또 공세를 하다가 꼬라박으로 끝나 군사만 대량으로 잃을지도 모를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