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만(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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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박영만.jpg
성명
박영만(朴英晩)

화계(花溪)
본관
밀양 박씨
생몰
1914년 5월 19일 ~ 1981년 11월 28일
출생지
평안남도 안주군
사망지
서울특별시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3. 논란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박영만은 1914년 5월 19일 평안남도 안주군에서 부친 박치옥(朴治玉)과 모친 김진옥(金振玉)의 사이에서 5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한의사이자 대지주였고, 그는 어린 시절을 유복하게 보냈다. 고향 안주에서 소학교를 졸업한 뒤 1927년 평안남도 진남포시의 진남포공립상공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러던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며칠간 구금되었고,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이후 1933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일본군 문부성 시행 검정시험에 합격한 후 와세다대학에서 영문과를 전공했다. 그러다 진단학회 및 조선민속학회 회장을 맡고 있던 석남(石南) 송석하(宋錫夏)와 면식이 생긴 그는 송석하의 권유에 따라 매년 방학을 이용하여 전국을 답사하며 민담을 수집해 조선전래동화집(朝鮮傳來童話集)을 집필했다. 그는 이 책을 1937년에 출판하려 했지만, 총독부에게 사전검열을 받을 때 책의 서문이 민족 자주의식을 선양한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원고를 압수당하고 며칠간 구금을 당해야 했다.

다행히 이때 압수된 원고는 후에 회수할 수 있었고, 그는 3년 뒤인 1940년 6월 20일 학예사(學藝社)에서 <조선전래동화집> 초판을 출간했다. 이외에도 여러편의 희곡과 소설을 썼지만, 대부분 총독부의 검열을 통과하지 못해 공연이나 출판을 할 수 없었다. 1937년, 박영만은 우두 종두법을 전파한 송촌(松村) 지석영의 일대기를 담은 희곡 <선구자(先驅者)>를 집필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총독부의 검열에 걸려 공연되지 못했으며, 그는 항일의식이 다분히 함축된 희곡을 썼다는 혐의로 종로경찰서에 20여 일간 구금되어 심문을 받아야 했다.

이러한 검열에 불만을 품은 박영만은 1940년 2월 조선문인협회 회원인 이광수, 박영희, 최재서 등을 친일 문인들이라고 성토하는 유인물을 만들어 회원들과 유지들에게 밀송하다가 발각되었다. 이 일로 경찰의 추적을 받자, 그는 금강산, 의정부 영화촬영소, 진남포 등지로 은신하다가 1940년 5월 봉천으로 피신했고, 그곳에서 다시 기차와 도보로 이동한 끝에 톈진으로 도주했다. 이후 산시성에서 시계포를 경영하는 동향인의 집에 가서 은신한 그는 다시 분하를 건너 산시군 유격대에 합류했다.

940년 11월, 박영만은 말을 타고 산서성 극난파에 도착했다. 며칠 뒤 중국 국영 중앙통신사특파원의 내방을 받아 인터뷰했고, 곧 <한국청년소설가 박영만 망명 도래 극 난파> 라는 제목의 기사가 중국의 주요 신문지상에 보도되었다. 이것을 본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김구 주석의 명의로 된 신임장을 옌시산 장군에게 송부하였다. 박영만은 곧 옌시산을 만난 뒤 옌시산이 추구하던 토지촌공유제(土地村公有制)에 흥미를 보였고, 옌시산은 그런 그를 산서대학의 교수로 삼아서 잘 대우해줬다.

박영만은 산서대학에 머물 때 문학부 계열의 중국인 학생들에게 2주일 간 한글 강습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1941년 12월, 광복군은 극난파에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명의로 박영만에게 특파원증을 송부해 그를 소환하였고, 이때부터 박영만은 정식으로 광복군에 입적되었다. 1942년 2월 시안에 도착한 그는 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하였으며, 광복군 군가인 <압록강 행진곡>을 작사해 광복군의 사기를 진작시키고자 했다.

우리는 한국 광복군 악마의 원수 쳐물리자.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조국 우리나라 지옥이 돼서 모두 도탄에 헤메고 있다

동포는 기다린다 어서 가자 조국에 등잔 밑에 우는 형제가 있다 원수한테 밟힌 꽃포기가 있다

동포는 기다린다 어서 가자 조국에 우리는 한국 광복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압록강 행진곡


이후 광복군 참령(參領)으로 임명되어 정훈처(政訓處) 선전과원으로 활약했으며, 이범석을 도와 한미합작군사훈련을 실시하도록 주선하였으며, 광복군 총사령부 부령(副領)으로 승진되어 선전과장으로 임명되었다. 특히 그는 영어도매우 잘해 미국 OSS내 한국인 공작반의 광복군측 책임자로 임명되어 미군과 영어로 소통하는 역할을 도맡았다.

8.15 광복 후 귀국한 그는 1948년 1월 15일 한미문화협회 총간사로 취임해 한국의 학생 20여 명을 추천하여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는 임무를 수행했다. 1948년 12월 7일에는 ‘민족정신 앙양 전국문화인 총궐기대회'에 참가했다. 이후 그는 작가로서 제2의 삶을 살아갔다. 1948년 <새로운 성> 상권을 출간하고 1949년에 하권을 출간했으며, 서울중앙방송국[1] 에서 극작가로서 라디오 드라마 극본을 집필하였는데, 대표작으로는 <성웅 이순신>, <홍경래전>이 있다.

또한 광복군 활동 경력을 자주 소설로 다뤘는데, 대표적인 작품으로 <주춧돌>(1963), <광복군: 운명편 상,하>(1967), <광복군: 여명편>(1969), <광복군: 고난편>(1972) 등이 있다. <주춧돌>은 박찬익의 생애를 소설화하여 그린 전기소설이고, <광복군:운명편>은 김학규를 중심으로 제3지대 광복군의 활동을 그린 작품이다. 그리고 <광복군:여명편>은 가상의 인물인 기생 출신의 독립운동가 나영옥을 중심으로 광복군 각 지구를 대표할 수 있는 이들을 열전 식으로 구성한 전기 소설이다. 마지막으로 <광복군: 고난편>은 1940년 이후 이범석을 지대장으로 하는 충칭의 광복군 제2지대 활동, 특히 한미군사합작훈련을 주로 다뤘다. 박영만은 광복군 소설을 쓰면서 제목 앞에 ‘전기소설’, ‘실록소설’이라는 부제를 달기도 했고, 사실 재현과 흥미를 위해 논픽션 소설체를 쓰는 등 문학적 실험을 계속했다.

이렇듯 왕성한 작가 활동을 지속하던 그는 1981년 8월 말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3개월 후인 11월 28일 병상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마지막 저작은 <동방의 태양 한민족>으로, 그가 사망한 후인 1982년에 출간되었다. 그의 유해는 경기도 성남시 모란공원 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94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박영만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3. 논란[편집]


박영만이 1967년에 출간한 <광복군:운명편> 하편은 일본 관동군에서 복무하던 박정희가 사실은 '비밀 광복군'이었다고 서술한다. 이에 따르면, 박정희는 1945년 2월경 뜻이 맞는 한국인 동료들과 부대 안에 비밀조직을 만들고 훈련 때면 사병들에게 우회적 방식으로 독립사상도 고취했다고 한다. 이어 광복군 제3지대장이던 김학규 장군으로부터 “부대를 장악하고 있다가 적당한 기회에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대기하던 중 일제가 예상보다 빨리 항복하는 바람에 거사 시기를 놓쳤다고 한다. 박영만은 <광복군:운명편> 서문에 다음과 같이 기재했다.

대통령이란 그분의 위치가 위치니만큼 오해를 사기 쉬워 도에 넘칠 정도로 그분에 관한 것을 파고들었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직접 본인의 교열까지 받았다. 박정희 동지는 격무 속에서도 원고를 자세히 읽어 주셨으며, 몇 군데 고쳐 달라는 당부까지 하셨다.


그러나 친일인사 연구가이자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인 정운현이 집필한 <실록 군인 박정희>에 따르면, 박영만은 5.16 군사정변 후 반혁명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 뒤 풀려난 박창암 전 혁명검찰부장을 찾아가 대뜸 "같이 박 대통령을 한번 도와보자. 어느 지하운동 리더의 공적을 박 대통령 것으로 만들고 싶으니 도와 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기어이 박정희를 비밀 광복군으로 소개한 <광복군: 운명편> 하권을 출간한 뒤 책을 박정희에게 전달했으나 환대는커녕 "내가 무슨 광복군이냐"며 호통만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독립운동가였던 박영만이 집필한 이 소설은 그후로도 박정희가 사실은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수행했다는 주장의 근거로 인용되고 있다. 대한민국 육군본부는 <창군전사>에서 "박정희, 신현준, 이주일 등은 광복군 제3지대의 비밀 광복군으로서 거사 직전에 해방을 맞이했다"라는 문구를 삽입했다가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 박정희 정권에서 합참의장, 국회의원을 지낸 장창국은 1984년에 출간한 <육사 졸업생>에서 박정희가 비밀 광복군에 가담했다고 기술하기도 했다.
[1] KBS의 전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