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우스 막시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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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로마 제국의 최전성기였던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혼란스러웠던 내전인 다섯 황제의 해, 내전을 종식하고 제국을 통일한 세베루스 왕조의 원로원 의원이자 전기 작가였다.
본명은 루키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 페르페투우스 아우렐리아누스로, 일반적으로는 마리우스 막시무스로 유명하다. 따라서 비슷한 이름을 가진 아들은 보통 '루키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로 통칭된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를 도와 로마 진군을 단행한 왕조의 개국공신으로 원로원의 최고 실세였으며, 세베루스 왕조 시대 내내 그 위세가 대단했던 권세가였다. 그렇지만 보통은 아내의 오빠인 디오 카시우스와 마찬가지로 역사가 및 전기 작가로 유명하다.
서기 4세기 경에 저술된 악명 높은 위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의 기반이 된 사료인 《카이사리에스》로 알려진, 마리우스 막시무스의 일기를 저술한 사람이다.
2. 생애[편집]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비문을 통해, 세베루스 왕조의 통치하에서 가장 성공하여 죽을 때까지 권세를 누린 원로원 의원으로 유명하다. 이 사람처럼 숨을 거둘 때까지 온전히 경력을 쌓은 이는 거의 없을 정도이다. 생애 동안 총 2번의 집정관과 로마 시장격인 수도 장관을 역임했던 자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카라칼라와 게타, 엘라가발루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의 4대와 율리아 돔나,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율리아 마마이아로 이어진 시리아 에메사의 여제들까지 모두 이 사람의 친구들이었다. 또한 마리우스 막시무스는 동시대의 역사가이자 원로원 동료였던 디오 카시우스와는 일찍부터 친구이기도 했다.
비문과 여러 증거를 통해 전체 이름이 루키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 페르페투우스 아우렐리아누스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형제는 루키우스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가 되고, 조카는 세베루스 왕조가 무너진 뒤, 서기 237년도 정규 집정관직에 오른 루키우스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가 된다.
성씨인 '마리우스'에서 드러나듯이, 공화정 말기의 명장이었던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휘하 퇴역병들이 정착한 푸닉(북아프리카) 지방 출신으로, 본래 이탈리아 혈통의 평민이었다. 즉, '신참자'(노부스 호모)로 귀족까지 오른 케이스였다. 다만, 아버지가 갈리아에서 생애의 대부분을 살았고, 이 사람 역시 본적만 푸닉 지방이고, 아주 어릴 때는 갈리아에서 자란 까닭에 이탈리아 혈통의 푸닉 이주민이면서도 갈리아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 루키우스 마리우스 페르메투우스는 갈리아 지방에서 근무한 기사계급 출신의 검사로, 원로원 의원이 되지는 못했으나, 명망이 높고 모범적인 인격자였다. 그는 두 아들인 마리우스 막시무스와 루키우스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가 신참자로서 원로원에 입성하는데 필요한 여러 기반을 마련해줬다. 따라서 선대부터 그 재력이 상당했고, 부모의 노력과 좋은 평판은 마리우스 막시무스가 원로원에 들어가는데 큰 힘이 되었다.
대략 서기 160년 경 푸닉 지방 중 아프리카 속주 혹은 트리폴리타니아 속주의 퇴역병 정착도시에서 태어나, 일찍이 아버지가 근무한 갈리아에서 성장했다. 그러다가 대개의 기사계급 출신 자제들처럼 본국 이탈리아로 이주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치세 동안 취해진 조치로서, 고향 속주에는 부임할 수 없는 상피제가 시행되었던 것을 볼 때 이 사람의 경력상, 부임지가 아닌 트리폴리타니아 속주 출신이 유력한 것으로 추정된다.
마리우스 막시무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절 제10군단 프레텐시스를 시작으로, 제3군단 이탈리카 등 서방 주둔 로마군에서 대대장으로 복무했다. 이후 이 경력을 살려 178년~180년 이후 로마 성벽 바깥의 로마 가도를 관리하는 관리를 시작으로 명예로운 경력을 위한 준비를 했다. 이는 그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때 복무한 군단에서 지휘관을 지냈고, 판노니아와 달마티아에서 총독 등을 지낸 카시우스 아프로니우스의 사위가 되면서 받은 도움이 컸다.
아내는 카시우스 아프로니우스의 딸이었던 카시아 마르키아나였는데, 그녀의 오빠가 '디오 카시우스'로 유명한 루키우스 카시우스 디오 코케이아누스였다. 마리우스 막시무스는 카시아 마르키아나와의 사이에서 소 마리우스 막시무스와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라는 이름의 두 아들을 뒀다.
비문에 따르면 서기 182년과 183년 경, 호민관에 지명된 이후 '명예로운 경력'을 밞아 본격적인 정치가의 길에 들어섰다. 이는 대개의 신참자들이 밞은 방법인데, 그는 콤모두스의 추천과 후원을 받았다. 콤모두스는 그를 원로원 의원에 임명하면서, 곧바로 법무관에 추천하여 발탁했다. 이후 막시무스는 서기 190년 경, 라티나 가도를 담당한 감독관을 거쳐 총독 임무를 수행했다.
서기 193년, 마리우스 막시무스와 동향 출신으로 상 판노니아의 총독이자 도나우(다뉴브, 다누비우스) 강 방어선 사령관이었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부하 병사들의 지지 선언을 내세워 황제를 자처했다. 이때 마리우스 막시무스는 모이시아에 주둔 중인 제1군단 이탈리카의 군단장으로 있었다. 그는 세베루스의 형이었던 셉티미우스 게타 등과 함께, 휘하 군대를 이끌고 세베루스 지지 선언을 한 후, 다섯 황제의 해 내전에 뛰어든 다음 세베루스의 로마 진군에 참여하여 그의 로마 및 이탈리아 반도 장악에 힘을 보태었다. 이후 페스켄니우스 니게르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사이의 내전에 뛰어들어, 193년과 196년 사이에 벌어진 모이시아 전투와 비잔티움 전투를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
이런 공로로 그는 모이시아 일대의 사령관이 되었고, 이때부터 세베루스 황제를 도와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와의 일전을 직접 담당했다. 그래서 막시무스는 루그두눔 전투 당시, 세베루스 황제를 따라 전쟁을 수행했는데 이때 그는 갈리아 벨기카 총독으로 있으면서 클로디우스 알비누스군을 견제하고, 격파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따라서 세베루스는 서기 199년까지 마리우스 막시무스에게 갈리아 벨기카의 총독직과 라인(레누스) 강 하류 일대의 군권을 맡겼고, 나중에는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속주의 총독직을 줄 정도로 그를 신임했다.
이 직책을 역임하는 동안, 황제의 추천으로 집정관에 처음 취임했고, 이때 귀족의 지위까지 하사받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최측근으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하여 집정관 임기를 맡은 뒤인 서기 205년부터 3년 동안은 시리아 코일레 속주의 총독으로 재임했고, 213~218년까지는 아시아 속주 총독, 아프리카 속주 총독을 모두 거쳤는데 원로원에서 제비뽑기를 한다고 해도, 세베루스 왕조 아래에서는 거진 황제의 측근들이 원하는 알짜배기 자리를 독점했기 때문에 그 권세가 대단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황제 관할 속주 및 원로원 관할 속주의 요직을 모두 거치면서 아시아와 아프리카 속주 총독에 연이어 지명되었다. 이런 식으로 임지로 떠나, 정상적으로 임기를 채운 것은 처음이었다. 더욱이 최초의 비(非) 황족 전직 집정관이 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로마인들의 상식상, 특정 인물이 2년 연속 아시아 속주 총독을 하면서 아나톨리아와 시리아 전체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고, 아프리카 속주 총독을 하면서 푸닉 전체를 좌지우지했던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고 한다. 어느 정도로 파격적이었는지, 과거 황족들 중 차기 황제로 낙점된 이들도 하지 못한 전례였다고. 그래서 이 경력은 마리우스 막시무스가 세베루스 왕조 아래에서 가장 성공했던 인물임이 단번에 드러난다는 증거로 단골처럼 언급되고 있다.
이런 성공과 위상 때문에, 적들이 많을 법도 했는데 알고 보면 적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친구이자 아내의 오빠인 디오 카시우스만 하더라도, 귀족적이고 냉소적인 성격 때문에 프라이토리아니 장교와 병사들이
는 이야기가 나와서, 율리아 마마이아와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가 디오에게 은퇴 종용을 했던 것과는 대비되는 모습이다."저 냉소적인 인간이 두 번째 집정관이 되면, 죽여버리겠다."
이는 마리우스 막시무스가 권세가답게 눈치가 빠르고, 자존심이 강한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호사가였으며 인간관계가 두루 원만했던 것이 컸다. 오죽하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장남이었던 당시의 공동황제 카라칼라 역시 그와 대화를 나눈 뒤, 견제 대신 그를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로 따르며 큰 존경을 표시했다. 이는 10대 초반 이후, 잔혹하고 매우 비열했던 카라칼라의 성미와 행보상 의외일 정도인데, 카라칼라는 동생 게타를 제 손으로 죽인 이후에도 마리우스 막시무스를 매우 존경하여 그의 의견이라면 무조건 따랐다. 이는 영악한 여걸로 평가된 시리아 출신의 여제들도 비슷해, 막시무스는 정적이 많이 없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그는 친구 이상의 관계를 맺은 카라칼라 황제가 암살당하고, 율리아 돔나 태후가 자결한 이후, 마크리누스가 황제로 즉위한 뒤에 위기에 처할 법도 했지만 몰락은 커녕 계속 승승장구했다. 마크리누스와 반(反) 카라칼라 진영의 원로원은 마리우스 막시무스에게 비상사태를 책임질 중책을 내려, 프라이펙투스 우르비(수도 장관) 직을 손에 쥐어준 뒤 도움까지 청했다.
이렇듯, 막시무스는 세베루스 왕조가 최대의 위기에 처한 순간에도 큰 권력을 누렸다. 그러다가 율리아 마이사가 곧 반격해, 세베루스 왕조를 부활시켰는데, 이때도 그는 신임과 영향력을 잃지 않았다. 되려 율리아 마이사와 그녀의 두 딸들, 즉 시리아 여제들은 그에게 계속 조언을 구하며 그를 옆에 두려고 했다. 그렇지만 막시무스는 친구인 디오 카시우스와 함께 엘라가발루스 황제에게 크게 실망하여 어떤 직책도 맡지 않았고, 이후에도 율리아 마이사에게 꼭 해야 될 조언을 할 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율리아 마이사와 율리아 마마이아 모녀는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새 황제로 즉위한 뒤, 마리우스 막시무스를 계속 옆에 두고자 서기 223년 공동 집정관에 루키우스 로시키우스 아일리아누스 파쿨루스 살비우스 율리아누스와 막시무스를 추천하여 그에게 생애 두 번째의 집정관직을 내렸다. 하지만 막시무스는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임기를 채울 뿐 정사에 깊이 끼어들지는 않았다. 되려 그는 몇 년 뒤, 본인과 비슷하게 생애 두 번째 집정관직에 오르게 될 친구 디오 카시우스와 마찬가지로 이 경력 이후 다시는 별다른 직책을 맡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후에도 권세는 대단해서 그의 아들이었던 루키우스 마리우스 막시무스가 서기 232년 집정관에 올랐고, 세베루스 왕조가 무너진 뒤엔 그의 또 다른 아들인 마리우스 페르페투우스가 정규 집정관이 되었다.
두 번째 집정관직을 마친 뒤, 마라우스 막시무스는 수도 로마와 고향을 오가며 살다가 대략 230년대 후반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3. 《카이사리에스》[편집]
마리우스 막시무스는 디오 카시우스와 마찬가지로, 당대 원로원의 최고 권세가였음에도, 회고록과 역사를 결합한 책을 저술해 남겼다. 바로 12명의 황제들의 일대기를 기술한 《카이사리에스》이다. 다만 그는 그리스어로 적은 디오와는 달리, 고향인 푸닉과 실질적인 고향인 갈리아의 모어인 라틴어로 이 책을 저술했다.
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친구이자 형님인 디오 카시우스와 마찬가지로 정치 경력을 끝마칠 무렵 이 책을 지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의 회고록과 일기를 겸한 《카이사리에스》는 서기 4세기 후반까지 동시대, 그리고 후대의 로마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어느 정도로 인기를 끌었는지《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역시 하드리아누스 황제부터 마리우스 막시무스가 경험한 세베루스 왕조의 역대 황제들까지의 기록은 마리우스 막시무스의 저술을 제1차 사료로 삼아 26번이나 참고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이 귀중한 책은 필사본이 아예 남아 있지 않다. 그렇지만 마리우스 막시무스의 책은 여러 번 회자되었고, 인용되어 간접적으로나마 저술의 스타일 및 몇 가지 기록은 예측할 수 있다고 한다.
《카이사리에스》는 네르바 황제부터 엘라가발루스 황제까지 총 12명의 황제를 다뤘고, 이중 7명의 황제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을 토대로 가쉽거리도 많이 붙여서 적었다고 한다. 즉, 친구인 디오 카시우스와 마찬가지로 본인이 경험한 황제들에 관해선 그들의 깊은 내면까지도 묘사가 잘 된 셈이었다.
하지만 이 사람의 저서는 그 내용에 있어, 경박하고 출처가 어디인지 모를 홍등가와 길거리의 소문까지 거침없이 적어 놓아 당대부터 호사가들의 가쉽거리 모음집에 유력한 원로원 의원 실세의 경험담을 결합한 형식으로 평가받았다. 서구권에서 혹평하는 이들의 경우, 서기 2세기 경의 역사가이자 변호사이며 호사가였던 수에토니우스의 대표적인 저서인 《12인의 황제들》과 매우 흡사하고 허구의 이야기가 사실로 많이 적혀, 수에토니우스가 되살아나 다시 쓴 착각을 들게 한다는 악평을 쏟아내기도 한다.
이는 이 책을 직접 읽어 본 로마인들의 평가도 비슷했다. 그래서 그 평이 심히 좋지 않고 호불호가 분명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귀족적이고 냉소적이긴 하나, 역사가의 입장과 정치인의 입장에서 냉철하게 분석한 서술이 많은 디오 카시우스와는 달리, 마리우스 막시무스의 책에는 "황제의 사생활이 이랬다", "그 황제는 어떤 면에서 구린 구석이 많았다"는 식의 기록이 많아 영양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기술은 이 사람의 성격이 잘난 척이 심하면서도 호사가이고, 가십거리를 좋아한 특징과 특유의 처세술로 후손들이 피해를 입으면 안 되는 속사정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마라우스 막시무스가 이런 식으로 기술한 진짜 이유는, 그가 같은 푸닉 출신인 수에토니우스의 저서를 참조했고, 그 스타일이 문제가 많다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역사서의 정석으로 생각한 것이 컸다. 그렇지만 디오 카시우스의 경우, 당대를 휘어잡은 대정치가의 명성 그대로 아우구스투스 황제부터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까지의 역사적인 사건들을 냉철하게 분석한 면이 많아 막시무스의 책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는 혹평을 듣고 있다. 심할 경우에는 마리우스 막시무스에 대한 능력까지도 종종 의문을 표시하는 이들까지 나오고 있다. 어떻게 보면 그 저술의 평가가 안 좋아, 본래의 경력과 공적까지 폄하된 셈이다.
어쨌든 후대의 로마인 역사가들은 이 책에 관해 좋은 평을 내리지 않았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마리우스 막시무스와 《카이사리에스》에 관해 혹평을 날렸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대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정통성을 위해 대대적인 조작까지 감행했던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의 황실 전기 작가들 역시, 이 책을 26번이나 직접 인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절에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때 발행된 책의 오류를 잡는 동안 마르켈리아누스처럼 이 책에 관해서
고 비판을 날리다가, 참다 못해 점잖은 표현으로 의문까지 표시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이런 이유를 근거로, 마리우스 막시무스의 저서가 인기를 끌었음에도, 동로마 제국 시대 당시 필사본과 언급된 문장을 많이 남긴 디오 카시우스의 《로마사》와는 달리 남아있지 않게 된 것으로 추정한다."추잡하고 저열하다."
그렇지만 이런 비방에도 불구하고,《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어찌 되었던 간에, 마리우스 막시무스의 저서를 제1차 사료로 삼았고, 그가 저술 방법으로 활용한 무분별한 짜깁기나 폄하한 기록을 자신들의 1차 목적인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정통성 확보와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정당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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