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면(합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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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합천군 CI.svg 합천군
봉산면
鳳山面 | Bongsan-myeon




광역자치단체
경상남도
기초자치단체
합천군
행정표준코드
5480039
관할 법정리
12리
하위 행정구역
20행정리 35반
면적
80.58㎢
인구
1,410명[1]
인구밀도
17.50명/㎢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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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 산청군·함양군·거창군·합천군

김태호 (3선)
경상남도의원 | 합천군 선거구

장진영 (초선)
합천군의원 | 나 선거구

신명기 (3선)

조삼술 (3선)

행정복지센터
김봉길 17 (김봉리 343-5)
봉산면사무소
1. 개요
2. 역사
3. 지명유래
3.1. 권빈리
3.2. 압곡리
3.3. 상현리
3.4. 도곡리
3.5. 김봉리
3.6. 봉계리
3.7. 고삼리
3.8. 양지리
3.9. 노곡리
3.10. 술곡리
3.11. 계산리
3.12. 송림리
4. 특징
5. 교육
6. 기타


1. 개요[편집]


경상남도 합천군, 묘산면, 합천읍, 대병면, 용주면, 거창군 신원면, 남상면, 남하면과 맞닿아 있다.


2. 역사[편집]


태종 3년에 봉산으로 명명하였으며 1914년 합천현의 독토면과 삼가현의 옥계, 모태, 계산면을 통합하여 봉산면이라 함. 1987년 죽죽리가 용주면으로 이탈됨.


3. 지명유래[편집]



3.1. 권빈리[편집]


  • 권빈1구

서기 1550년대 경에 함안 조씨 수도가 입촌 창동하자 1580년대 경에 김해 김씨 송강가음이 래거하여 정착하고그 후손들이 본동과 김봉리 봉계리에 산재하고 있으며 1780년대 경에 정선 전씨 영이 거창세서 입촌하였고 그후 각 성씨들이 전입하여 오늘에 이르기 까지 대동을 이루어 번창하게 살아왔다. 동명은 함안조씨와 김씨가 신기한 후 관직을 버리고 방랑하던 전주이씨 한 분이 이곳을 지나는 것을 보고 정착하여 같이 살자고 권했다고 해서 권빈이 되었는데 후에 빛날 빈(彬)자로 바꾸어 勸彬이 되었다. 동쪽은 『살태재』가 있어 묘산면과 경계를 이루고 남쪽은 『깨곡재 』와 도치골, 저어실곡 ,통시곡,굴바곡등 지명이 있다.


  • 권빈2구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팔계 정씨와 함안 조씨가 오도산 남쪽 산간 유곡성지라 하여 수목을 벌채하고 초가집을 지어 거주하게 됨으로 마을이 이루어졌으며 여산 송씨 히학이 성주에서 서기 1710년대 경에 남평 문씨 봉선이 1760년대 경에 입촌하고 이후 각 성씨가 전입하여 오늘에이르고 있으며 마을창계자 정씨와 조씨의 후손은 현재 한사람도 거주하지 않는다. 동명은 처은 오도산 남쪽이라 남쪽개울 이라고 남계 (南溪)라고 하다가 후에 남평문씨가 입촌하여 합천 남계와 삼가 남계가 있기 때문에 남(藍)자를 써서 남계 라고 하였다. 해발 400미터의 고지대이나 옛날에는 거창에서 합천간의 통행로 한길로에 있었으며 옛 합천시장날에는 통행자가 끊이질 않았고 『무긍터』성지골, 누리골,파궁터, 점터, 화전동,남송전,평바위,거북바위 등이 있으며 원님의 무덤이라는 『육골묘』도 있다.


  • 권빈3구

천석거부 성주배씨가 살다가 백년이 못되어 후손이 없어 어디론지 가버렸다고 하는 전언이 있으며 현재 대성을 이르고 있는 밀양손씨는 1610대에 옹랑이 래거하여 마을이 이루여 졌으며 수원백씨는 1860년대 경에 민수가 본면 남계동에서 입촌하였다. 그후 각 성씨가 전입하여 그 후손들이 번창하게 생활하고 있으며 동명은 음지쪽이라서 권빈음지마라고 하였다. 옛부터 火氣가 洞中에 칩입하여 화재가 빈번히 일어나기로 지인이 말하기를 『소금간수』를 火方에 묻으면 화재를 免(면)할 수 있다하여 해마다 소금간수를 묻어 왔다는 왔다는 마을은 지금은 한토막 전설에 불과하며, 마을 동쪽 성지골에는 성처렴 쌓인 바위뒤에 5평 정도의 굴이 있음. 혹자는 도둑골 이라고도 함. 마을 뒤편에 널바위는 그 형체가 '관'과 같아 널바위 라 부르고 있다.



3.2. 압곡리[편집]


  • 압곡1구

목사 오계 조정립(曺挺立)의 아버지 부사 도촌 조응인(曺應仁)이 지곡동으로 가는 길목 밭담불에 지곡서당을 짓고 박무민당 선생과 작시하였다고 양가문집에 기록되어 있으나 본동은 아니고 서기 1630년대 경에 목사공의 다섯째 아들 조시건(曺時建)이 정치 좋고 살기 좋은 이곳에 정착하여 후손과 유생들을 육성케하여 마을이 이루어졌으며 그 후손중에 대학자가 배출되어 마을 옆 서당골에 서당을 짓고 후학육성에 힘썼다. 동명은 마을의 지형이 오리와 같아서 오리 압(鴨)를 머리로 하고 오리는 항상 물과 더불어 살아야 함으로 물호 (湖) 압호라고 목사공이 지었다고 한다 동쪽에는 옛날 방자가 어지를 받들고 호명하였다는 방동산이 있고 서쪽에는 서당골이 있으며 북쪽에는 칼바위,투구바위,말바위가 있음. 특히 마을앞 소류지는 오리의 놀이터로 소류지가 있어야 마을이 번창 한다고 옛 어른들이 설치 하였다.


  • 압곡2구

이조 숙종때 판서를 거쳐 영의정으로 추정받은 청숙공 박신규의 후손인 박경유가 신묘사화후 갑오년(1710)에 락남하여 경북 성주군 청파면 적송리에 우거 타가 정미년(1720)에 지곡촌에 정착하여 처음에 다래나무 덩굴을 제거하고 가옥을 건립하여 생활한 것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본동인 지곡촌에는 밀양박씨 일족만 살고 있고 숙성산 산정평지에 널밭이라는 마을이 있어 감자를 파전하여 주식으로 하고 10호미만으로 살다가 6.25동란으로 폐촌이 되었다. 마을앞엔 1,134미터의 오도산이 옹립하여 후편의 숙성산과 쌍을 이루어 그 사이의 기암 계곡에서 흐르는 맑은 물을 이름하여 지곡천이라 한다. 동명은 옛부터 지곡사(智谷寺)가 있어 지곡이라 하였다고 하며 기암 계곡에서 흐르는 맑은 물을 이름하여 지곡천 이라하고 우편에 곽씨들이 살았다는 곽가샘이 있으며 좌편에는 박경유가 심은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있다. 안골 골짜기에 은이 나왔다는 은점골과 산삼이 자생 하였다는 삼밭 이 있고 숙성산에는 산성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 압곡3구

이 마을은 1760년대 경에 경북 고령군 쌍림면 안림리에서 백동근과 백동길의 형제분이 처음 정착하였으며 그 후손들이 번창하게 살아오고 있다. 동명은 압곡1구와 2구 보다 뒤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서 새터라 하였다. 지곡천에서 흐르는 맑은 물이 마을앞을 흐르고 있으며 국도가 인접하여 살기 좋은 마을이다. 마을 앞의 미륵들은 옛날 지곡사를 가르키는 미륵불상 2쌍이 있는 앞들이므로 미륵들 이 되었다고 하고 마을 남쪽의 마구들은 옛날 유일한 통신수단인 권빈역을 통과하는 역마를 잠재우며 일시적으로 사육하는 곳이어서 마구들이라 불러왔으며 지금 국도변에 몇그루 노송도 역마를 매어두던 나무라서 마구소나무라 한다.



3.3. 상현리[편집]


서기 1620년대 경에 도산 허함께서 합천군수로 계시다가 후에 병란을 피하여 이곳에서 거주하게 된 것이 마을이 생긴 처음이며 그후 1630년대경에 광주 노시 세홍과 밀양손씨 연복이 입촌하고 1780년대 경에 합천이씨 우익과 김해김씨 제희가 1820년대경 의성 김씨 정광이 전입하여 그 후손들이 번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명은 마을터가 거미줄에 서리가 맺혀있는 형국이라 서리상(霜)자와 뒤편에 있는 봉현재의 고개현(峴)를 합하여 상현이라 함



3.4. 도곡리[편집]


임진왜란시 창녕조씨,성산이씨,은진송씨 3인이 험한 바윗틈에서 무성하게 자라 우거진 다래나무 속에서 피난하다가 이곳에 가옥을 짓고 정착하니 마을이 생긴 처음이며 현재 위3성의 후손은 한 집도 없고 대성을 이루고 있는 청주한씨는 1900년대 경에 가천에서 태이가, 밀양박씨는 경림이, 1730년대에 전입하였다. 동명은 이 근처에서 처음 생긴 마을이라서 도음도자를 머리로하여 도곡이라 하였다고 하나 다른 설로는 크고 작은 돌이 많이 있는 곳이라서 돌골이라 하였다고 한다. 합천댐으로 수몰후 이사를 갔지만 (행정1구) 마을 서쪽에 큰 은행나무가 있고 오고가는 사람이 쉬어가는 정자가 있었다. 살구행(杏) 정자정(亭)자를 합하여 행정이라 하였다.



3.5. 김봉리[편집]


서기 1622년에 목사 오계 조정립이 관직을 그만 두고 이곳에 돌아와 현재의 봉서정(鳳棲亭)을 건축하고 유생들을 육성하므로 차차 마을이 이루어졌으며 동명은 봉두산이 동네의 서편에있어 오행에 서쪽이 김이므로 김봉이라 하였다. 창포꽃처렴 푸르며 맛이 좋은 창포샘은 마을의 식수로 이용했다고 한다.



3.6. 봉계리[편집]


본 마을은 옛날 강씨와 주씨가 번창하게 살았다고 하며 약 500년전 진양정씨, 김해김씨, 합천이씨가 살았다고 하고 정씨는 잦은 흉년으로 인하여 망일산 산정에서 지망을 한바 거창쪽에는 항상 구름이 많은지라 그곳으로 이사하였다고 존하며 대성을 이루고 있는 고령박씨는 1570년대 경에 지신이 김봉리에서 입촌하였고 그후 차차 각 성씨가 전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명은 개울이 부락 양쪽에서 내려와 앞에서 합수됨으로 걸안이라 하였는 데 그후 마을의 크고 오래도록 편암함을 뜻하고 발음이 같은 거안으로 개칭하였다.



3.7. 고삼리[편집]


언제 마을이 이루어졌는 지는 미상이나 오랜 옛날부터 인가가 있었다고 전해오고 있다.현재 대성으로 살고있는 합천이씨는 문충공 강양군 개의 후손인 한성부좌윤 수화가 1730년대에 밀양박씨,안동장씨,금녕김씨는 1850년대 경에 각각 전입하였다.



3.8. 양지리[편집]


  • 양지1구

원래 문화루씨가 마을에 처음 살았다고 전하며 지금도 북쪽에는 유장군 비석과 상석이 있으며 그 다음은 파평윤씨 태사공 후손 정가가 1560년대 경에 입촌하였고 대성을 이루는 사천이씨는 성균생원 욱의 후손인 철동이 서기 1600년대 경에 전입하여 지금까지 살고 있으며 이후 각 성씨가 전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명은 예부터 수원이 부족하여 기장농사를 많이 지어 왔으므로 기장곳이라 하여 기장실이라고 하였고 삼가현 모태면 서곡리로 불리어 오다가 행정구역 개편으로 합천군 봉산면 양지리 쪽이라서 양지라 함. 마을 앞에는 봉두산과 「나팔 등」등이 있고 서쪽으로는 왕재봉, 북으로는 대관산이 있음. 전설에 의하며 계명산에서 닭이 나와 딱 발탕에서 놀다가 기장실에서 기장을 주워먹고 달구산으로 가 버렸다고 한다.


  • 양지2구

본 마을은 배지동과 저전동이 있는 데 먼저 배지동은 서기1650년대 경에 합천이씨 정신이 처음 시거하였으며 그후 은진송씨 유민이 1760년대 경에 전입하여 그 후손들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저전동은 장흥마씨 한분이 노곡리에서 처음 입촌하였다고 하나 지금도 그 후손들이 진출하였고 사천이씨 늑이 1580년대 경에 입촌하여 그 후손들이 오늘에 이르도록 살고 있다. 동명은 배 지동을 이동(梨洞)이라고도 하며 보통 배마을 이라고 한다. 옛날에 배나무가 많이 있었고 저전동에는 탁나무가 많이 있어 탁발동 이라 하였음.



3.9. 노곡리[편집]


  • 노곡1구

서기 1560년대 경에 장흥부원군의 후손인 훈련원참봉 마가연이 계명산이란 명지가 있는 이곳에 정착하여 유생들을 육성하였고 밀성부원군의 십육세손인 진사 박성균이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이 이루어 졌다. 동명은 계명산지이므로 닭의 알가리 터라 하여 가리터라고 하였으며 닭의 아가리터는 갈대가 있어야 한다고 하여 갈대노자를 써서 노리로 하였다가 행정구역 개편시 굴 곡자를 더하여 노곡리로 하였다. 마을앞에 햇대등,인바위,복리봉이 있고 복리봉 낙처에 마씨 계폭대(삼폭대,삼폭포)가 있으며 박씨 장누지소와 흥묘대가 있다. 옛날 진주에서 서울간 등과(登科)길의 대로 로써 마상행인이 끊이지 않는 큰길가라는 들이 있으며 행인들이 하나하나 던져진 돌로 모여진 조산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어 조산재가 있고 부자가 살았다는 장재터, 권씨, 김씨가 살았다는 권김 마,개남사가(介南寺)가 있었다는 개남골,사기(砂器)점이 있었다는 점곡 등이 있다.


  • 노곡2구

본 마을은 왕재봉이 뒤에서 감싸주는 아늑하고 작은 마을이며 북쪽에는 삼폭포가 있어 예부터 유생들과 풍수사들이 모여 정담을 나누어 왔다고 한다. 8명산중의 하나인 계명산지가 있는 곳으로서 마을 형태가 닭이 알을 낳는 닭알통 같다고 하여 닭구산이라 불리어 오는 이곳에 서기1790년대 경에 마분준이 시거하면서 흐린날씨가 갑자기 개여 아침에 동아 오른 햇빛처럼 맑게 개여서 그 신비함을 보고 동명을 조양동이라 하여 지금도 본동을 달구산 또는 조양동이라 부른다.


  • 노곡3구

1590년대 경에 초계정씨 정문이 초계에서 임진왜란을 피하여 본면 술곡리에 거주하다가 큰 화재로 인하여 이곳에 살게 된 것이 마을이 생긴 처음이며 이후 각 성씨가 전입하여 오늘에이르고 있다. 동명은 임진왜란시 군마을 사육훈련 하기위하여 군막을 지은 곳이어서 군막이라 하였다.



3.10. 술곡리[편집]


서기 1730년대 경에 금녕김씨가 처음 입주하였다고 전해오며 현재 대성을 이루고 있는 경주최씨는 1680년대 경에 참봉공 학경의 증손인 주부공 경휘와 오죽헌공 경신이 노파리를 거처 입촌하여 그 후손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번창하게 살아왔다. 동명은 본래 남은터라고 하였는 데 최모려 선생외 도학자가 속출하여 관직을 사양하고 은거하여 왔으므로 남은동이라 하였다.



3.11. 계산리[편집]


  • 계산1구

1590년대경에 경북 옥동에서 경주최씨홍연이 시내마을에 시거하고 1670년대에야로면 구정리에서 김해김씨 정현이 래거하였으며 그후 각 성씨들이 전입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번창하게 살고 있다. 동명은 시내동과 장밭동이 있는데 시내 동은 새로이 생긴 마을이며 마을앞에 내가 흐르고 시내라 하였고 장밭동은 옛날 삼덕곡내와 부근 마을의 사람들이 상호 물물교환을 하던 장터이라서 장밭이라 하였다 한다.


  • 계산2구

이 마을은 동편,서편,남계,개울마,새터의 5개마을이 합하여 계산2구라 한다. 처음 생긴 동편 마을은 세조등극이후 정난을 피하여 이곳에 온 성군생원 사천이씨 욱이 시거하여 수대를 살고 있는 1590년대 경 임진란을 피하여 안동 권씨 만선이 이곳에 정착하여 사천이씨의 사위가 되면서 마을이 이루어 졌다. 서편동은 1680년대경에 수원백시 사옥이 시거하고 개울마는 1680년대경에 파주염씨 신흡이 거창군 남상면 월평리에서 시거하였으며 새터마을은 1690년대경에 합천이씨 인봉이 시거하였다. 남계마을은 1710년대에 밀양박씨 치덕이 거창 남하 지산리에서 이곳에 정착하였으나 해발460의 고지대이고 농사에 불편하므로 약 250년 동안 후손들이 살다가 1955년을 기점으로 하여 농사에 편리한 현재의 부락으로 집단이주하였다.



3.12. 송림리[편집]


본 마을은 들마와 개정지의 2개마을로 되어 있다. 들마는 서기 1790년대 경에 밀영손씨 학원이 권빈리에서 이곳 742번지에 시거하고 장흥고씨 봉주는 서기 1810년대경에 김봉리에서 래거하여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그후 각 성씨들이 전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개정지마을은 1935년도에 권빈에서 이곳까지 현도로가 개통되자 1938년에 밀양박씨 금구가 압곡2구에서 이곳884번지에 4칸 2줄을 새 집을 짓고 정착하자 각 성씨가 속속 전입하여 마을이 이루어졌다. 동명은 들속에 있는 마을이라서 들마라고 하고 개정지는 지명의 유래를 알수 가 없다. 들은 넓고 땅은 기름지나 수원이 부족하여 한밭을 면하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살지 못하고 권빈리,김봉리,송림리 등지의 주민들이 출입 경작을 하여 오던 곳이며 현도로 개통이전에는 지금의 길밑들보 둑이 권빈으로 연결되는 큰길이었고 길밑에 들이 있었으므로 이들의 이름이 길밑들이 되었다. 개정지 들은 지금에 와서 봉산지서와 봉산중학교가 있고 6.25사변 직후에는 봉산면사무소가 일시적으로 유치되었으며 면 창고 등이 있었는 것을 보면 예날 고명한 학자께서 미리 예견하고 개정지라 하였는지 모른다.



4. 특징[편집]


면소재지는 김봉리이다. 이 면의 특징이라 하면 거창군을 경계로 하고 있고 특히 합천댐이 있어 대병면과 함께 수몰가구와 수몰가정이 많다.
합천읍보다 거창읍이 더 가까워[2] 대부분 본일은 거창가서 보며 중학교와 고등학교도 거창으로 간다.[3]

농어촌버스 운행횟수도 합천방면보다 거창방면이 훨씬 더 많으며 합천방면은 대병경유, 묘산경유, 계산리경유 등 계통이 다양하고 최소 30분은 잡아야하지만 거창행은 24번 국도로 운행해 20분이면 서흥여객터미널에 가고, 25분 이면 거창읍내 중심지인 박약국이다. 단, 거창방면은 합천행과 달리 시계외요금을 부과해 요금은 거창행이 더 비싸다.

관내의 술곡리는 실질월경지로 술곡리를 벗어나 다른 봉산면 지역으로 가려면 거창군 신원면 수원리를 거쳐 가야한다.


5. 교육[편집]


초등학교 - 봉산초등학교 (공립)


6. 기타[편집]


[1] 2023년 6월 주민등록인구[2] 3km 차이 밖에 안나지만 인구 자체도 합천보다 거창이 더 많고 상권도 거창이 더 발달했다.[3] 합천 - 봉산 거리:21km, 봉산-거창 거리:18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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