랠프 본 윌리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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랠프 본 윌리엄스(Ralph Vaughan Williams, OM, 1872년 10월 12일~1958년 8월 26일)는 영국작곡가이다. 낭만주의 작곡가로서 홀스트와 함께 엘가의 대를 이었고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전반의 중요한 영국의 작곡가이자 교사이며, 저술가이자 지휘자였다. 그는 같은 시기의 영국 작곡가 중 가장 중요한 인물로서 20세기 영국 음악의 부흥 크게 이바지한 사람이다. 또한 낭만주의 음악의 마지막 작곡가라고도 할 수 있다.

1. 생애[편집]




본 윌리엄스는 1872년 10월 12일, 영국 서남부 글로스터셔(Gloucestershire)에서 태어났으나, 그는 런던 사람임을 자처했다. 그가 3세 나던 해인 1875년에 아버지 아서 본 윌리엄스(Arthur Vaughan Williams)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어머니의 가족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손에 의해 양육되었다. 아버지의 가계는 탁월한 법률가 집안이었으며, 어머니의 가계는 영국 도자기 산업의 아버지 조지아 웨지우드(Josiah Wedgwood)와 진화론을 주창한 찰스 다윈(Charles Darwin)과 연결되는 등 본 윌리엄스는 상당히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그는 6세 때 일찍부터 음악에 흥미를 보여 이모인 웨지우드(Wedgwood)로부터 처음으로 피아노와 통주저음 및 화성법을 배웠다. 이 무렵 그는 로팅던(Rottingdean)에 있는 예비학교에 다니면서 피아노 뿐 아니라 7세 때 바이올린오르간에도 친숙해지게 되었다. 그 후 14세 때 차터하우스(Charterhouse) 공립 학교에 들어가 학교 관현악단에서 비올라를 연주했으며, 다시 런던의 왕립 음악학교 (Royal College of Music, London)에서 2년, 그 후 케임프리지의 트리니티 대학에서 3년간 수학하여 학위를 받는다. 그 후 다시 왕립 음악학교에 가서 몇 년을 더 수학한다. 그 동안 그는 작곡을 페리(Parry), 우드(Wood), 그리고 스텐포드(Stanford) 등에게서 배운다.

본 윌리엄스는 학창 시절부터 작곡에 점점 더 열의를 보였으나, 진보가 더딘 편이라서 그를 가르쳤던 우드는 본 윌리엄스가 작곡가 되리라고는 믿지도 않았다. 심지어 이종사촌인 그웬 레이브라트(Gwen Raverat)는 그녀의 케임브리지 시절을 회상하면서 ‘그 어리석은 젊은 친구 랠프 본 윌리엄스는 그토록 희망이 없으리만치 못하면서도 음악을 계속해 나가려고 했다.’고 쓰고 있다. 나중에 본 윌리엄스는 자신도 ‘아마추어적 테그닉’ 밖에 가지지 못했음을 시인한 바 있다. 그리나 그가 젊은 시절에 그렇게 암중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의 능력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영국의 음악 풍토에 대한 불만과 그 자신의 길을 빨리 찾지 못했던 까닭이다. 그는 스스로 전문가적 기량을 길러야 했음 통감했기에 1897년에 베를린으로 가서 브루흐(Bruch)에게 사사받고, 이어 1908년에는 파리에서 라벨(Ravel)로부터 작곡과 관현악법을 배운다. 이 때 그는 창조적 구원을 외국 모델을 모방함이 아니라 자신이 태어나 자라온 영국의 여러 원천들을 사용하여 창조적으로 재생성시키는 데서 찾아야 함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영국의 민요와 엘리자벳 시대의 음악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어 음악적 시민의식이라는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켜 나간다. 이러한 흥미와 이상을 그는 왕립 음악학교 동창생이자 친구인 구스타브 홀스트(Gustav Holst)와 함께 추진하여 수많은 민요의 채집에 나선다. 홀스트와의 이렇게 맺어진 우정은 매우 특별한 것으로서 그 두 작곡가들은 서로의 작품을 서로 칭찬하고 비판해주면서 자신의 기법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교우 관계는 1934년 홀스트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본 윌리엄스는 9편의 교향곡과 다른 관현악 작품들, 가곡들, 오페라와 많은 합창곡들을 발표했다. 다양한 규모와 형식을 가지고 있는 본 윌리엄스의 음악은 민족적이고 세계적인 2가지 원천으로부터 꾸준히 유도되었다. 하나는 홀스트와의 우정을 지속하면서 채짐한 영국 민요와 성가이고, 다른 하나는 바흐, 헨델, 드뷔시와 라벨의 서구적 전통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의 음악의 근본적인 본질은 어느 유력한 한 작곡가의 영향으로부터 암시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심원한 깊이를 가진다. 그의 작품은 “작곡가는 스스로를 결코 닫지 말고 예술을 생각하며, 동시대의 사람들과 같이 살고 호흡하여 자신의 작품을 사회의 모든 삶의 표현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그의 말에 대한 본보기이다.

1940년부터 1906년까지 본 윌리엄스는 새 영어 찬송가집의 편집자로 활동했다. 이 때의 경험을 그는 “세계에서 최고의 작품들과 가까이 접촉한 2년 동안 많은 소나타와 푸가에서 받은 것보다 더 좋은 음악 교육을 받았다.” 고 쓰고 있다. 그는 스스로 6곡의 새곡을 작곡했으나, 그 말은 겸손하게도 쓰지 않고 있다. 성가집에서 편곡한 작품들, 찬양가 모음집, 그리고 옥스퍼드 캐롤집 등 그는 일생 동안 국민 음악에 대해 순수한 흥미를 명백히 보여준다. 그에 대한 다른 증거들은 레이트 힐(Leith Hill)음악제의 연례 행사에서 1909년부터 1953년까지 그가 지방 아마추어 가수들 및 연주가들에게 바흐와 다른 유명 작곡가들의 작품 공연을 지도하였다는 점 및 그동안에 베네딕트 등의 음악의 예로는 현악4중주 2곡, ‘악기들의 모든 결합’을 위해 쓴 ‘가계음악’(Household Music)과 3중 현악 합주를 위한 ‘합주 협주곡’등이 있다. 특별한 행사를 위해 쓴 작품들도 있는데, 1950년의 합창제를 위해 쓴 ‘사계절의 민요들’ 그리고 관현악과 16인의 솔로를 위한 ‘음악의 세레나데 (Serenade to Music)’등이 잇으며, 확성기와 소프라노 솔로 그리고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추수의 노래 (A song of Thanksgiving)' 및 기타 영화음악 등도 작곡한다.

본 월리엄스는 교향곡 9번을 1957년 11월에 완성하여, 그 이듬해인 1958년 4월 런던 로열 앨버트 홀에서 초연을 보고는 3개월 후 그해 8월에 세상을 떠났다.

1958년 5월 본 윌리엄스는 에드리안 홀드의 지휘로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레코드 교향곡 전집의 녹음의 즈음해 제9번을 제외한 전작품에 녹음을 감독했다. 수수께끼같은 교향곡 6번 마지막 세션에서, 그는 짦은 스케치가 연주될 때 홀드와 오케스트라에 '이 이상으로 진심이 와닸는다'라고 감사를 표했다. 레코드는 후에 LP음원으로 수록되었다. 그는 교향곡 9번의 첫 녹음에 참여할 예정이었으나 8월 26일 교향곡 9번 녹음 세션하기 전야(前夜)에 세상을 떠났고 홀드와 단원들은 이번 연주가 작곡자를 추모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시신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2. 작품 성향[편집]


왕립음악대학(RCM)에서 휴버트 패리찰스 스탠퍼드에게 배운 후 베를린에서 막스 브루흐에게 사사하였다.

그는 영국의 민요튜더 왕조의 교회음악에 관심을 보였으나 특히 민요에 깊은 애착을 품고 스스로 노퍽 지방에서 민요를 채집하였다. 3개의 노퍽 랩소디(1906-1907)로부터 전원교향곡(1922)에 이르는 일련의 작품은 이 민요에 쏠린 결과 생긴 것이었다. 본 윌리엄스는 대기만성형의 작곡가로 최초의 중요한 작품,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미지의 국토로〉가 발표된 것은 1907년, 35세 때였다. 이 스탠퍼드류의 고전주의에 물든 작품은 그의 존재를 일부의 음악애호가들에게 인식시켰지만 그는 더욱 연찬을 쌓기 위해 1908년 파리에서 라벨에게 8개월간의 개인교수를 받았다. 그 다음해에 발표된 가곡집 《웬로크의 봉우리에서》는 그의 독창성을 잘 보여준 작품이다.

그 후 교향곡 1번 〈바다교향곡〉(1910), 교향곡 2번 〈런던교향곡〉(1914)으로 세인의 주목을 끌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중엔 간호병 및 포병사관으로 프랑스에 종군하여 한동안 창작활동은 중단되었다. 전후 왕립음악대학 교수와 바흐 합창단의 지휘자로 임명되었으며 1922년 교향곡 3번 〈전원〉을 발표하여 작곡가로서 부동한 지위를 확립하였다.

만년에는 난청으로 괴로움을 겪었지만 최후의 10년간에는 4곡의 교향곡을 작곡하는 등 점점 정력적인 창작활동을 계속하여 원숙된 작품을 남겼다. 작품으로는 앞서 나온 것과 〈남극교향곡〉(제7번, 1953)을 포함한 9곡의 교향곡, 오페라 〈소몰이 휴우〉>, 〈사랑의 존 폴스타프〉, 〈탈리스의 주제로 된 환상곡〉, 〈피아노 협주곡〉,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콘체르토 아카데미곡〉, 〈미사곡 사단조〉, 오라토리오 〈성도(聖都)〉 등이 있다.

1935년 영국 왕실로부터 오더 오브 메리트(Order of Merit, OM)를 받았다.

랠프 본 윌리엄스는 근대 영국의 음악가 중에서 가장 영국적인 작곡가라고 일컬으며, 그의 명상적인 작풍은 웅대한 규모와 소박한 아름다움마저 지니고 있다고 평가된다.

2.1. 교향곡[편집]


* 교향곡 1번 라장조 “바다” (1909년 작곡,1923년 수정)
* 교향곡 2번 사장조 “런던” (1914년)
* 교향곡 3번 바장조 “전원”
* 교향곡 4번 바단조
* 교향곡 5번 라장조
* 교향곡 6번 마단조
* 교향곡 7번 “남극” (1953년)
* 교향곡 8번 라단조 (Symphony No.8 in D minor)
* 교향곡 9번 마단조 (Symphony No.9 in E minor)

3. 각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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