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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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푸아뉴기니의 주요 항만 산업 도시인 라에의 부두 전경

1. 개요
2. 역사
3. 시설 & 볼거리
4. 여담


1. 개요[편집]


Lae

파푸아뉴기니 제2의 도시로, 인구는 약 10만명이다. 뉴기니 섬 동북부 모로베 주의 주도이다. 만의 가장 안쪽에 위치하며, 시가지는 서쪽의 마르캄 강 하구와 동쪽의 부수 강 하구 사이에 입지한다. 파푸아뉴기니 교통의 요지로, 서쪽 내륙의 마운트하겐[1] 및 해안의 마당으로 이어지는 하이랜드 고속도로와 남쪽 내륙의 와우로 이어지는 도로의 기점이다. 다만 수도인 포트모르즈비와는 오웬 스탠리 산맥 때문에 육상 교통이 부재하다. 열대기후를 감안하더라도 강수량이 매우 많은 곳으로, 1-3월을 제외하면 항상 월 강수량이 300mm가 넘는다.

뉴기니 섬 동부의 주요 항구로, 내륙 고원 지대에서 생산되는 목재와 커피 등을 수출한다. 시가지 서부에는 파푸아뉴기니 최대 규모의 단일 산업 단지와 컨테이너 부두가 있고, 도시 동쪽과 해안에도 공단들이 있다. 도심부에는 태평양 전쟁 중 라에-살라무아 전역의 연합군 전사자 2800인이 안장된 전몰자 묘지와 1949년 종자 연구를 위해 조성된 38 헥타르 규모의 라에 식물원 등의 볼거리가 있다. 북쪽 외곽에는 1965년에 세워진 파푸아뉴기니 공대 (Unitech)가 있는데, 오세아니아에서 호주뉴질랜드 외부의 유일한 공대이다. 서북쪽 40km 지점의 마르캄 강 북안에 라에 나드잡 공항이 있다.

2. 역사[편집]


1884년 독일령 뉴기니 (카이저-빌헬름슬란트)가 설립된 직후인 1886년 7월 12일, 독일의 루터교 선교사 요한 플리에를이 마을을 세우고 '아돌프 하벤' (Adolf Haven)이라 명명하였다.[2] 1차 세계대전오스트레일리아 당국은 독일어 지명들의 영어화를 추진하며 모르베 하버 (Morobe Harbour)라 개칭하였다. 한동안 군정이 이어지던 도시는 1921년 민간 행정에 이관되었고, 금광업자 세실 존 레비엔이 주장관 (키압)으로 부임하였다.

2.1. 골드러시[편집]


모르베 지역에서 금맥을 찾은 레비엔은 1923년 새해, 일대의 채굴권을 획득하여 기니 금 조합 (syndicate)을 창설하였다. 이후 와우 등지의 금광이 성황을 이루자, 기니 골드는 기니 항공으로 사명을 바꾸고 금과 인력의 원활한 운송을 위해 라에 해안에 비행장을 세웠다. (1927년 11월) 골드러시로 인해 급속히 성장한 라에는 1931년 3월, 뉴기니 경계 조례에 의거하여 도시 (town)로 선포되었다. 라에는 후일 비행장을 중심으로 설립되는 파푸아뉴기니 도시들의 선례였다. 또한 비행장 양쪽으로 시가지가 들어서 유럽계 이주민들은 동쪽, 원주민들은 서쪽 편에 주로 거주하였다. 라에 비행장과 부두에 모인 물자는 다시 항공편으로 와우 비행장으로 향하였고,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2.2. 태평양 전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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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라에 해변에 상륙하는 오스트레일리아 군

1937년 7월, 미국의 여성 비행가 어밀리아 에어하트가 세계 일주 도전 중 라에 비행장을 거친 것을 마지막으로 실종되며 도시는 미국 전역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같은해 라바울에서 타르부르 화산이 분화하자 호주 당국은 뉴기니 영토의 치소를 라에로 이전하기로 결정하였다. 다만 얼마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계획은 연기되었고, 1942년 3월 8일 일본군이 라에를 점령하였다. 그후 도시는 라바울, 살라무아와 함께 뉴기니 섬의 주요 일본군 거점 중 하나가 되었다. 그해 말엽, 코코다 트랙 전투와 부나-고나 전투로 인해 파푸아 반도에서 물러난 일본군은 철수로 인해 전방이 되어버린 라에-살라모아 지역만은 지켜내기 위해 (그를 위협할 수 있는) 내륙의 연합군 거점 와우를 점령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1943년 초엽 일본군의 와우 공격은 실패하였고, 역으로 와우에는 3천의 연합군이 증원되어 교두보로 자리매김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16척의 함대와 1백의 호위 항공기를 동원하여 1개 사단 7천의 증원군을 라에로 파견했는데, 일본군의 전술을 간파한 연합군이 300여 대의 항공기를 동원하여 12척[3]을 격침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비스마르크해 해전) 이로써 일본군은 3천의 전사자를 내었고, 생존 인원도 대부분 라바울로 회군하며 라에에 맨몸으로 당도한 증원 병력은 1천 2백에 불과하였다.[4] 이후로 라에-살라모아의 일본군은 소규모의 간헐적인 보급만을 받으며 버티며 후방의 마당과 도로 연결을 시도했으나, 그마저 실패한 후 1943년 4-9월 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일대에서 축출되었다.[5] 라에-살라무아 전역

2.3. 현대[편집]


라에 점령 당시 연합군이 상륙한 나잡 비행장은 이후 미국과 호주 공군의 기지로 활용되었고, 1977년 라에 비행장이 폐쇄되어 산업 단지에 병합된 후로는 라에 나잡 공항으로 개편되었다. 전후 복구가 이루어진 뒤에도 벌목과 농경 산업을 바탕으로 중소 도시에 불과하던 라에는 1965년 하이랜드 고속도로의 개통과 함께 내륙 고원 지대의 커피와 차를 수출할 항구로 개발되었다. 공단들이 들어서며 산업 도시로 변모한 라에는 1971년 지방 정부 구성 후 이듬해 도시로 선포되었다. 80, 90년대에는 철광석 수출항이 되어 더욱 성장하였다.

3. 시설 & 볼거리[편집]


파일:라에 호텔.jpg
  • 라에 국제 호텔
현지 전통 양식이 가미된 것이 특징이다

  • 라에 전몰자 묘지
연합군 전사자 및 일본의 수용소 사망자 2800인 안치. 그중 2인은 빅토리아 십자 훈장 수여자

  • 라에 식물원
호주 지배기에 세워졌고, 뉴기니 숲 연구 협회에서는 1500 ~ 2000 종의 식물 종자를 보관한다. 경내에 옛 비행기가 전시되어 있다.

  • 파푸아뉴기니 공대 (유니텍)
자매대학인 포트모르즈비의 파푸아뉴기니 대학교가 인문, 예술, 순수과학, 법학, 의학 전문이라면 유니텍은 기술과 응용과학을 전문으로 하고 있다. 파푸아뉴기니의 이과 계열 인재들이 배출되는 산실이다.

4. 여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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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푸아뉴기니 기술 대학교의 기숙사를 위성 사진으로 보면 모양이 하켄크로이츠와 닮았다..

2000년, 동티모르의 수도 딜리와 자매결연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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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커피와 부족 축제로 유명한 곳[2] 그가 속한 루터회 선교단은 이곳 외에도 미주의 미주리, 아이오와, 오하히오 및 호주 등에 루터교 공동체를 세운 바 있다[3] 수송선 8척 전부, 구축한 8척 중 4척[4] 항공기에 있어서 연합군과 일본군은 각각 6대를 잃어 비등했지만, 연합군은 더이상의 손실이 없었기에 명백한 일본의 대패였다[5] 이로써 라바울과 마당-웨왁은 점차 포위되었고, 1944년 들어 일본군 대본영의 절대방어선 집중과 함께 사실상 버려져 있다가 1944년과 1945년 점령되거나 항복하며 뉴기니 섬은 일본군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