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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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박명언.jpg
성명
박명언(朴明彦)

산남(山南)
본관
밀양 박씨
생몰
1873년 6월 16일 ~ 1948년 8월 27일
출생지
경상도 인동도호부
(현 경상북도 구미시 진평동)[1]
사망지
경상북도 칠곡군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박명언은 1873년 6월 16일 경상도 인동도호부(현 경상북도 구미시 진평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향교에서 자제들에게 유학을 가르치던 중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발발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칠곡군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심했다. 그는 이상백[2]을 중심으로 이영식(李永植)·이내성 등 동지 수명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3월 7일에 대구 계성학교 학생 이영식이 독립선언서 20매를 가지고 오자 그와 상의하고 태극기를 제작했다. 이후 박명언은 동리에 독립선언서를 내붙였고 3월 12일 오후 8시 뒷산 마루에서 독립만세를 부른다는 사실을 동리 사람들에게 알렸다.

3월 12일 오후 8시, 동민들은 뒷산 기슭으로 모였는데 그 숫자가 300명에 달했다. 그를 비롯한 주동자들은 그들을 이끌고 뒷산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밤이 깊도록 만세를 외치다 급히 출동한 경찰과 헌병대에 의해 주동인물 8명이 검거되었고 나머지는 강제 해산되었다. 하지만 박명언은 체포를 모면했고, 3월 14일 오후 9시경에 2백명의 동민과 함께 뒷산 기슭에서 다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 일로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19년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0년 3월 25일에 석방된 그는 1922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한국독립당에 가입해 1922년부터 1929년까지 한국독립당 행정위원을 지냈다. 또한 1931년부터 1932년까지 한국독립당 상임고문 직을 지내다가 사퇴한 후 1934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8.15 광복 후 한국독립당에 복당하여 1946년부터 1947년까지 1년간 한국독립당 대표최고위원을 지내다가 사퇴한 후 구미시에서 여생을 보내다 1948년 8월 2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박명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3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인근의 옥계동과 함께 밀양 박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김성윤·박근술·박명출·박봉술·박삼봉·박순석·이내성·이범성·이상백·이영래·이윤약도 이 마을 출신이다.[2] 저항시인 이상화의 동생인 역사학자 이상백과는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