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함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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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덕수궁에 있었던 건물이다. 정관헌의 남쪽, 덕홍전의 북쪽, 함녕전의 서북쪽에 있었다.
이름 '함유(咸有)'는 《서경 - 상서》 편에 나온 '함유일덕(咸有一德)'에서 유래했다. '임금과 신하가 다(咸) 한 가지 덕(一德)이 있다(有)'는 뜻이다.
2. 역사[편집]
1896년(건양 원년) 2월에 고종과 왕실은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갔다. 언제까지 러시아공사관에만 머물 수 없었던 고종은 환궁처[1] 를 근처에 있는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정했다.
그러나 경운궁은 본래 임진왜란 당시 월산대군[2] 의 사저와 근처 민가를 합쳐 만든 임시 행궁이었고, 그나마도 인조 때에 즉조당과 그 주변 별채를 제외하고는 전부 본 주인에게 돌려준 상태였다. 그래서 번듯한 건물이 없었기에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던 1896년부터 경운궁을 궁궐답게 만드는 대공사를 진행했다. 그 때 지은 건물 중 하나가 바로 함유재이다. 함유재 공사는 몇 달 만에 끝났다. 그래서 1897년(건양 2년) 고종이 경운궁으로 돌아간 뒤 바로 사용할 수 있었다.
고종은 함유재를 신하들과 만나 정사를 펼치는 곳으로 활용했다.# 경운궁에서는 편전을 한 건물로 고정하지 않고 여러 건물들을 사용했는데 함유재도 그 중 하나였던 듯하다. 《승정원일기》에는 1898년(광무 2년)과 1899년(광무 3년)에 함유재에서 주요 대신 및 각 부처의 신하들을 소견한 기록이 있다.### 그 중 두 번은 고종의 생일(만수성절)을 맞아 신하들이 경하하러 온 내용이다.
1904년(광무 8년) 함녕전에서 일어난 대화재로 불탔다가 곧 재건했다. 일제강점기 초반에도 고종은 이곳을 활용했다. 1912년에는 잠시 옮겨가 머물렀고#, 1915년에는 도쿄가는 것을 고하러 온 데라우치 마사다케 조선 총독을 만나기도 했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한 후 덕수궁[3] 은 빈 궁이 되었고, 일제는 덕수궁 건물 대부분을 철거 및 매각하면서 함유재도 헐었다. 철거 시기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1922년에 의민태자(영친왕)의 아들 이진이 덕수궁에서 사망한 후 빈소로 썼다는 《매일신보》의 기사와 1926년 경에 작성한 《덕수궁각건물배치도》에 보이지 않는 것을 종합해보면 저 사이에 헌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