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벤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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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미국의 정치인. 제69대 미합중국 재무장관직, 미국 연방상원의원직을 지냈다.
1988년 미국 대선에서 마이클 두카키스의 러닝메이트로 민주당 부통령 후보로 나섰지만 패배했다.
2. 생애[편집]
2.1. 청년기[편집]
1921년 텍사스 주 미션 출신. 아버지는 덴마크계 미국인으로 원래 다코타 지역에 살았지만 흉작으로 농장을 버렸고 텍사스 주에서 귤 농장을 차려 크게 성공했다. 비록 귤 농장은 얼마 안가 망했지만 돈을 많이 모아놨기에 재기할 수 있었고 벤슨은 어릴 적 가난하게 살았지만 아버지 사업의 성공으로 텍사스의 명문대학인 텍사스대 오스틴 캠퍼스의 법학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1942년, 불과 21세에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변호사 자격증을 얻었으며, 2차 대전 동안에는 1944년 이탈리아 전선에서 B-24 폭격기를 조종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1] 총 35회동안 성공적인 폭격 임무를 수행해 우수 비행 훈장을 4번이나 수여받았다.
제대 후 고향에서 판사로 일하다가, 1948년 하원의원에 출마해 정계에 입문했다. 총 4번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샘 레이번 하원의장에게 직접 정치를 배운 레이번의 수제자였고 린든 B. 존슨의 영향도 간접적으로 받았다. 1955년 4선 임기 만료 이후에는 다시 법조계로 돌아갔다가, 1970년 상원의원 출마로 정계에 복귀한다.
2.2. 상원의원[편집]
1970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주요 상대는 같은 당의 랄프 야버러와, 6년만에 절치부심해 출마한 공화당의 조지 H. W. 부시였다. 랄프 야버러는 현직 상원의원이었는데 텍사스 주 정서에 안맞는 진보 정책을 추진해 인기가 없었고, 예비선거에서 벤슨은 야버러를 "전당대회 폭력의 후보" "버싱 정책[2] 의 지지자"로 묘사해 53% 대 47%로 야버러를 경선에서 밀어낸다. 본선에서 야버러의 지지자들 상당수가 벤슨에게 비호감을 가졌지만 54% 대 46%로 부시를 꺾고 당선되었다. 이때도 부시를 북동부[3] 에서 남부를 괴롭히기 위해 내려온 북동부 진보파에 카펫베거라고 공격했다.# 이 때문에 민주당 내 진보파와는 사이가 좋지 못했다.
벤슨은 보수주의 민주당원, 남부 민주당원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일원이 되었고 1976년 대선에서도 대권 주자로 주목받았다. 벤슨은 진지하게 출마하려고 하지는 않았고, 남부 대의원을 통제해 부통령 후보가 되길 더 원했다. 그러나 지미 카터가 남부 대의원을 휩쓸면서 벤슨의 시도는 물거품이 되었다. 이후에도 욕심은 있었는지 1984년 대선에서도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유력하게 고려되었지만 결국 부통령 후보직은 제럴딘 페라로에게 넘어갔다.
2.3. 부통령 후보 출마와 그 이후[편집]
1988년 대선에서는 마침내 기회를 부여잡았다. 마이클 두카키스가 벤슨을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낙점하며 진보적이고 젊은 북동부 대통령 후보와 중도적이고 노련한 남부 부통령 후보의 짝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공교롭게도, 상대 대선 후보는 18년 전 자신이 낙선시킨 조지 H. W. 부시였다. 로이드 벤슨은 마이클 두카키스에 비해 훨씬 주도면밀한 모습을 보였고, 부통령 후보 토론회에서는 댄 퀘일에게 상원의원님, 당신은 케네디가 아닙니다!라는 돌직구를 날리기도 했다.[4]
하지만 두카키스의 무능한 캠페인 때문에 두카키스-벤슨 조는 부시-퀘일 조에게 53 대 45로 참패한다. 심지어 벤슨의 고향이었던 텍사스에서도 56 대 43으로 두카키스가 밀렸기 때문에 홈스테이트 효과도 거의 얻지 못했다. 다만, 같은 날 치러진 상원의원 선거에서 벤슨 자신은 4선에 성공했다.[5][6]
1992년, 빌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클린턴은 가장 존경받는 남부 정치가였던 벤슨을 재무장관에 임명했다. 벤슨은 재무장관으로 재임하면서 NAFTA 조약을 체결하는 등의 굵직한 업적을 남겼고, 클린턴의 제3의 길 노선을 충실하게 구현해 1990년대의 경제 호황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 재무장관을 할 수는 없었고[7] 2년만인 1994년 재무장관 직에서 물러났다. 클린턴은 아쉬웠는지 벤슨을 국방장관으로도 임명하려 했으나 벤슨이 스스로 이를 고사했다.
이후 벤슨은 고향 텍사스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다가, 2006년 사망했다.
3. 선거 이력[편집]
4. 여담[편집]
- 마거릿 대처는 총리직 은퇴 후 한 토크쇼에서 가장 좋아하는 미국 민주당원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때 로이드 벤슨을 가장 좋아한다고 밝혔다. 대처 입장에서는 민주당원이었는데도 신자유주의를 유연하게 받아들여 제3의 길 노선 주창에 앞장선 벤슨에 호감이 간 모양.
- 그가 하원의원을 지낸 텍사스 15구는 멕시코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 히스패닉 인구가 많기 때문에(전체 인구의 약 82%가 히스패닉) 오랫동안 민주당의 텃밭이었지만[14] , 2022년 미국 중간선거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공화당 후보가 당선되는 이변이 일어났다. 텍사스 지역 언론도 이를 크게 다루며 히스패닉의 정치적 보수화가 일어난 상징적 결과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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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지 맥거번도 정확히 같은 보직(이탈리아 전선 B-24 폭격기 조종)이었지만 소속 부대가 달랐다. 맥거번은 제445포격단, 벤슨은 제449포격단 소속.[2] 흑백 학군 통합을 위해 흑인 학군의 아이들을 버스에 태워 백인 학군으로 통학시킨 강제적 인종통합 정책을 의미한다. 백인 중산층들에게 무척 인기가 없었던 정책이었다.[3] 조지 부시의 아버지인 프레스콧 부시가 코네티컷을 기반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조지 H. W. 부시 자신도 코네티컷에서 꽤 오래 살았지만 정유 사업을 하게 되어 텍사스로 이주했다. 여담으로 그 아들 조지 W. 부시도 1978년 하원의원 캠페인 당시 상대 민주당 후보에게 북동부 엘리트라고 공격받았다.[4] 자세한건 댄 퀘일 문서 참조. 댄 퀘일이 자신을 케네디에 빗대면서 나온 말이다.[5] 미국은 부통령과 상원의원으로 동시에 출마하는게 가능하다. 조 리버만, 조 바이든이 대표적 예시이다.[6] 참고로, 이 선거는 현재까지 민주당이 텍사스 상원의원 선거에서 승리한 마지막 선거이다. 벤슨의 사임으로 실시된 보궐선거에서 공화당 케이 베일리 허친슨(Kay Bailey Hutchison)이 압승했다.[7] 벤슨 자신도 클린턴의 재무장관직 제의를 받아들이면서 4년 임기를 채울 수 없을 것 같다고 미리 말해두었다.[8] 반대표가 1표 나왔다.[9] 전임자 밀턴 H. 웨스트 사망[단독] A B C 단독 입후보[10] 대통령 후보는 마이클 두카키스[11] 부통령 후보는 마이클 두카키스[12] 두카키스를 부통령으로, 벤슨을 대통령으로 만들고 싶었던 웨스트버지니아의 불충실한 선거인단 마거릿 리치(Margarette Leach)가 벤슨에 투표했다.[13] 1993 1.20 사임(재무장관 취임)[14] 존 낸스 가너의 지역구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