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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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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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의왕시 청계산 중턱에 위치한 북파공작원 충혼탑
존속기간
1950년대 ~ 1990년대 추정
주둔지
인천, 청계산, 파주, 연천, 춘천 등 다수의 소규모 안가
목 적
첩보수집, 납치, 기습 등
특 징
단독 또는 2~5인의 소규모 활동
홈페이지
특수임무수행자 유족동지회[1]


1. 개요
2. 특징
3. 북파공작원
4. 육군첩보부대(HID)
5. 민수



1. 개요[편집]


과거 대한민국 육군 첩보부대 소속으로 북파공작을 수행하던 부대(부대원)으로 돼지, 민수, 민수공작원 등으로 불린다.
1968년, 김신조 1.21 사태이후 생겨난 응징보복부대들과[2] 달리 1950년대부터 존재하며 꾸준히 북파되어 공작임무를 수행하던 부대(인원)들의 총칭이다.

흔히 북파공작원하면 떠오르는 군번이 없다, 민간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단독 또는 2인~5인으로 소규모 침투한다, 서울역에서 물색관에게 포섭되어 북파공작원이 되었다, 죽거나 실종 될 때까지 수차례 북파되었다, 목장간판이 달려 있는 소규모 안가에서 훈련받았다, 안가 주변의 주민들에게 돼지 또는 돼지부대라 불렸다, 북파되어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7700여명에 이른다, 계약해지(제대) 후 병역기록이 없어 다시 입대했다. 등등 북파공작원에 관한 시중에 떠도는 수많은 소문의 발원지가 바로 이곳이다.

인터넷에서 정보사 특임대 출신자들의 댓글을 보면 설악개발단이라고 불리던 부대에서도 '안가'라는 곳을 운영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설악개발단의 '안가'와 민수의 '안가'는 다르다. 설악개발단의 부대원은 현역군인이고 민수는 민간인이기 때문에 설악개발단의 부대원이 군복무 중에 간다는 '안가'는 민수의 안가와는 다를 수 밖에 없다. 안가라는 말은 본래 안전가옥의 줄임말이다.

현재는 모두 해체되어 존재하지 않으나 1990년대까지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민수공작원 출신 김소웅씨 인터뷰


2. 특징[편집]


민수공작원들의 유족단체인 특수임무수행자 유족동지회와 응징보복부대 출신들의 단체인 특수임무유공자회는 사이가 원만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특수임무수행자회[3]와 진중권교수의 법정다툼의 시초가 되었던 진중권교수의 칼럼에는 유족회측은 "우리 아버지 제사를 옆집 가족이 땅바닥에서 지내는 격"이라고 황당해 했다.고 기재되어 있으며 유족회측의 홈페이지에는 특수임무수행자회 회원들로부터 폭행당하는 영상이 올라와있다. 유족회 홈페이지


3. 북파공작원[편집]


자세한 것은 북파공작원 문서 참조.

북파공작원이란 한국전쟁 중인 1952년부터 휴전 후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발표 때까지 북한지역에 파견되어 활동한 무장첩보원이다. 정보사에 따르면 7.4남북공동성명 발표 뒤 남북이 공동으로 공작원 파견을 하지 않기로 함에 따라 북파는 자제하고 있다고 한다. 북파공작원들은 최초 한국전쟁 당시 남한에 있는 지리산 빨치산처럼 북한의 후방을 교란시킬 목적으로 양성됐다. 적 생포 및 사살, 적군진지 주요시설물 폭파, 적지에서 각종 테러를 통한 사회혼란 야기, 첩보수집, 첩보망 구축 등을 주임무였다.

이들은 조선인민군 복장을 위장 착용하고 육해공군의 보급지원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모든 것을 자급자족으로 해결했고 미숫가루, 생식, 칡뿌리, 소나무껍질을 주식으로 했다. 임무수행 중 부상을 당했을 때는 자결이나 자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작전에 투입돼 살아 돌아온 경우도 극히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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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공작원을 훈련시키고 북파를 담당하였던 부대가 바로 육군첩보부대(HID) 제1교육대이다. 대한민국 정보부대는 최초 1946년 1월 경 군정청 국방총사령부 정보과로 발족하여, 1948년 8월경 조선경비대 총사령부 정보국으로, 같은 해 11월 말경 육군본부 정보국으로 개편되었다. 1950년 7월경 육군본부 정보국 내에 공작과가 생겨서 주로 첩보수집 임무를 담당하게 되는데, 한국전쟁에 따른 첩보업무의 활성화 필요성에 따라 육군본부 정보국 공작과를 1951년 3월에 별도 조직으로 독립시켜서 확대 개편시킨 육군 첩보부대(HID)를 만들게 된다. 일명 돼지부대라고 불리는 부대가 바로 여기다.

1961년 7월 HID라는 부대명을 AIU(Army Intelligence Unit)로 바꾼 뒤, 1972년 육군 정보대(MIG : Military Intelligence Group)를 통합해 육군정보사(AIC : Army Intelligence Command)가 된다. 그리고 1990년 각군 정보부대를 통합한 것이 현재의 국군정보사령부(DIC: Defence Intelligence Command)이다.

4. 육군첩보부대(HID)[편집]


현재 대중적으로 HID라는 명사는 육군 산하로 존재했었던 수많은 각기 다른 북파공작관련 부대들을 모두 지칭하며 통용되고 있으나 그 부대들은 분명히 각기 다른 부대들이다.

HID는 직할대와 36지구대, 18지구대 등 여러 지대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각 군단과 사단에 이러한 지대들을 파견했다. 한국전쟁 당시 HID소속 첩보부대는 30여 개가 있었다. HID 직할대가 제1교육대였고 36지구대와 18지구대는 각기 동해안과 서해안 지역을 맡아 첩보활동을 벌였다. HID 제1교육대는 1952년 10월 말경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 청수장에서 창설되어 1953년 6월까지 3기의 교육생을 배출하게 된다. 교육생들은 공수훈련·유격훈련·중요건물 및 교량폭파·도피 및 탈출·사살·납치·교란·사격술·독도법·도둑질 등의 특전유격훈련과 공작에 필요한 훈련, 정신교육 등 16주 과정의 공작원양성교육을 받았다.

구체적으로 훈련시 분대별로 행동했는데, 야간에 북한산 계곡을 누비는 행군을 했으며 담력을 키우기 위해 야영할 때는 동굴에 낙엽을 깔고 담요 한 장으로 몸을 덮고 돌멩이나 해골을 베고 잤다고 한다. 훈련을 마친 제1기생은 1953년 봄 김종벽 소령의 인솔하에 2개 중대로 나뉘어 제1중대원들은 해주 앞 용매도에, 제2중대원들은 진남포 앞 취라도 등 서해안으로 침투했다. 제2기생들은 평안북도 묘향산 일대에 공수낙하하여 침투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기상악화에 의해 일부만 투하되었고, 일부는 원산 앞 여도에 합류하였다. 제2기생 일부는 휴전 후 설악대원으로 해상·육지로 침투작전에 참가했다.

제3기생은 김석환 대위가 이끌고 원산 앞 여도에 침투했던 사람들이다. 한국전쟁 중 HID요원들은 그 당시 한국군이 갖고 있던 장비가 열악해 주로 미군 등 유엔군의 비행기와 선박을 이용해 공중과 해상으로 북한지역에 침투하였다. 설악대는 여도에서 철수한 제1교육대원들과 일부 잔류병들이 그 후 36지구대 예하부대로 개편된 것으로 휴전 후 침투공작을 주로 담당해 여러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들은 10명 내외의 조별로 활동했는데, 다른 조의 활동에 대해 서로가 전혀 몰랐으며 교육내용은 제1교육대와 별 차이가 없었다. 설악대의 대표적인 전과는 1954년 5월 김윤탁 소대장 외 5명이 장전항 인근에 침투하여 인민군 대좌를 생포한 사건이다. 이 전공으로 김동석[4] 36지구대장(소령)은 1954년 5월경에 을지무공훈장을 수여 받았다.


5. 민수[편집]


1-1. 포섭
50년대는 전시와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시기였고 체계적인 공작원 선발 및 교육이 어려운 시기였으며 북한의 지리와 말에 능숙한 월남자중 반공사상이 투철한 사람들을 애국심담보와 경제적조건등을 제시하여 공작원들을 선발하였으며 60년대 들어서면서 부터는 물색관이 경제적 조건의 보장과 안정적인 직업(생활보장)등을 내세워 체계적으로 공작원을 포섭하게 되었고 가정 및 사회적으로 문제가 없는 사람을 포섭, 선별 채용하게 되었다.
군 입대전의 포섭대상자에게는 병역의 면제를 보장하는 조건도 있었다 하지만 공작원 생활을 마치고 사회생활 중 다시 군에 입대하여 병역을 필해야하는 경우가 70년대까지도 이어졌고 또한 군 병역을 필하고 사회생활을 하던 중 물색관으로 부터 직업알선 및 생활안정 등의 제시를 받아 공작원생활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90년대까지 물색관이 제시하는 조건에는 시대에 따라 조금의 차이가 있을 뿐 그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1-2. 침투
50년대는 주로 3~5명이 침투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6~70년대 들어서면서는 단독침투를 하였으며 임무에 따라 2~3명이 침투하는 경우도 있었다. 50년 전시에는 육해공을 가리지 않고 침투를 하였으며 휴전이후에는 해상 및 육상으로 침투 하였고 우회 공작원이라 하여 제 삼국을 통하여 침투를 하기도 하였다.
대북침투 및 공작활동에 필요한 교육은 6~70년대 부터 전문적인 교육을 하였으나 전사자는 줄어들지는 않았다.
이후 1972년 7. 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으나, 북한과 한국의 상호 첩보활동은 비밀리에 행하여졌으며 1972년 이후의 공작활동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으나, 대북임무를 한 사실이 있음을 입증시켜주는 내용이 있으며 이는 민간공작원에 의한 단독임무수행자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전국 각지에서 훈련을 실시하였다.
현행 전사자 명단을 볼 때, 국가는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이후의 전사자명단은 공개하지 않고 있다.

1-3. 구성
1950년대부터 구성요원을 보면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1990년대 까지 이러한 체계로 이루어졌으며 특별한 경우도 있었다.
안가라는 특정지역에 고립되어 1960~1970년대는 학생(또는 훈련생)이 최고 8명 내외까지 다양하게 구성되어지기도 하였다.
1972년 남북공동성명이후는 뚜렷한 구성원을 구성하였고 이러한 구성원은 1990년대까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안가에서 죽음의 명령을 기다리던 공작원들은 전. 평시를 가릴 수 없었으며 평시에 더욱 많은 희생자를 낳았기에 8천여명이 넘는 민간신분의 북파공작원이 이름 없는 별로 사라져갔다.
이들은 유품이나 유골도 없이 50년 넘게 방치되다가 2005. 1. 11일 69위, 2006년 3. 8일 42위가 대전국립현충원에 이름 석 자만이 새겨져 있다.

민간 북파공작원 단독팀의 인원구성
1.팀장(큰선생) : 장교
2.부팀장(작은선생) : 하사관
3.보조원(키파) : 사병
4.보조원(밥쟁이) : 사병
5.학생(공작원) : 민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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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특수임무수행자 유족동지회 측과 정보사 육상, 해상 및 공군, 해병 북파 목적 부대들로 이루어진 특수임무유공자회(구 특수임무수행자회)는 출신 부대도 다르고 다른 단체다. 개요 문단에 링크되어 있는 진중권 교수의 칼럼에 관한 송사사건을 통해 명백히 밝혀진 내용이다. 특수임무유공자회가 현역군인들로 이루어진 부대들로써 2002년까지 해당부대에 소속되어 있었다면 북파여부와 상관없이 보상을 받아 젊은 사람들이 많은 단체라면 유족회측은 북파가 횡행하던 70년대 이전의 군번없는 민간인들로 구성되었었고 지금은 사라진 부대들의 부대원 유족들이 주축인 단체다.[2] 설악개발단, 선갑도, MIU, 684[3] 명칭변경하여 지금은 특수임무유공자회[4] 육사 8기, 예비역 대령으로 맥아더가 "This man" 이라고 부를 정도로 신임한 사람이다. 이렇게 부른 이유는 맥아더에게 올라오는 북한군에 대한 고급정보가 오면 맥아더는 자신의 책상에 둔 김동석의 사진을 가르키며 This man이 보낸 거냐고 물어보고 그렇다면 전적으로 그 정보를 신뢰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군에서는 6.25 4대 영웅 중에 한 명이라고 평가한다. 참고로 가수 진미령 씨의 아버지 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