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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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파일:마니풀라 시스템.jpg

라틴어
manipula

1. 개요
2. 기원
3. 구조
4. 전투 방식
5. 쇠락



1. 개요[편집]



로마군이 기원전 4세기부터 가이우스 마리우스 시대 이전까지 체택한 전술 대형을 일컫는 용어. 역사가 폴리비오스가 이 대형에 대한 상세한 서술을 했기 때문에 '폴리비오스 시스템'으로도 일컬어진다.


2. 기원[편집]


마니풀라(manipula)는 '한 줌'이란 뜻의 라틴어 단어로, 소수의 인원이 한 곳에 모인 것을 의미한다. 일부 학자들은 로마군의 대표적인 군기 중 하나인 시그눔(Signum)에 조각이 있는 것을 근거로 삼아, "마누스(manus: 손)" 아래에 모인 병사들을 가리키는 용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초창기의 로마군은 로마에 소속된 부족들이 국왕이나 국왕의 대리인의 소집령에 따라 집결한 형태였다. 로마 공화국이 수립된 후에는 집정관의 소집령에 응했다. 그러다 전쟁 규모가 갈수록 커지고 뜻밖의 변수에 대처할 수 있는 조직력과 지휘 체계가 요구되면서, 부족 단위로 묶이던 로마군은 레기온(군단)으로 재편성되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로마군은 재산의 소유에 따라 6개 계급으로 분류되었다. 처음 3개 계급은 창과 방패, 전신 갑옷으로 무장한 호플리테스가 되었고, 4번째 계끕은 창과 투창만 무장했으며, 다섯 번째 계급은 물매로 무장했으며, 가장 가난한 여섯번째 계급은 병역이 완전히 면제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재산별로 분류된 로마군은 주변 라틴족과 에트루리아인들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대체로 승리를 거두었지만, 기원전 390년 알리아 전투에서 켈트 계열의 세노네스족에게 참패하는 바람에 로마 약탈을 초래했다. 그 후 다섯 차례나 독재관을 역임하며 주변 세력의 침략을 막고 로마를 재건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인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 휘하에서, 로마군은 재차 개편되었다.

알리아 전투 참패 요인은 무장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부대가 세노네스족의 공격 한 번에 제대로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는 바람에 6천 명의 호플리테스들이 순식간에 포위된 것에 있었다. 이를 보완하려면 완전 무장을 갖추지 못한 이들이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을 정도로 체계적인 조직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비슷한 무장을 갖춘 이들끼리 뭉친 부대 별로 군대가 새롭게 조직되었다. 그 후 삼니움 전쟁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변화한 끝에 지중해 세계에서 매우 독특한 전술 대형인 마니풀라 시스템이 탄생했다.


3. 구조[편집]


마니풀라 시기, 로마군에 갓 입대한 장병은 10명의 로마 병사와 2명의 종군 하인 또는 노예로 구성된 콘투베르니움(Contubernium)에 소속되었다. 이들은 전투 중에 서로를 의지하고 경비 임무를함께 수행하며, 한 사람이 죽으면 다른 이들이 가족에게 연락해 장례를 치렀다. 이들의 리더는 데카누스(Decanus)로, 여덟 장병 중에서 전투 경험이 가장 많거나 통솔력이 뛰어나다는 인정을 받은 이가 동료들의 추천을 통해 선출되었다. 데카누스는 동료 장병들이 행군 시 대열을 유지하도록 감독했고, 대열을 이탈한 자에게 징계를 내렸다.

켄투리아(Centuria)는 10개의 콘투베르니움을 묶은 집단으로, 로마군에서 가장 기본적인 전술 부대였다. 이들은 각자만의 군기을 지니고 나름의 전통을 유지했으며, 다른 켄투리아들과 경쟁했다. 각 켄투리아의 지휘권은 군단장의 지명으로 선임된 켄투리오가 맡았다. 이들은 켄투리아 내 병사들의 생사 여부를 자의로 결정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권위를 가졌고, 이를 바탕으로 켄투리아의 훈련과 규율을 책임졌고 전투 시 켄투리아의 작전을 총지휘했다. 또한 오프티오(Optio, 부 켄투리오)는 전투 시 켄투리아의 후미에 서서 누구도 도망가지 못하도록 막았고, 켄투리오가 전사할 경우 지휘권을 대신 맡았다.

마니풀라 시기, 켄투리아는 '소규모 집단'이라는 의미의 마니플(Maniple)로도 일컬어졌으며, 비슷한 재산을 가진 마니풀끼리 뭉쳐서 벨리테스, 하스타티, 프린키페스, 트리아리를 결성했다. 벨리테스는 로마군 내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이 모인 켄투리아 10개 부대 1200명으로 편성된 부대로, 갑옷은 전혀 입지 않았지만 여러 개의 필룸[1]과 직경 약 90cm(3피트)의 원형 방패 파르마(Parma)를 갖췄으며, 허리에 글라디우스를 찼고, 종종 늑대, 곰 등 용맹과 힘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짐승의 가죽을 입었다.

하스타티는 벨리테스보다는 부유하지만 프린키페스, 트리아리보다 가난한 이들이 모인 켄투리아 10개 부대 1200명으로 편성된 부대였다. 이들은 본래 약 2.4m(8피트)의 인 하스타(hasta)로 무장했지만, 나중에 주무기를 글라디우스로 변경했다. 이들은 한 손에 길이 1~1.2m, 폭 60~80cm의 큰 사각형 방패인 스쿠툼을 한 손에 붙잡고 다른 손으로 글라디우스를 잡고 적군에 맞서 근접전을 벌였다. 또한 2~3개의 필룸을 별도로 챙겼으며, 위쪽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반구형 모양의 몬테포르티노(Montefortino) 또는 둥근 형태의 카시스(Cassis) 투구를 착용했다. 이들은 가벼운 갑옷을 착용했는데,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심장 보호대"로 일컬어지는 사각형 모양의 작은 흉갑이었다.

프린키페스는 로마군에서 두 번째로 부유한 병사들끼리 뭉친 켄투리아 10개 부대 1200명으로 편성된 부대였다. 이들은 하스타티처럼 글라디우스와 스쿠툼을 갖췄지만, 가슴을 보호하는 작은 흉갑만 챙겨입은 하스타티와는 달리 상반신 전체를 보호할 수 있는 로리카(로리카 하마타(Lorica Hamata): 사슬 갑옷의 일종)를 주로 착용했다.

트리아리는 최소 15년을 복무한 고참병들이 배속된 부대로, 켄투리아 60명이 10개씩 모인 600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하스타티, 프린키페스와는 달리 하스타를 계속 사용했으며, 기본 무장 수준은 프린키페스와 비슷했지만 좀더 화려한 장식의 깃털을 투구 상단에 꽂고 보다 질이 좋은 방패와 갑옷을 착용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들 중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거나 그동안 받은 급료를 잘 쌓아둔 이들은 그리스 호플리테스가 입은 전신 청동 갑옷을 입었고 방패 역시 프린키페스가 스쿠툼을 사용한 것과는 달리 그리스식 둥근 방패인 라운드 실드를 사용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가장 부유한 시민은 에퀴테스로 명명된 기병대에 배속되었다. 30명의 켄투리아 10개 부대가 뭉친 300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초창기엔 갑옷을 입지 않았지만 포에니 전쟁 무렵에는 사슬 갑옷과 투구를 착용했고, 긴 창과 작은 방패를 갖췄으며, 허리에는 글라디우스를 차고 다녔다. 3명의 데쿠리오네(Decurione)가 이 기병대의 지휘관 역할을 맡았다.

로마군은 그들과 같은 라틴족 도시들로 이루어진 라틴 동맹의 동맹시 또는 속국들에게서 보조병을 징집하여 동원했다. 로마 군단병의 좌우 측면에 배치되어 날개(Alae)라고 불린 이 동맹시 보병들은 로마군 보병과 비슷하거나 약간 더 많았고, 기병대 규모는 로마 시민 기병대의 3배에 달했다. 동맹시 보병의 1/5, 기병의 1/3은 정예 부대(Extraordinarii)로 따로 편성되어 선봉이나 집정관의 호위 등 중책을 맡기도 했다. 로마는 보조병을 제공받는 대가로 동맹시에게는 외교권을 제외한 완전한 정치적 자치를 부여하였으며, 세금 역시 강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로마는 그들에게 군사적인 보호를 제공하였다.

한 개 군단은 벨리테스 1,200명, 하스타티 1,200명, 프린키페스 1,200명, 트리아리 600명, 에퀴테스 300명에 비슷하거나 약간 더 많은 동맹군 보병과 900명의 동맹군 기병을 합친 9,000 ~ 10,00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집정관 한 명이 2개 군단을 이끌었고 6명의 트리부누스 밀리툼이 한 군단의 지휘권을 2개월 당 2명씩 돌아가면서 맡았다. 두 집정관은 각자 작전 지역을 배정받고 별도로 작전을 수행했다. 두 집정관이 힘을 합쳐 외적을 상대할 경우, 전투가 끝날 때까지 전체 군대의 지휘권을 매일 돌아가면서 맡았다.


4. 전투 방식[편집]


로마군은 초창기에는 고대 그리스의 기본적인 전투 대형이며 에트루리아인들도 자주 사용하는 팔랑크스를 기본 전술로 삼았다. 그러나 삼니움 전쟁을 치르면서 산악 지대에서 할거하며 유격전으로 일관하는 삼니움인들을 상대하기에는 움직임이 둔하고 험한 지형에서 제대로 된 전투력을 발휘하기 힘든 팔랑크스로는 어렵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로마군은 창 대신 글라디우스를 기본 무기로 삼고 보다 유연한 조직 체계를 갖추기 위해 팔랑크스를 버렸다.

전투가 임박했을 때, 로마군은 퀸쿤스(quincunx), 즉 체크무늬 형태의 대열을 형성했다. 각 부대의 대열 사이에 틈을 일부러 두고, 뒤에 배치된 아군과의 교대를 원할히 하도록 했다. 최선두에는 경무장 보병인 벨리테스가 섰다. 이들은 전투 초기에 최전선에 나가서 가까이 오는 적을 향해 필룸을 퍼부어 견제하면서 아군이 전투 대열을 완전히 갖출 시간을 벌었다. 그러다 적이 가까이 오면 중보병들에게 자리를 넘기고 물러난 후 다트로 아군을 지원하고 전열이 뚫릴 기미가 보이면 메꾸었다. 그러면서도 부상당한 아군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역할도 수행했으며, 적의 위치를 파악하고 견제하는 척후병으로서의 역할도 맡았다.

중무장한 군단병들은 벨리테스 뒤에서 3개 대열을 편성했다. 첫번째 대열에는 하스타티가 편성되었다. 이들은 벨리테스가 적을 향해 필룸을 다 날리고 물러난 후 적을 향해 천천히 진군하다가 적군이 충분히 접근한 순간 필룸을 한꺼번에 날린 뒤 요란한 함성을 지르며 돌격하여 근접전을 치렀다. 이들이 적의 대열을 돌파하는 데 실패한다면 프린키페스와 교대하여 후방에서 휴식을 취했다. 두 번째 대열에 선 프린키페스는 군단병에 큰 비중을 둔 로마군 내에서도 핵심 전력으로 꼽을 수 있는 부대로, 장시간 동안 근접전을 치러서 승부를 내는 역할을 맡았다.

3번째 대열에 선 트리아리는 프린키페스가 적을 돌파하는 데 실패하면 마지막으로 나서서 적과 맞붙어서 날이 어두워져서 전투를 더 이상 치를 수 없을 때까지 근접전을 벌였다. 또한 아군이 적에게 압도되어 퇴각해야 할 경우, 최후까지 전장에 남아서 아군이 후퇴를 완료할 때까지 버텼다. 로마인들은 최악의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을 암시할 때 "rem ad Triarios redisse(트리아리에 이르고 말았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트리아리까지 전투가 이어진 적은 드물었고, 때로는 트리아리를 전투에 투입하지 않고 숙영지를 경비하는 역할을 맡기기도 했다. 이렇듯 보병대가 적과 교전하는 동안 기병대는 양측면을 맡아서 적의 측면을 돌파하거나 적의 측면 공격을 막아내는 역할을 수행했다. 우익은 로마 기병으로 구성되었고, 좌익은 동맹군 기병으로 구성되었는데, 좌익의 기병이 3배 더 많았다.

이러한 전투 순서는 대부분 그대로 이뤄졌지만,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특별한 전술을 사용했다. 바그라다스 전투에서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가 적과 전면에서 맞붙고 있을 때, 아군 기병대가 적 보병대의 측면을 공격했으나 격퇴당하자 후방에 있는 트리아리를 적 측면으로 이동시켜 공세를 퍼붓게 했다. 그리고 자마 전투한니발 바르카가 이끄는 정예 보병대가 중앙을 파고 들어와서 로마 보병대를 포위 섬멸하려 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트리아리와 프린키페스를 중앙에, 하스타티를 측면에 두고 전투 대열을 긴 줄로 형성해 적이 쉽사리 포위하지 못하게 했다. 두 전술 모두 큰 성과를 거두면서, 스키피오는 카르타고군을 무너뜨렸다.


5. 쇠락[편집]


마니풀라 시스템은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 전역을 평정하는 것을 넘어 지중해 세계의 지배자가 되는 데 절대적으로 공헌했다. 이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남긴 폴리비오스는 로마가 지중해의 주인이 된 것은 대부분의 지형과 상황에 적응할 수 있는 독특한 전투 방식을 고안했기 때문이라며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포에니 전쟁, 마케도니아 전쟁, 셀레우코스 전쟁, 루시타니아 전쟁, 누만티아 전쟁, 유구르타 전쟁 등 수많은 전쟁을 연이어 치르면서, 이 시스템은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이 한창이던 기원전 213년, 원로원은 인력 부족이 극심한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군대에 입대 가능한 재산 요구 사항을 11,000 아스에서 4,000아스로 삭감했다. 여기에 자유를 주겠다는 조건으로 노예를 징집했으며, 기존에는 징집되지 않던 무산자들 역시 강제로 복무시키기도 했다. 기원전 123년에는 이베리아 전쟁이 갈수록 심해지면서 인력이 부족해지자, 군 복무에 필요한 재산 요구 사항을 4,000아스에서 1,500아스로 재차 삭감했다.

이렇듯 기존에는 징집 대상이 아니었던 이들이 인력 부족으로 인해 꾸준히 유입되면서, 로마군의 무장 상태와 전투력이 갈수록 약화되었다. 또한 하스타티, 프린키페스, 트리아리 사이의 구분이 갈수록 모호해져서, 나중에는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없어졌고 부대원들간의 단합력도 떨어졌다. 이에 군 사령관들은 로마군 조직 체계를 개편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통설에 따르면, 기원전 107년 가이우스 마리우스군제개혁을 하면서 하스타티-프린키페스-트리아리로 구성된 마니풀라르 시스템을 6개의 켄투리아로 구성된 코호르스(cohors)를 중심으로 하는 시스템으로 개편했다고 한다. 이는 문헌 기록에서 마리우스 등장 이후로 히스타티, 프린키페스, 트리아리 등이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데서 비롯된 주장이지만,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마리우스가 그런 개혁을 주도했다고 보기에는 증거가 없다며 지극히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코호르스는 폴리비오스제2차 포에니 전쟁을 다룰 때 이미 언급되었으며, 이후 로마가 히스파니아를 정벌하는 과정에서 치른 전쟁에 관한 기록에서 자주 등장했다. 그래서 학자들은 마리우스가 군제 개혁을 단행했다는 시기 이전에 마니풀라르 시스템이 코흐르스 시스템으로 대체되었다고 추정한다.

한편 벨리테스는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기원전 107~101년 이후에도 존속했지만, 로마가 지중해 전역에 영향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여러 속주로부터 우수한 경보병들을 보조병으로 끌어들일 수 있게 되면서 입지가 점차 줄어들다가 연이은 내전과 로마 제국의 출범 과정에서 속주민으로 구성된 보조병 부대로 완전히 대체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에퀴테스는 기존의 귀족으로부터 기병 전력을 조달하는 방식에 한계를 느낀 로마군 수뇌부가 켈트족, 게르만 족 등 이민족 부대 전체를 고용하는 방식으로 기병 전력을 조달하면서 전력으로서의 효용성을 상실하고 '기사계급'을 뜻하는 명칭으로 굳어졌으며, 라틴 동맹시 기병대의 중요성 또한 서서히 감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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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벨레스 한 명 당 7개의 필룸을 가졌다고 밝혔고, 풍자 시인 가이우스 루킬리우스는 5개의 필룸을 갖췄다고 서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